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11장 – 무대 위에 올라온 장부들

11장 – 무대 위에 올라온 장부들 1. 새벽 편집실, ‘틀어야 할 것’과 ‘틀고 싶지 않은 것’ 새벽 네 시 반. 신문사 영상 편집실은 밤과 아침 사이의 희미한 틈에 꼈다. 형광등은 이미 오래전에 지쳤는지, 간혹 미세하게 깜빡였다. 모니터 세 대가 줄지어 서 있고, 각 화면에는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장면들이 멈춘 채 떠 있었다. 하나는 의원회관 복도에서 진행되는 압수수색 화면, 하나는 정 회장 사무실 사진 위에 씌운 “정치자금 의혹” 자막, 그리고 마지막 하나에는 파형이 오르내리는 음성 편집 프로그램 화면. 환하게 뜬 파형 위에 마우스 포인터가 멈춰 있었다. “여기요.” 영상 팀장이 재생 지점을 찍었다. 스피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더 이상 제도에 기대지 않는 순간부터, 괴담은 스스로 걸어 다닙니다.” 노 영학의 음성이었다. “우리는 괴담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다만 괴담이 누구를 물어뜯을지— 그 방향 정도는 조정할 수 있죠.” 마우스가 멈췄다. 팀장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거 그대로 나가면 진짜 뒤집어지겠는데.” 옆에 서 있던 시사 프로그램 PD가 말했다. “…그래서 나가야죠.” 그가 답했다. “이미 USB와 녹음 파일은 검찰 증거로 등록됐고, 한 지우 변호사 쪽이 ‘일부 공개 가능’ 의견도 줬어요.” 팀장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쳐도, 방송 윤리는…” “우리가 이걸 숨기면—” PD가 말했다. “누군가는 ‘언론도 한 패였다’고 장부에 적어 넣을 겁니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편집실 구석에서 커피를 들고 있던 윤 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틀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이건 괴담이 아니라 회의 녹음입니다.” 서연이 말했다. “누군가의 상상이나 카더라가 아니라— 실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