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 문제는
현재
내부 조사 중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가 말했다.
“제가
이 회사와 그룹을 대신해
대표로 사과드린다는 점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비난과 비판도
모두
감수하겠습니다.”
그는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이 순간
모든 죄를
자기 어깨에
올려놓으려는 사람처럼.
화면 아래
댓글창에는
벌써 반응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 “또 나왔다,
‘대표 사과’ 전문 변호사.”
– “얼굴 잘생긴 방패막이 하나 세워놓고
뒤에선 구조 그대로겠지.”
–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기자들 앞에 서는 사람도
필요하긴 함.”
– “이 사람 요즘
웬만한 스캔들에는
다 낀다던데?”
2. “저 사람, 자주 보이지 않아요?” – 기사에서 기사로 이어지는 이름
윤 서연은
사무실 구석 자리에서
그 중계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도진.
이름은
어디서 많이 들었다 싶었는데,
최근 몇 년간의 기사들이
머릿속에서
뒤늦게 줄을 세웠다.
“대형 교회 재정 비리
의혹 이후,
‘기관을 대표해 사과드린다’며
기자회견에 나섰던 변호사.”
“유명 연예인 학폭 논란 때,
피해자와의 합의 및
사과문 조정을 맡았던
‘위기관리 전문가’.”
“집단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 측
‘사회봉사 프로그램’ 기획하며
‘재사회화 모델’로 포장하던 사람.”
그리고
이틀 전 자정,
독자가 메일로 보내 준
스캔 화면 하나.
“3년 전,
우리 남편 사고 때에도
저 사람이
회사 측 변호사로 나왔어요.”
“기자님 기사에서
말한 그 구조—”
“그 구조의
얼굴이었어요.”
옆자리에서
한 지우가
TV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 사람,
정말 안 낀 데가 없네.”
“학교,
연예계,
대기업,
교회…”
“사람들이 욕할 만한 일에는
다 낀다.”
“근데
신기하게도—”
지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작
법정 기록에는
이 사람 이름이
거의 안 남아요.”
“소송 대리인 명단에는
후배 변호사들 이름이 더 많고.”
“본인은
항상
‘대외 협력’,
‘법률 자문’.”
“법정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언론과 여론과
피해자 감정을
관리하는 사람.”
서연은
핸드폰 메모장에
이름 하나를 적었다.
“한도진.”
그리고
그 옆에
짧게 썼다.
“이름을
팔아
타인의 죄를
가려 주는 사람.”
3. 정○○의 노트 – “이름을 등기해 주는 사람”
○○교도소 도서실.
정○○는
작은 TV로
한도진의 사과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노트에
새 제목을 적었다.
“이름을 등기로 내어 주는 사람.”
그 아래에
줄을 하나 긋고
이렇게 썼다.
“한도진 –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
현 ○○공익법센터 이사,
위기관리 전문가.”
그는
TV에서
한도진이 하는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다.
“저는
이 회사를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향후
모든 비난과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옆에
작게 적었다.
“비난과 비판은 받겠다.
그러나
법적 책임과
구조적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말하지 않는다.”
정○○는
페이지 하단에
자기 경험을 떠올리듯 썼다.
“나는
숫자를 움직여
남의 회사를 살리려다
내 회사와 사람들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을 움직여
남의 회사를 살리려 한다.”
“나는
내 이름을 잃었고,
이 사람은
자기 이름을
더 비싸게 팔고 있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둘 다
구조의 부역자다.”
“차이는—”
“나는
죄수번호를 받았고,
그는
상패와 강연료를 받는다는 것.”
그는
TV 볼륨을 줄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누가 더 무거운 죄인일까.
직접
구조 안으로 뛰어 들어
사람들을 몰아넣은 나 같은 놈인지,
아니면
구조 밖에서
선 긋는 말을 해 주며
죄를 정리해 주는 사람인지.
정○○는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노트에만 적었다.
“심판자는
언젠가
이 사람의 이름을
장부에 올릴까.”
4. “사과 산업” – 이름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회의
며칠 뒤,
도심의 한 호텔
지하 회의실.
