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19장 – 붉은 도장, 검은 잉크, 그리고 한 번만 휘둘러진 칼

19장 – 붉은 도장, 검은 잉크, 그리고 한 번만 휘둘러진 칼 1. 새벽의 벨소리 – 인간이 만든 첫 번째 단두대 새벽 다섯 시. 정 그룹 본사 건물. 평소에는 야근을 마치고 나가는 직원들만 지나가던 1층 로비에 낯선 구둣발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영장 가져왔습니다. ○○지검 특수수사본부입니다.” 굳게 닫힌 유리문이 열리고, 검은 점퍼와 수사 조끼를 입은 사람들 수십 명이 서류 박스와 노트북 가방을 들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앞에 선 검사는 현관에 서 있던 경비원에게 영장 사본을 내밀었다. “건물 내 재무본부, 전략기획실, 의료·복지 계열 관리 부서, 서버실 등—” 그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만큼 차가웠다. “이 건물 대부분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든 눈을 비비며 출근하던 직원들이 멈춰 섰다. 노트북 가방을 든 젊은 대리가 동료에게 속삭였다. “이거… 진짜로 왔네.” “맨날 기사에서만 보던 ‘대규모 압수수색’이…” 다른 직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그래도 나름 착하게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어디까지 공범인지도 모르겠다.” 서버실 문 앞에서는 디지털 포렌식 요원들이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메일 서버 전체 백업합니다.” “윤리 신고 시스템 로그, 삭제 기록 포함해서 다 뽑으세요.” “요양원·병원 관련 파일, ‘리스크’라는 단어 들어간 건 전부 표시.” 붉은 도장을 찍은 영장 사본이 복사되어 각 층에 배포됐다. 그 붉은 도장은 우연히도 단두대에서 떨어지는 칼날의 윤곽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이제 장부를 뒤집어 보는 건 전령이 아니라 검사들이네.” 그러나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날 새벽, 이 도시는 인간이 만든 첫 번째 단두대의 나사 를 제대로 조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2. 도망칠 것인가, 불어버릴 것인가 – 공범들의 밤 압수수색 소식...

심판의 전령 - 18장 – 성벽 위에 올라선 사람들

18장 – 성벽 위에 올라선 사람들 1. 공청회 공고 – 장부가 낭독되는 날 ○○시청 홈페이지 메인 화면. 평소 같으면 축제 홍보 배너와 관광 안내 이미지들이 차지하고 있을 자리 한켠에, 낯선 공지가 하나 걸려 있었다. “도시 구조와 인권 실태에 관한 시민 공청회 개최 안내” 주관: ○○시의회, ○○시 인권위원회 일시: ○월 ○일 오후 2시 장소: 시의회 대회의실 안건: 재개발·의료·돌봄·군 인권 관련 시민·피해자 증언 청취 관련 기업·기관·전문가 의견 청취 맨 아래, 작게 적힌 문장. “누구든 자기 이름으로 이 도시에 대해 말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할 수 있습니다.” 윤 서연은 이 공지를 처음 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정말로 이 도시에 이런 문장이 공식 문서로 적히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는 곧이어 도착한 메일을 열어 보았다. 보낸 사람: ○○시 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제목: “[참관 및 발언 요청] 〈도시의 장부〉 취재진 및 관련 변호인께” 내용은 간단했다. “귀하의 보도가 이 공청회 개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청회 패널로 기자님과 한 지우 변호사님을 정식으로 초청합니다.” “또한 기사에 등장했던 피해자·제보자 분들께서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자기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 발언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서연은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제 우리가 쓴 문장들이 공문서 안의 문장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취재가 판결문과 법령, 공청회 기록의 언어로 옮겨가고 있다. 그녀는 한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시에서 우리를 초청했어요.” “성벽 위에 우리를 올리겠다고 합니다.” 한 지우가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웃었다. “드디어 장부를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갈 시간이군요.” 2. 이름을 고르는 밤 – 성벽 위에 올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