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4,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장 – 조용한 교실의 살인

2장 – 조용한 교실의 살인 1. 강가의 꽃다발 겨울로 넘어가는 강바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를 품고 있었다. 젖은 흙, 오래된 낙엽, 도시에서 흘러 내려온 기름기, 그리고… 한 번도 제대로 끝나지 못한 울음의 잔향. 한강 둔치의 자전거 도로 한쪽, 철제 난간 아래로 내려가는 콘크리트 계단 끝에 작은 제단이 하나 있었다. 낡은 곰 인형 하나, 바람에 색이 바랜 종이학 몇 개, 비닐 포장도 제대로 뜯지 못한 채 놓여 있는 편의점 꽃다발. 꽃다발 옆 사진틀 속에는, 교복을 입은 소년 하나가 웃고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모범생의 웃음처럼 반듯했고, 눈가에는 아직 어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의 맑음이 남아 있었다. 사진 밑에는 손글씨로 적힌 글이 있었다. “민서야, 엄마는 아직도 네가 문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강바람이 종이 쪽지를 살짝 흔들었다. 글씨는 여러 번 눈물에 번졌다 다시 덧그려진 흔적이 있었다. 철제 난간 옆,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한 시온. 그는 강물을 보지 않고, 꽃다발과 사진, 그리고 사진 속 소년의 웃음을 보고 있었다. 눈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다만 무언가 오래된 것을 다시 꺼내 읽는 사람 의 눈이었다. 잠시 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중년 여인이 비닐봉지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검은 패딩 점퍼와 낡은 운동화, 손에는 작은 국과 반찬이 든 도시락 용기. 그녀는 꽃다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왔다, 민서야…” 목소리는 강바람보다 더 떨렸다. 그녀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은 국그릇 뚜껑을 열었다. “너 좋아하던 미역국 끓였다. 생일날은… 못 지켜줬지만, 오늘은 그냥… 네가 먹고 싶어 했을 것 같아서…” 그녀의 손이 국그릇 위에서 잠시 멈췄다.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얘기 좀 했어. 선생님이 또 그러더라. ‘어머님, 이제 그만 놓아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