12월 2,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27장 – 성벽 위의 무대,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27장 – 성벽 위의 무대,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1. 국회 앞 계단 – 오늘만큼은, 이곳이 성벽이다 국회 본청 앞 계단. 안개가 가볍게 깔린 아침 공기 속에서 카메라 삼각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각 방송사 로고가 붙은 마이크들이 긴 뱀처럼 엮여 출입문을 향해 뻗어 있었다. “오늘 열리는 건 ‘ESG 구조개선과 금융책임 실태조사 청문회’입니다.” 리포터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정○○ 사태 이후, 또 다른 구조적 문제를 짚겠다는 취지인데요.” “어젯밤 실명으로 등장한 이른바 ‘익명 제보자 A’, 김성훈 전 대리도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할 예정입니다.” 어디선가 손피켓들이 흔들렸다. – “구조를 바꿔라, 사람을 바꾸지 말고!” – “제보자 탄압 중단!” – “투자자 보호? 사람 보호부터!” 피켓을 든 이들 사이에는 퇴직자 모임에서 온 노인도, 청년 투자자도, 노조 조끼를 입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 국회 건물의 흰 기둥들이 성벽처럼 서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이곳은 정말로 “성벽 위의 무대”가 될 예정이었다. 2. 프레스석 – 질문을 준비하는 사람과, 질문을 의심하는 사람 국회 회의장 2층 프레스석. 윤 서연은 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옆자리엔 한 지우가 카메라 세팅을 점검하며 앉았다. “오늘 제목 벌써 떠오르죠?” 지우가 웃었다. “ ‘정○○ 이후, 또 한 번의 청문회 쇼’.” 서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 같은 제목은 이미 누가 쓰고 있을 거야.” “우린 조금 더 잔인하게 써야지.” “누가 누구 이름을 어디까지 이용했는지.” 지우가 회의장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직 텅 비어 있는 증인석에는 이름표만 놓여 있었다. “참고인 김성훈.” “참고인 민도윤.” “그리고 금융당국, 학계, 시민단체…” 지우가 물었다. “오늘 기사 포인트, 어디에 둘 거예...

심판의 전령 - 26장 – 이름의 전쟁

26장 – 이름의 전쟁 1. 방송 다음 날 – 서로 다른 입술에서 같은 이름이 불리다 다음 날 아침. 뉴스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밤새 진행된 토크쇼의 클립이 여러 포털 상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단독 인터뷰 – ‘익명 제보자 A’, 실명 공개하다.” 썸네일에는 얼굴 절반이 어둠에 잠긴 남자의 실루엣, 아래에는 자막이 박혔다. “자산운용사 M사 전 대리 김성훈 ” SNS에는 벌써 수천 개의 글이 쏟아지고 있었다. – “와 저 용기 미쳤다…” – “결국 잘릴 거면서 왜 나와? 가족은 생각 안 하나.” – “그래도 이런 사람 한 명은 있어야 우리가 구조를 보지.” – “또 하나의 정○○ 만들려고 언론이 띄워주는 거 아님?” – “회사도, 정치도, 언론도 다 자기 장사할 거면서…” 어디서는 새벽 근무를 마친 간호사가 휴게실 TV로 인터뷰 하이라이트를 다시 보고 있었고, 어디서는 하루 종일 기사만 읽는 소액 투자자가 떨리는 손으로 자기 펀드 잔고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디서는 정장을 입은 누군가가 출근길 차 안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런 애를 ‘영웅’으로 포장하면 앞으로 누가 회사에서 일하냐.” 그리고 또 어디서는, 작은 TV가 하나뿐인 회색방 안에서 수감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야, 어제 그거 봤냐.” “그 자산운용 대리인가 뭔가—” “자기가 다 불더만.” TV 자막에는 느리게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과—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후회’.” “저는 이제 후자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정○○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게 중얼거렸다. “…두 번째 후회.” “나는 아직 첫 번째 후회에서 한 걸음도 못 떼었는데.” 감방 구석, 낡은 노트 한 권이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그 노트 첫 페이지엔 이미 몇 줄이 적힌 상태였다. “나보다 먼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