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8장 – 기록을 바꾸려는 손, 기록을 지키려는 눈

28장 – 기록을 바꾸려는 손, 기록을 지키려는 눈 1. 청문회 다음 날 아침 – 제일 먼저 움직이는 것은 ‘해설’이다 다음 날 아침. 청문회가 끝난 지 하룻밤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는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어제의 장면을 ‘해석’하고 있었다. 포털 메인에는 각기 다른 제목들이 올라와 있었다. “민도윤, 구조 설계 책임 인정… ‘제 이름도 함께 비판받아야’” “김성훈, ‘완벽한 피해자 아니다’ 발언… 여론 엇갈려” “여야, ‘ESG 구조 개선’ 놓고 공방… 결국 또 말뿐인가” 같은 청문회, 같은 문장들이었지만 기사마다 강조하는 단어는 달랐다. 어떤 매체는 민도윤의 발언을 크게 뽑았다. “책임 회피 대신 ‘내 이름도 비판받아야 한다’며 구조적 책임을 인정한 점은 이례적이다.” 다른 매체는 그 문장 앞뒤를 잘라내고 이렇게 정리했다. “민도윤, ‘실무진 일탈 아니다’ 발언 후퇴… 결국 ‘회사 책임’으로 물타기?” 또 어떤 방송은 김성훈의 한 마디만 집요하게 반복했다. “ ‘저는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 같은 말을 놓고 한쪽은 “양심 선언”이라고 불렀고, 다른 쪽은 “책임 회피용 안전한 자기비난”이라고 불렀다. 이른 아침, 정치인의 휴대전화에는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 “의원님 어제 질문 좋았습니다. 보도자료에 그 부분 꼭 넣겠습니다.” – “오늘 라디오 출연 시 ‘구조를 묻기 위해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다’ 멘트, 한 번 더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 “상대 당 의원은 제보자 공격 쪽으로 라인 잡는 것 같습니다. 대비 멘트 준비하겠습니다.” 어제 회의장 안에서 날아다니던 문장들이 이제는 각자의 입맛에 맞게 잘려 새로운 문장으로 재조합되는 중이었다. 청문회는 하루 만에 “기록”에서 “해설”로, 그리고 곧 “무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2. 회사 비상회의 – 계획이 어긋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것 같은 시간, M사 20층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