문 앞에는
조용한 팻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비공개 포럼
– 조직 위기관리와
명성 재건 전략”
정장 차림의
홍보팀장들,
인사담당 임원들,
법무팀 직원들이
커피를 들고
드나들고 있었다.
강의실 앞단에는
스크린과 단상이 있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첫 세션은
다들 잘 아시는 분 모셨습니다.”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이시고,
현재는
여러 공익 위원회와
기업의 위기관리 자문을 맡고 계신—”
“한도진 변호사님입니다.”
박수가 이어졌다.
한도진이
단상 위로 올라와
노트북을 연결했다.
슬라이드 첫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과의 기술 –
위기 이후
조직이 살아남는 법〉
그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강연을 시작했다.
“요즘
‘사과 전문가’라는 말까지
듣고 있습니다만—”
“사실
제가 대신 사과해 드리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사과하실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슬라이드에는
이런 문장들이 떠올랐다.
“1. 사과의 주체는 누구인가.”
“2.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3. 법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의 경계.”
“4. 조직 vs 개인,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5. 사과 이후
여론의 피로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는
포인트를 짚어가며 말했다.
“여러분,
‘진정성 있는 사과’라는 표현,
참 많이들 쓰시죠?”
“하지만
진정성은
눈물의 양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진정성은
정확히 어디까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지에서
결정됩니다.”
그는
강연장 뒤편
화이트보드에 선을 하나 그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책임지겠다.”
“여기부터는
구조적인 한계,
사회 전체의 문제,
불가항력적인 요소라고 말할 것이다.”
보드 위 선 아래에는
“사과”라고 적었고,
선 위에는
“설명”이라고 썼다.
“여러분의 조직이
망하는 이유는—”
“사과를 안 해서가 아니라,
선을
제대로 못 그어서입니다.”
회의실 안
몇몇 사람들의 눈이
번쩍였다.
“대리점 사장이 잘못한 일도
본사가 다 떠안겠다고 하면,
조직 전체가
쓰러집니다.”
“반대로
조직이 책임져야 할 일까지
개인에게 떠넘기면—”
“여러분은
수년간
‘갑질 기업’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 조직과
피해자,
여론 사이에
적절한 선을 그어 줄 사람.”
“욕은
제가 먹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무너지면 안 되는 건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여러분의 브랜드.”
“여러분의 구조.”
강의가 끝난 후,
명함 교환 시간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다음에
꼭 모시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에도
‘사과’가
필요할 때가 많아서요.”
“늘 TV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
한도진은
익숙한 웃음으로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이미
수십 장의 명함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5. 상공의 장부 – “이름을 브랜드로 만든 자”
밤.
한 시온은
도시 위
조용한 공기 속에서
장부를 펼쳤다.
새로운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한도진.”
그 아래에는
짧은 설명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직업 – 변호사,
위기관리 전문가.”
“특기 –
조직과 개인 사이,
법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 사이,
사과와 변명 사이에
선을 그어 줌.”
“역할 –
무너져야 할 구조가
끝까지 버티도록
‘대표 사과’를 제공하는 것.”
장부 다른 페이지들에는
이름 대신
사건들이 적혀 있었다.
“A사 직장 내 성폭력 사건 –
가해자: 임원 ○○.
대외 발표: ‘조직 문화 재점검,
피해자 보호 우선.’
실질 결과: 가해자, 타 계열사 전보.”
옆에
작게 적혀 있었다.
“사과 대리인 – 한도진.”
“B그룹 공사장 붕괴 사고 –
사망자 8명.
대외 발표: ‘유족과의 성실한 협의,
안전 시스템 전면 점검.’
실질 결과: 협력업체 관리자 기소,
본사 무혐의.”
옆에
또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컨설턴트 – 한도진.”
“C대형 교회 재정 유용 의혹 –
일부 목회자 도의적 책임 표명,
‘교회 내 정화 노력’ 강조.
실질 결과: 관련자 몇 명 사퇴,
구조 변동 없음.”
또 그 이름.
“법률 자문 및 대외 대응 – 한도진.”
시온은
장부를 덮지 않고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은
칼을 들지도 않았고,
법을 직접
왜곡한 것도 아니다.
그는
사과와 책임 사이에
‘괜찮은 선’을 그어주는
장인이다.
