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7장 – 성벽 위의 무대,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27장 – 성벽 위의 무대,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1. 국회 앞 계단 – 오늘만큼은, 이곳이 성벽이다

국회 본청 앞 계단.
안개가 가볍게 깔린 아침 공기 속에서
카메라 삼각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각 방송사 로고가 붙은 마이크들이
긴 뱀처럼 엮여
출입문을 향해 뻗어 있었다.

“오늘 열리는 건
‘ESG 구조개선과 금융책임 실태조사 청문회’입니다.”

리포터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정○○ 사태 이후,
또 다른 구조적 문제를 짚겠다는 취지인데요.”

“어젯밤 실명으로 등장한
이른바 ‘익명 제보자 A’,
김성훈 전 대리도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할 예정입니다.”

어디선가
손피켓들이 흔들렸다.

– “구조를 바꿔라, 사람을 바꾸지 말고!”
– “제보자 탄압 중단!”
– “투자자 보호? 사람 보호부터!”

피켓을 든 이들 사이에는
퇴직자 모임에서 온 노인도,
청년 투자자도,
노조 조끼를 입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
국회 건물의 흰 기둥들이
성벽처럼 서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이곳은 정말로
“성벽 위의 무대”가 될 예정이었다.


2. 프레스석 – 질문을 준비하는 사람과, 질문을 의심하는 사람

국회 회의장 2층 프레스석.

윤 서연은
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다.

옆자리엔
한 지우가
카메라 세팅을 점검하며 앉았다.

“오늘 제목 벌써 떠오르죠?”

지우가 웃었다.

“ ‘정○○ 이후,
또 한 번의 청문회 쇼’.”

서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 같은 제목은
이미 누가 쓰고 있을 거야.”

“우린
조금 더
잔인하게 써야지.”

“누가
누구 이름을
어디까지 이용했는지.”

지우가
회의장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직 텅 비어 있는 증인석에는
이름표만 놓여 있었다.

“참고인 김성훈.”

“참고인 민도윤.”

“그리고
금융당국, 학계, 시민단체…”

지우가 물었다.

“오늘 기사 포인트,
어디에 둘 거예요?”

“김성훈 얼굴?”

“아니면
민도윤 첫 공식 석상?”

서연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둘 다
중요하지만—”

그녀는
노트북 메모장 맨 위에
한 줄을 적었다.

“ ‘오늘,
누가
자기 이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

“나는
그걸 볼 거야.”

“자기 이름을
방패로 쓰는 사람,
칼날로 쓰는 사람,
혹은
자기 이름 뒤에
남의 이름을 숨기는 사람.”

지우가
맞장구쳤다.

“결국
‘누가 얼마나 오래 마이크를 쥐는가’
싸움이겠죠.”

“그래도
한 문장쯤은
역사를 남길지도 몰라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한 문장을
찾으면 된다.”

“그게
칼이 될지,
방패가 될지는—”

그녀는
아래쪽 문 쪽을 힐끗 봤다.

“오늘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직접 보여주겠지.”


3. 대기실 – ‘증언자’와 ‘사고 원인’ 사이의 의자

국회 본청 안 작은 대기실.

김성훈은
물컵을 앞에 두고
손가락으로 컵 받침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검찰에서 온
참고인 출석 요구서 한 장과,
청문회 출석 안내 공문이
겹쳐 있었다.

나는
오늘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어제까진
‘증언자 김성훈’이었는데—

오늘은
누군가의 입에서
‘사고의 직접 원인’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문이 knock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보좌관 하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김성훈 씨 맞으시죠.”

“조금 뒤에
바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의원님들께서
질문 몇 개 준비해 두셨는데—”

그는
형식적 미소를 지었다.

“긴장하지 마시고
사실대로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김성훈이
작게 웃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거기 아닙니까.”

보좌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가
이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청문회입니다.”

“사실과 정치가
적당히 섞이는 자리죠.”

문이 다시 닫혔다.

김성훈은
눈을 감았다.

어제 TV에서
‘내 이름으로 후회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 정도까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그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최소한
내 입으로
거짓말만은 하지 말자.

이름을 내놓았으면,
적어도
내 문장은
남의 입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가야지.


4. 개회 – “우리는 구조를 묻기 위해, 사람을 부른다”

회의장.

플래시가 번쩍였다.
중계 카메라가
각 방송사 로고를 달고
천천히 회의장을 훑었다.

