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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전령 - 8장 – 성벽 안쪽에서 일어난 첫 균열

8장 – 성벽 안쪽에서 일어난 첫 균열 1. 수사실, 버려진 하수인의 둘째 선택 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 창문 없는 조사실. 벽은 흰색이었지만, 오래된 형광등 불빛에 어딘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종이컵 두 개. 한쪽은 미지근한 물이 반쯤, 다른 쪽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 재문은 둘 다 마시지 않고 앞에 놓인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평생이 걸린 것도 아니고, 하루가 걸린 것도 아니지. 그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짚었다. 경찰 학교, 정보과, 퇴직, 컨설팅 회사, 의원실과의 계약, 그리고 문화센터 계단. 문이 열렸다. 수척한 얼굴의 검사가 서류철을 들고 들어왔다. 뒤에는 회사에서 선임했다는 변호사가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피의자 이 재문 씨.” 검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공식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합니다. 변호인 입회하에.”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하시기 전에 몇 가지 사항만 기억해 주십시오. 지금 단계에서 위쪽 이름을 먼저 꺼내는 것은 이 재문 씨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조언인 척했지만, 사실은 경고에 가까웠다. 검사가 서류를 펼쳤다. “우선 가방 안에서 나온 문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프린트물을 이 재문 앞으로 밀었다. “전령 팬덤 폭력 연출 매뉴얼, 이른바 ‘여론 관리 플랜’ 문서입니다.” 이 재문은 문서를 보지도 않은 듯 눈을 감았다. “당신 서명이 맨 아래에 있습니다.” 검사가 말했다. “문제는 그 위에 적힌 내용입니다.” 그는 한 줄을 짚었다. “목표: ‘도시의 전령’ 괴담 관련 과격 팬덤 이미지 형성, 향후 ‘괴담·가짜뉴스 방지법’ 추진의 사회적 명분 확보.” 검사는 시선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문서, 누가 만들라고 했습니까.” 변호사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금 단계에...

심판의 전령 - 7장 – 첫 번째 칼날이 스친 자리

7장 – 첫 번째 칼날이 스친 자리 1. 의식을 되찾은 자 병원 병실, 새벽.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번져 있었다. 기계는 일정한 박자로 소리를 냈고, 창문 틈으로는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밤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침대 위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에는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 입 안에는 말라붙은 피와 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긴… 어디지. 시야가 흐릿하게 따라잡은 것은 침대 옆 의자에 놓인 경찰의 모자였다. 침대 난간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쇠줄은 그의 손목과 침대 프레임을 짧게 이어 붙여 놓고 있었다. 그제야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문화센터… 계단… 가방… 심장이 옆구리에서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형사가 들어왔다. “정신 드십니까, 이 재문 씨.” 남자는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이 재문. 전직 정보 경찰, 지금은 여론·위기 관리 컨설턴트.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신분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여기가…” “병원입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셨죠.” 형사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운이 좋으신 편입니다. 조금만 더 나쁘게 부딪혔으면 이 얘기도 못 할 뻔 했어요.” 이 재문은 말없이 숨을 골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곳은 머릿속 어딘가였다. “가방은…” 말끝이 잘렸다. 형사는 그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그 가방 말입니까?” 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프레이랑 칼, 폭죽, 그리고 재미있는 서류들이 잔뜩 들어 있더군요.” 이 재문의 목이 마르고 타들어갔다. 형사는 종이 몇 장을 꺼내 병상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복사된 문서였다. “대상: ‘도시의 장부’ 간담회 참석자 일동.” “목표: ‘전령 팬덤 폭력 집단’ 이미지 연출…” “방법: 복면, 현수막 파손, 의자 투척, 스프레이 문구…” 맨 아래에는...

심판의 전령 - 6장 – 설계된 사냥

6장 – 설계된 사냥 1. 어둠 속에 그려진 시나리오 늦은 밤, 도시 중심의 한 빌딩 15층. 간판에는 컨설팅 회사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유리문 안쪽 회의실은 선거 전략 회의실과 다를 바 없었다. 조명이 낮게 깔린 방 안, 벽면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굵은 글씨가 떠 있었다. “도시의 전령 – 여론전 관리 플랜” 테이블 끝자락에 노 영학이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살짝 풀어져 있었고, 자리에 놓인 물컵에는 얼음이 거의 녹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마케팅 회사 대표, 전직 정보 경찰 출신 자문위원, 여론조사 전문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전직 정보 경찰 출신 남자가 레이저 포인터로 화면을 가리켰다. “의원님, ‘전령 괴담’ 여론은 지금  세 갈래 로 갈라져 있습니다.” 화면에는 간단한 도표가 떠 있었다. ① “전령이든 뭐든 나쁜 놈 죽이면 좋다” – 분노형 환호층 ② “심판은 좋지만 방법이 문제다” – 회의적 공감층 ③ “괴담이고 폭력이다, 전부 막아야 한다” – 불안형 거부층 남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3번은 의원님 기자회견 이후로 꽤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1번과 2번입니다.” 그는 그래프를 확대했다. “1번은 대놓고 전령을 찬양하는 층. 지금은 소수지만 감정적으로는 가장 폭발력이 큽니다.” “2번은 의원님께 가장 위험한 층입니다. ‘저 놈들은 나쁘다, 근데 왜 아무도 제대로 처벌 안 하냐’ 이 정도 선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들.” 노 영학이 팔짱을 꼈다. “왜 위험하지?” 전직 정보 경찰이 말했다. “이 층은 쉽게 ‘정치적 반대자’가 됩니다. 제도권을 믿지 않기 시작하면 누군가 ‘새 판’을 깔자고 나설 때 가장 먼저 움직일 사람들입니다.” 마케팅 회사 대표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요— 1번과 2번을  한꺼번에 위험한 이미지로 묶어야 합니다.” 그가 다음 슬라이드를 띄웠다. 화면에 큼지막하게 적힌 제목. “‘전령 팬덤’ = 잠재적 폭력 집단 프레임” “모든 전령 언급, 모든 분노에 기반한 정의 담론을 조금씩 ‘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