그러나—
그는
장부 맨 아래 줄을 짚었다.
“그가 그은 선의 안쪽에는
늘
살아 남는 구조가 있었고—”
“그 선 밖에는
늘
버려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6. “이름이 무너지면, 나는 끝이다” – 한도진의 밤
한도진의 집은
도심 고층 아파트의
중간쯤 층에 있었다.
창밖으로
불빛들이 내려다보였다.
거실 벽에는
액자 몇 개가 걸려 있었다.
“○○법학전문대학원 특별강연 감사패”
“위기관리 모범 사례상”
“공익 활동 감사장”
책장에는
각종 언론 인터뷰가 담긴
잡지들이
정리되어 꽂혀 있었다.
“위기에 강한 이름,
한도진.”
“사과의 기술,
그는 어떻게 조직을 살리는가.”
테이블 위에는
오늘 받은 명함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와인 잔을 들고
명함 더미를
한 장씩 넘겨보았다.
“인사총무본부장…”
“대외협력실장…”
“홍보팀장…”
각 이름 옆에
메모를 적었다.
“하반기 인사 때
한 번 연락 올 듯.”
“지금은 조용하지만
폭발 가능성 있음.”
“예전에 사고 터졌던 회사,
재발 가능성 있음.”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나를 욕하면서도—”
“내 이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내 얼굴을
방패로 쓰고,”
“누군가는
내 이름을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로 사용한다.”
그는
거실 한 켠에 놓인
거울 앞에 섰다.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내가
한 번
대표로 욕을 먹으면—”
“수천 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지킨다.”
“내가
한 몸 욕을 먹으면—”
“회사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완충재다.”
“나는
조직과 여론 사이의
방호벽이다.”
잠시 후,
그 표정 끝에
작은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어느 날
내 이름이
더 이상 방패가 아니라
화살표가 된다면—
‘저 사람이 있던 구조가 문제였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때
나는
무엇으로
나를 방어할 것인가.
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일 없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나는
이미
다른 자리로
옮겨가 있을 것이다.”
“이름을 파는 사람은
타이밍을 안다.”
“언제 등장해야 하고,
언제 사라져야 하는지.”
그는
다시 와인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웠다.
그러나
목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는
왠지
예전 같지 않았다.
7. 서연의 원고 – “이름이 상품이 된 사람들”
며칠 동안
윤 서연은
책상 위에
포스트잇과 자료들을
마구 펼쳐 놓은 채
타자를 두드렸다.
새 기사 제목의 초안은
이랬다.
〈사과의 기술,
이름을 팔아 조직을 지키는 사람들〉
부제.
“위기관리 산업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버리는가”
서두에는
한도진의
반짝이는 강연 문장을
인용했다.
“진정성은
눈물의 양이 아니라,
어디까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지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 문장 아래에
이렇게 썼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책임을
어디까지
들어 본 것인가.”
기사 중간에는
과거 사건들에서
“대표 사과자”로 등장했던
사람들의 이름 대신,
그들이 했던 말들을 나열했다.
“회사와 조직을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에 대해
모든 비난과 비판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구성원과
성실한 직원들의 노력까지
폄훼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아래에는
사실 관계를
차갑게 적었다.
“그러나
사과 이후
회사 구조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가해자들은
실제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피해자들은
그 뒤
어떤 삶을 살았는가.”
기사에는
세 개의 사례가
구체적으로 들어갔다.
-
집단 괴롭힘 사건 – 대표 사과 이후,
피해자는 회사를 그만두고,
가해자는 다른 팀으로 이동. -
공사장 붕괴 – 사과문과 위령제 이후,
현장 관리자만 실형,
본사 임원은 다른 프로젝트로 이동. -
교회 재정 비리 – 목회자의 눈물의 사과와
변호사의 ‘책임 통감’ 발언 이후,
구조는 그대로.
그리고
각 사례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자문 / 대외 사과 대리 –
H 변호사(익명 요청)”
H.
한도진의 이름은
직접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알파벳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히ント를 남겼다.