위원장석에 앉은
중진 의원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지금부터
‘ESG 구조개선과 금융책임 실태조사 청문회’를
개회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훈련된 배우처럼
굵고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악행을
다시 찾아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정○○ 사태 이후,
구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니,
정말로 바뀌기나 했는지를
묻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잠시 멈추고,
카메라를 향해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구조를 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구조 안에
서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봉이 다시 내려쳤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께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청문회는
누구를 망신 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기록을 남기기 위한 자리입니다.”

“말씀하시는 모든 한 마디,
모든 이름은—”

“앞으로
이 나라의 장부에
그대로 씌어질 것입니다.”

프레스석에서
서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록을 남기기 위한 자리라…

그래,
적어도
그 말만큼은
사실이다.


5. 첫 번째 증인 – “저는,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첫 번째 참고인 자리.
이름표에는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참고인 김성훈”

김성훈은
마이크 앞에 앉아
물 한 모금을 삼켰다.

위원장이 물었다.

“본인 소개를
간단히 해 주시죠.”

“그리고
어제 방송에서 하신 말씀을
오늘 이 자리에서도
그대로 하실 의향이 있는지.”

김성훈이
입을 열었다.

“네,
자산운용사 M사에서
최근까지 근무했던
전(前) 대리
김성훈입니다.”

“어제 방송에서
드린 말씀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한 의원이
마이크를 켰다.

“김 씨.”

“그 회의록 문장들,
‘도덕적 비난은 감수하되
법적 제재 가능성을 최소화한다’는 문장은—”

“누가 쓴 겁니까.”

“당신입니까,
아니면
위에서 내려온 겁니까.”

김성훈은
준비해 온 거짓말을
한 번 떠올렸다가
그대로 지워냈다.

“그 문장은—”

“수차례 회의를 거쳐
여러 명이 손을 댄 결과물입니다.”

“초안을 쓴 사람,
문구를 다듬은 사람,
결재한 사람 모두가—”

“조금씩
자기 몫의 책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원은
집요하게 물었다.

“그 ‘여러 명’ 중에
민○○ 본부장이
포함됩니까.”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김성훈의 눈이
잠시
증인석 쪽으로 움직였다.

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
오늘 오후에야
들어올 사람.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문서에는—”

“민○○ 본부장님의
결재 사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서늘한 공기가
회의장을 한 번 쓸고 지나갔다.

의원의 눈이
번뜩였다.

“그 말은
민 본부장이
그 문장을 알고 있었고,
동의했다는 겁니까.”

“아니면
바빠서
대충 보고 넘겼다는 겁니까.”

김성훈이
짧게 웃었다.

“저는
누가
바빴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는
스스로를 향해
칼끝을 향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 문장을
쓰고,
고치고,
보고하고,
결재를 올리면서—”

“저 역시
단 한 번도
‘이건 잘못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조에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프레스석에서
서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다.’

이 문장은
오늘 기사에서
반드시 살아야 한다.

다른 의원이
마이크를 켰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서야
제보를 하셨습니까.”

“월급 받을 땐
잘 다니다가—”

“이제 와서
세상이 욕하니까
슬쩍
빠져나오려는 것 아닙니까.”

회의장에
몇몇 웃음이 흘렀다.

김성훈은
그 웃음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부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정○○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제가 일하던 구조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늦었습니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가,
마지막 문장을 더했다.

“그래서
제가
정○○를
완전히 욕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도
너무 늦게
자기 구조를 봤을 뿐이니까요.”

잠시,
회의장 어딘가에서
불편한 기침 소리가 났다.

악을 욕하기 위해 만든 자리에서—

증인은
악과 자기 자신을
같은 줄에 세워 버렸다.

그것이
이 무대가
예상하지 못한 대사였다.


6. 두 번째 참고인 – 대본과 양심 사이의 한 문장

잠시 휴정이 선언된 뒤,
두 번째 참고인이
증인석으로 들어왔다.

민도윤.

검은 양복,
정갈한 넥타이,
정치인보다 더 정치인처럼
다듬어진 표정.

그 앞에는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참고인 민도윤”

위원장이 물었다.

“민 본부장.”

“먼저
간단한 입장을
말씀해 주시죠.”

민도윤은
준비해 온 원고를 펼쳤다.

PR팀과 법무팀이
밤새 다듬어 준 문장들.

