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15장 – 말이 기록으로 바뀌는 시간

15장 – 말이 기록으로 바뀌는 시간 1. 목소리들이 같은 문장 안으로 들어오는 곳 ○○지방법원 302호 대법정. 법정 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잡이를 잡아당길 때마다 쇠와 목재의 마찰음이 짧은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원고석과 피고석, 방청석과 증인석, 기자석과 경위석이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자의 위치에는 각자의 역할이 붙어 있었다. 말할 수 있는 자리, 말할 수 없는 자리, 대신 말해 주는 자리, 말이 기록으로 바뀌는 자리. 법정 벽에는 국기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 판사석 위에는 국장이 걸려 있었다. 시간은 아직 시작 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장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된 것처럼 뛰고 있었다. 피해자석 가까운 곳에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 재개발 구역에서 집을 잃은 노인, 군 가혹행위를 제보한 젊은 남자가 각자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 손에는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진단서, 사망진단서, 민원 제기 기록, 재개발 결정 통보서, 인권상담 기록서. 그 서류들은 지금까지 수없이도 무시당했던 종이들이었다. 오늘만큼은 그 종이들이 이 법정 안에서만큼은 **“증거”**라는 이름으로 호명될 예정이었다. 한쪽, 피고인석 뒤에는 국회의원 노 영학 이 옅게 굽은 어깨로 앉아 있었다. 수트는 여전히 잘 맞았고, 타이는 제대로 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옷이 더 이상 ‘의원’의 옷이 아니라 ‘피고인’의 옷이라는 점만 달라져 있었다. 그 앞에는 변호인석. 한 중견 변호사가 두꺼운 공판 준비서면을 정리하며 노 영학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 오늘은 최대한 짧게 말씀하시는 게 좋습니다.” “입장 표명은 준비한 대로만.” 노 영학은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묶음을 슬쩍 내려다봤다. 겉장에는 볼펜 글씨로 작게 적혀 있었다. “나의 변명과 고백 사이”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