마지막 문단에서
서연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제
‘사과 전문가’라는 말을
멋진 수식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위기 상황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건—”
“그 이름이
구조를 바꾸는 데 쓰이는지,
구조를 지키는 데 쓰이는지
질문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름을 팔아
욕을 대신 먹어 주는 사람은—”
“정말로
타인의 죄를 짊어지는가,
아니면
죄를
더 깊이 묻어 버리는가.”
원고를 다 쓰고 난 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K의 중앙이 비었을 때,
누군가
그 자리를
다시 채우려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이름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지켜볼 수는 있다.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8. 칼이 내려오는 밤 – 브랜드가 부서지는 소리
기사의 파장은
이전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글은
묵직하게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앉았다.
고소를 하겠다는 말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변호사님,
이번 포럼은
내부 사정으로
초청을 미루게 됐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다른 분과
진행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언론 쪽에서
요즘
위기관리 관련 비판 기사가 많아서요.
괜히
연결되는 걸
피하고 싶다는 의견이 나와서…”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대부분의 말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신 이름이
이제는
방패가 아니라
타깃이 될 수 있다.”
한도진은
이틀 동안
그제야 작은 초조함을 느꼈다.
“잠깐 지나가겠지.”
“사람들,
원래
오래 기억 못 한다.”
“다른 사건
한두 개 더 터지면—”
“금방
관심이 넘어갈 거야.”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를 달래던
셋째 날 밤.
집 거실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정전도 아니었고,
전구 문제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지만,
어딘가
공기만은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 하나가
조용히 떨어졌다.
‘위기관리 모범 사례상’이라는 글자가
바닥에 부딪히며
금이 갔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잠깐
낯설게 보였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피곤해서 그렇지.”
“요즘
일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가슴 한가운데로
점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숨을 들이키려 할수록
흉곽이 조여들었다.
“왜 이러지…”
그가
소파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거실 한가운데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아니라,
문장의 소리.
“회사와 조직을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에 대한
모든 비난과 비판을
달게 받겠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묵묵히 일해 온
다른 직원들의 명예까지
폄훼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메마른 음색.
그 뒤에
다른 목소리들이
겹쳐졌다.
“사과문이 올라온 뒤,
저는 회사에서
떠났습니다.”
“가해자는
다른 팀으로 갔어요.”
“제가
회사를 망칠 뻔했다는
소문만 남았습니다.”
“변호사님,
그때 저한테 그러셨죠.”
“이 정도 합의면
잘 된 거라고.”
“이 정도 사과면
더는 여론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그 뒤로
아무도
우리 얘기를
묻지 않았어요.”
목소리들의 파도가
한 번 더 쳐 올랐다.
“공사장 사고 때—”
“교회 비리 때—”
“학폭 피해자일 때—”
각기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이
각자의 어휘로
같은 문장을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 대신
욕을 먹은 게 아니라—”
“우리 입을 막았습니다.”
거실 바닥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한도진은
뭔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끝은
허공을 헛돌았다.
그때,
공간이 한 번
뒤집혔다.
9. 거울 방 – 이름이 부서지는 장면
눈을 떴을 때,
그는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거울 속에는
수십 개,
수백 개의 자신이
서 있었다.
그러나
각 거울 속
자기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제가
회사를 대표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교회를 대표해
고개 숙이겠습니다.”
“제가
가해자들을 대신해
사죄합니다.”
거울마다
배경이 달랐다.
어디는 회사 로고,
어디는 교회 십자가,
어디는 병원 현수막,
어디는 공사장 가림막.
하지만
그의 얼굴은
늘 같았다.
이건
내 삶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모아
내 커리어를 만들었다.
거울 아래
자막들이 떠올랐다.
“위기관리의 아이콘,
H 변호사.”
“사과의 기술,
조직을 살린 한 마디.”
“공익과 조직 사이의 다리 역할.”
그 자막들이
한 순간에
화면에서
떨어져 나갔다.
대신
새 문장들이
거울에 겹쳐졌다.
“사과를 맡고
구조를 지킨 자.”
“타인의 죄를
값싸게 세탁해 준 자.”
“이름을 브랜드로 만들어
죄를 은폐한 자.”
그때
거울 하나가
금이 갔다.
그 균열은
순식간에
다른 거울에도 번졌다.