“먼저
최근 보도와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저와 우리 회사는
책임을 통감하며—”

대본은
익숙한 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일부 문구 작성 과정에서
부적절한 표현이 사용된 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회사의 공식 입장이나
지침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 부분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

원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부 실무진의
과도한 표현 사용으로 인한
일탈적 사례였습니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회사도,
정치도,
시장도.

대신
하나의 이름.
“김성훈”.

그의 혀끝이
그 이름과 함께
움직이려 할 때,
어제 밤 TV에서 본
짧은 장면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저는
이 구조에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정○○를
완전히 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원고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종이를
살짝 접어
문장 한 줄을 가렸다.

입술이
다른 문장을 골랐다.

“…그 표현들은
‘일부 실무진의 일탈’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PR 담당 임원은
TV 화면을 보다가
손에서 펜을 떨어뜨렸다.

CEO는
국회 생중계를 틀어 둔 회의실에서
몸을 앞으로 쏠렸다.

민도윤은
계속 말했다.

“그 문장들이
제 책상 위에 올라왔을 때—”

“저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법적으로 문제 없게 잘 썼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문장 위에는
제 결재 서명이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책임을
실무진에게만 돌릴 수 없습니다.”

회의장 뒤쪽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어떤 의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준비해 온 ‘일탈 직원’ 대사를
메모장에서 다시 읽었다.

다른 의원 하나가
재빨리 마이크를 켰다.

“그렇다면
민 본부장님은—”

“자신이
이 구조의
설계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민도윤이 답했다.

“네.”

“저는
이 구조를
‘합법적 리스크 관리’라는 이름으로
설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지금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 비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는
한 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 이름도
그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스석에서
서연의 손이
다시 멈췄다.

‘제 이름도
그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

이건
대본에 없던 문장이다.

의원 하나가
재빨리 파고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적겠습니다.”

“ ‘민도윤,
구조적 책임 인정.’ ”

“그런데
아까 김성훈 씨는—”

그는
옆 증인석을 가리켰다.

“자신을
‘완벽한 피해자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분 모두
책임을 인정한다면—”

“그 구조에서
피해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회의장
어딘가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가장 오래 미뤄져 온 질문이었다.

민도윤이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저희 회사 상품에 투자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 구조로 인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현장의 사람들입니다.”

“병원에서,
노인 요양시설에서,
공공 인프라 현장에서.”

“저는
그 사람들을
숫자로만 보았습니다.”

김성훈이
옆에서
조용히 숨을 삼켰다.

정○○라는 이름이
순간
세 사람 머릿속을
동시에 스쳤다.

병상의 회전율,
요양 인력의 최소치,
시설 유지비 절감—

그 모든 것의
‘간접적 피해자들’.

위원장이
마이크를 켰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가 더 큰 악인가’를
겨루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분명해진 건
한 가지입니다.”

그는
의사봉 대신
펜을 들어 보였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거기에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한다는 것.”


7. TV 속 청문회 – 좁은 방, 여러 쌍의 눈

그 시각,
○○교도소 휴게실.

작은 TV가
천장 구석에 매달려 있었다.

수감자들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막에는
방금 전 문장이
천천히 흘렀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거기에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한다.”

정○○는
그 문장을
속으로 따라 읽었다.

옆에서
정준호가 말했다.

“민도윤인가 하는 그 사람,
생각보다…”

말끝을 못 잇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쁘네요,
라고도 못 하겠고.”

“괜찮네요,
라고도 못 하겠고.”

정○○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구조 안에서
오래 산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선도 악도 아닌 척하지만—”

“사실
둘 다 조금씩
섞여 있는 얼굴.”

정준호가
TV를 가리켰다.

“그래도
최소한
자기가 설계했다고
말하잖아요.”

“형님은
예전에
그런 말
해 본 적 있어요?”

정○○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나는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다.”

“그래서
여기 있는 거다.”

TV 속 김성훈의 얼굴이
조금 지나간 뒤,
화면은
패널 토론으로 넘어갔다.

사회자가 말했다.

“오늘 청문회,
어떻게 보셨습니까.”

패널 하나가 말했다.

“제 눈에는
‘책임을 서로 나눠 가지려는 사람들’과
‘책임을 서로 떠넘기려는 사람들’이
동시에 보였습니다.”

다른 패널이
웃으며 받아쳤다.

“둘 다
책임 얘기긴 하네요.”

