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16장 – 장부를 쥔 자의 얼굴

16장 – 장부를 쥔 자의 얼굴 1. ‘도시의 기둥’이라고 믿는 남자 정 회장이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새벽 다섯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침실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정리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벗어둔 셔츠는 이미 사라지고, 새로 다려진 셔츠와 넥타이가 옷장 안에 줄지어 서 있었다. 호텔 같은 집, 집 같은 호텔. 그는 바깥 풍경을 한 번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커튼을 열지 않았다. 대신 벽면 TV를 켰다. 음성은 끄고 자막만 켜 둔 채 뉴스 채널을 넘겼다. “노 영학 1심 첫 공판, 피해자 증인 잇따라 출석” “군 가혹행위·요양원 학대, 구조적 책임 어디까지?” “괴담인가, 구조의 그림자인가 – ‘도시의 전령’ 논쟁” 제목 하나하나가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는 않았지만, 어떤 제목은 분명히 그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조적 책임 어디까지?” 정 회장은 미간을 한 번 주름 잡았다. ‘어디까지’라… 사람들은 늘 구조라는 말을 참 편하게도 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한 단어로 묶어놓고 그 안에 자기 책임까지 다 던져 넣으니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인생 대부분을 숫자와 표, 지도와 그래프로 살아온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정 회장에게 도시는 먼저 지도로 보였다. 재개발 구역 경계선, 병원과 요양원 네트워크, 도로망과 물류센터 위치, 인구 분포와 소비 패턴. 그 위에 마지막에 올라가는 것이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나는 이 도시의 기둥이다. 누군가 허름한 건물에서 떨어져 죽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는 오래된 골목을 부숴야 한다. 누군가 병원 침대에서 오래 버티게 하려면, 누군가는 의료비와 행정비를 냉정하게 잘라야 한다. 누군가는 숫자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는 언젠가 노 영학이 한 말이 떠올랐다. – “회장님, 결국 장부를 쥔 사람이 진짜 권력입니다.” 그때 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