수십 개의 거울이
동시에
부서지기 시작했다.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 속에서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욕을 대신 먹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죄를
묻어 버리는 사람이다.”
“나는
죄를 짊어진 적이 없다.”
“나는
책임을
계산했을 뿐이다.”
그 문장은
한도진이
머릿속으로
한 번도 완전히 인정해 본 적 없는
자기 정의였다.
거울 조각들이
발밑에 쌓였다.
조각들마다
다른 단어 하나씩이
새겨져 있었다.
“사과.”
“위기관리.”
“공익.”
“명성.”
“브랜드.”
“면책.”
“합의.”
“잔존 가치.”
그리고
마지막 조각 하나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도진.”
그 조각이
발 앞에서
조용히 깨졌다.
자기 이름이
조각나는 소리를
그는
처음으로
귀로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름을 팔아
타인의 죄를
짊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네 이름은
죄를 짊어진 적이 없다.”
“네 이름은—”
침묵 한 번.
“죄를
이사시켰을 뿐이다.”
방 한 가운데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검을 든 전령.
한 시온.
그의 눈빛에
분노는 없었다.
다만
닳아버린 피로와
냉정한 이해만이
깊게 쌓여 있었다.
“너는
자신을
‘방패’라고 불렀다.”
“그러나
네가 막은 건
화살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말이었다.”
“그들의 분노,
그들의 이름,
그들의 기록.”
검날이
거울 조각 사이를
스치듯 지나갔다.
실제 피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한도진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심장 소리가
엉키다가
멎었다.
그는
자기가 쓰러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내 이름이—
내가
평생 팔아 온 그 이름이—
지금
상품이 아닌
증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어둠.
10. 기사 한 줄 – 브랜드가 무너진 뒤에 남는 것
현실에서,
한도진은
집 거실 소파 위에서
조용히 발견되었다.
가슴을 움켜쥔 흔적도,
몸부림을 친 흔적도 없었다.
응급팀은
곧바로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말했고,
경찰은
“타살 흔적은 없다”고 했다.
신문에는
작은 부고가 실렸다.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이자
각종 공익 위원회 자문을 맡아 온
한도진 변호사가
지난 밤
자택에서 별세했다.”
몇몇 칼럼에서는
그를
이렇게 기억하려 했다.
“수많은 위기의 현장에서
조직과 사회를 연결해 온 사람.”
“사과의 최전선에 서서
욕을 감내해 온 인물.”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다른 말들이
조용히 올라오고 있었다.
– “예전에
우리 사건 때
회사 앞에 나와서
사과하던 그 사람인가요.”
– “그 뒤로
우린
아무것도 바뀐 걸 못 느꼈는데.”
– “이제 와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수고했다’고만 하긴
좀 이상하네요.”
– “우리 입을 막아 놓고
본인은
‘공익’ 상패 받고 다닌 사람.”
윤 서연은
그 댓글들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짧게 기록했다.
이름을 팔아
타인의 죄를 덮은 사람은—
결국
자기 이름만 남기고
떠났다.
그 이름은
이제
‘공익’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 사람을
무엇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11. 상공의 결론 – 칼이 다시 돌아온 날
밤.
한 시온은
장부를 덮으며
짧게 중얼거렸다.
“오늘의 심판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졌다고 믿은 자,
실제로는
죄를 이사시키던 자.”
장부 한 쪽에는
새로운 기록이 있었다.
“한도진 –
사과 대리인,
위기관리 전문가.”
“심판 방식 –
이름의 붕괴,
심장 기능 정지.”
그 아래에는
다른 줄이 있었다.
“그가 막아 온 말들 –
다시 떠오를 준비 중.”
“그가 지연시킨 변화 –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 있음.”
시온은
도시 아래
수많은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자기 이름을
구조의 앞에 세우는 자들,
자기 이름을
책임의 뒤에 숨기는 자들,
아예 이름을
기록에서 빼버리는 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용히
다른 이름들을
적어 내려가는 사람들.
윤 서연,
정○○,
김성훈,
이름 없는 피해자들.
“칼은
죄를 베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이름을
장부 위에
새기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는
검을 칼집에 넣으며
다음 장의 제목을
조용히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