화면 아래에
실시간 자막이 떠 있었다.

– “결국 말싸움 아닌가요?”
– “그래도 저런 자리라도 있어야지,
안 그러면 아무 말도 못함.”
– “김성훈, 민도윤 둘 다 잡아 넣어야.”
– “그래서 구조는 언제 바꿈?”

정○○는
자신의 노트를 떠올렸다.

나는
내 장부를
겨우 한 페이지쯤
고치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국가 장부가
천천히
다시 쓰이고 있다.

언젠가
이 둘이
만나야 한다.

그는
오늘 청문회에서
인상 깊었던 단어들을
머릿속에 적어 두었다.

– 완벽한 피해자는 아니다.
– 구조를 설계했다.
– 이름도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
– 구조를 쓸 때,
사람 이름까지 써야 한다.

그 단어들은
저마다
작은 칼날을 하나씩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8. 전령의 상공 – 오늘, 칼이 아닌 이름이 서로를 벤 날

저녁,
해가 기울어가는 도시 위.

한 시온은
국회 건물과
교도소 건물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높이에 서 있었다.

바람이
넥타이와 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앞에는
늘 그렇듯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오늘 날짜 아래에
새로운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김성훈 –
청문회에서
‘완벽한 피해자는 아니다’라고 말함.”

“자신의 책임을
구조와 같은 줄에 세움.”

“민도윤 –
대본을 어기고
‘실무진 일탈’ 프레임을 거부.”

“구조 설계 책임
자신의 이름으로 인정.”

“국회 –
‘구조를 쓸 때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한다’는 문장
공식 기록에 남김.”

그 옆 칸에는
다른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정치인들 –
각자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뉴스에 나올지
계산하며 질문.”

“검찰 –
여전히
누가 ‘법적 얼굴’이 될지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 중.”

“회사 –
민도윤을
개혁의 얼굴로 삼으려 했으나,
뜻밖의 대답으로
계획 일부 수정 필요.”

시온은
장부 옆 여백에
작은 표를 그렸다.

왼쪽 열에 썼다.

“오늘
이름을
방패로 쓴 자들.”

  • 질문을 길게 늘이며
    카메라를 의식한 의원 몇 명.

  • ‘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다’며
    자기 입법 홍보로 말을 돌린 정치인.

  • ‘회사 차원의 총체적 책임’ 뒤에 숨어
    구체적 이름을 말하지 않은 사람들.

오른쪽 열에는
다른 이름들이 적혔다.

“오늘
이름을
칼날로 쓴 자들.”

  • 김성훈.
    자기 이름으로
    자기 죄를 벤 사람.

  • 민도윤.
    비록 늦었지만
    자기 이름을
    구조와 같은 줄에 세운 사람.

  • 정○○.
    좁은 방에서
    자기 장부에
    자기 이름을 떨리는 글씨로 쓰기 시작한 사람.

시온은
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
이 성벽 위 무대에서
피를 본 것은—”

그는
손을 내밀어
검을 만지지 않고,
장부를 쓸어내렸다.

“칼이 아니라
이름이다.”

“이름들이
서로를 베고,
서로를 지키려 싸웠다.”

검은
조용히 칼집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칼자루에 살짝 손을 얹었다가
다시 떼었다.

“오늘은
칼의 차례가 아니다.”

“오늘 일어난 일들은—”

그는
장부 맨 아래에
짧게 적었다.

“ ‘이름의 전쟁이
처음으로
성벽 위 공식 무대에서
벌어진 날’로
기록한다.”

멀리서
국회 건물 창문 몇 개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야근하는 보좌관들,
새로운 전략을 짜는 사람들.

또 다른 쪽에서는
교도소 창문 틈으로
희미한 TV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안에서
정○○는
오늘 들은 문장들을
자기 노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나는
오늘
누가
어느 열에 섰는지를 보았다.

시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일 이후,
누군가는
다시
남의 이름 뒤로 숨을 것이다.

어떤 이는
끝까지
자기 이름을
앞에 둘 것이다.

칼날이
향해야 할 자리는—

그는
마지막 문장을
속으로만 말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 하나였다.

오늘,
이 도시는
처음으로
공식 기록 위에서
이름과 구조를
같은 문장에 써 넣었다.

그 문장이
언젠가
누군가의 목을 베는 칼이 될지,
아니면
누군가를 지키는 방패가 될지는—

이제
다음 장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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