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22장 – 피 묻지 않은 주먹, 피 냄새 나는 구조

22장 – 피 묻지 않은 주먹, 피 냄새 나는 구조 1. 작업장의 소란 – 숫자 대신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 늦은 오후. 교도소 작업장. 플라스틱 부품을 맞추고, 종이를 접고, 반복적인 손짓들이 기계의 톱니처럼 한 줄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는 맨 끝자리에서 작업대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선풍기 하나 돌아가지 않는 답답한 공기 속에서 수용자들의 숨소리가 조용한 합창처럼 겹쳐졌다. 그때, 작업장 한쪽에서 낮게 섞인 욕설이 들려왔다. “야, 이거도 못 맞추냐, 병신아.” “손이 느리면 그만큼 더 내놔야지.” 몇 줄 앞. 왜소한 체격의 수용자 하나가 손가락 끝을 떨며 부품을 맞추고 있었다. 팔에는 옅은 흉터가 여러 겹. 그의 이름은 정준호 . 폭력 사건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보증 사기와 빚 독촉에 쫓기다 자잘한 범죄로 구속된, “구조의 밑바닥에서 떠밀려 들어온 사람”이었다. 옆에 앉은 덩치 큰 수용자가 준호의 작업물 상자를 툭 건드렸다. “너 오늘 할당량 모자라면—” 그는 두 손가락을 비벼 보였다. “알지?” 준호가 작게 말했다. “…오늘은 진짜 더 못 내요.” “가족들이… 면회도 안 와요.” 덩치 큰 수용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게 쓸모없는 인간이면 가족이라도 잘해주든가.” 그는 준호의 어깨를 콱 잡아 의자에서 반쯤 끌어내렸다. 작업장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정○○는 머리를 숙인 채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귀는 점점 그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간수 하나가 작업장 앞쪽에 서 있었지만, 멀찍이서 딴청을 피우는 척 휴대용 단말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기도 장부가 있다. 누구를 어디까지 맞아도 되는지, 누가 어디까지 빼앗겨도 되는지— 눈빛 몇 개로 그 선이 정해진다. 덩치 큰 수용자가 준호의 상자를 발로 밀었다. 부품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야, 이딴 손으로 뭐 먹고 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