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21장 – 감옥 안에서 다시 쓰이는 장부, 감옥 밖에서 다시 쌓이는 성벽

21장 – 감옥 안에서 다시 쓰이는 장부, 감옥 밖에서 다시 쌓이는 성벽 1. 첫 번째 새벽 점호 – 설계자가 줄의 끝에 선 날 정○○이 교도소 철문 안으로 들어온 지 벌써 몇 달이 흘렀다. 어느새 이른 새벽의 일정도 몸에 배어 있었다. 5시 기상 5시 30분 점호 6시 식사 작업, 교육, 점검… 새벽 점호 시간. 좁은 운동장에 같은 수의, 같은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 있었다. 정 회장은 줄의 거의 끝에 서 있었다. 감옥 안에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가 뉴스를 보고 알게 된 죄수들”과,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죄수들”이 섞여 있었다. – “야, 쟤 그 양복 아저씨 맞지 않냐?” – “뉴스에 나오던 그 사람? 요양원, 병원, 뭐 어쩌고…” – “어차피 여기선 다 똑같은 수번이지. 별명은 ‘회장님’이겠지만.” 간수의 호각 소리가 울렸다. “수용자 전원 머리 들고 정면!” 정 회장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무표정한 간수의 얼굴, 옆 줄 죄수들의 어깨. 한때 수천 명이 내 사인을 기다렸다. 이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여기서 아무도 없다. 오로지— 그는 자기 가슴에 달린 네모난 패치를 내려다봤다. “수용자 번호 ○○○번.” 이곳에서는 성벽 설계자도, 재벌도, 회장도 아닌 이름. 숫자로 호명되는 사람. 점호가 끝난 뒤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 죄수가 정 회장 옆을 지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선 다 똑같아요, 회… 아니, 아저씨.” “어차피 이 안에서도 따로 벽이 쌓이긴 하지만.” 정 회장이 그를 쳐다봤다. “여기에도 성벽이 있나?” 죄수가 웃었다. “있죠.” “누가 말 잘 통해서 작업 좋은 데 배치되는지, 누가 간수들이랑 친한지, 누구 말이 ‘민원’이 되고 누구 말이 그냥 ‘투덜거림’이 되는지.” “여기도 장부 있습니다, 아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