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14장 – 법정으로 향하는 행렬

14장 – 법정으로 향하는 행렬 1. 이름이 다시 불리는 방식 재판 출석 통지서는 늘 그렇듯 평범한 흰 봉투에 담겨 왔다. 특별한 문장도, 눈을 사로잡는 문양도 없었다. 다만 봉투 왼쪽 상단에 찍힌 “○○지방법원”이라는 네 글자가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 가슴을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봉투를 뜯어보며 서류를 소파 위에 펼쳤다. “증인 출석 통지서…” 문장을 따라가다 어느 대목에서 손끝이 멈췄다. “사건명: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그 아래 작게 들어간 설명. “피고인: 국회의원 노 영학 외 ○인.” 아버지는 한참 동안 그 이름을 바라만 보았다. 병원 진료실 문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날부터, 민원서류를 들고 복도를 서성이던 날부터, 그 이름은 늘 뉴스 속에서만 멀리 들려오던 소리였다. 이름이 처음으로 내 서류 속에 같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서류를 접어 조심스럽게 봉투에 다시 넣었다. “아빠, 뭐야 그거?” 곁에서 숙제를 하던 둘째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에게 서류를 보여주지 않고 말했다. “응… 아빠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 종이야.” “나중에 커서 알게 될 거야.” 멀리 다른 동네, 재개발 구역에서 쫓겨났던 노인은 같은 봉투를 싸구려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서류 위 “참석 안 할 시 법적 제재 가능”이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가 피식 웃었다. “법이란 게 우리를 불러세우기도 하는구먼.” “살던 집에서 나가라 할 때는 한 번도 내 이름을 제대로 안 부르더니.” 할머니는 출석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달력을 꺼냈다. 날짜 위에 힘없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날은 내가 살다 살다 처음으로 법원이라는 데 가 보는 날이야.” “그러니 다리가 아파도, 허리가 끊어져도—” “한 번은 가야지.” 도시의 다...

심판의 전령 - 13장 – 마지막 카드, 가장 깊은 상처

13장 – 마지막 카드, 가장 깊은 상처 1. 기소장 낭독, 이름이 법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날 지방검찰청 기자실. 벽에는 오래된 범죄 수배 전단이 누렇게 바래 있었고, 천장 형광등은 아침인데도 이미 피곤해 보였다. 앞쪽 브리핑 석에 검찰 관계자가 서 있었다. 그 뒤 스크린에는 굵은 글씨 몇 줄이 떠 있었다. “피고인: 국회의원 노 영학 외 ○인” 기자들의 펜 끝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사는 기소 요지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첫째, 특정 시행사 및 건설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 “둘째, 재개발 구역 지정 및 인허가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와 공모하여 직무를 유기하고 공공에 손해를 끼친 배임 혐의.” “셋째, 이른바 ‘도시의 전령’ 관련 여론 조작 회의를 주도하고,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 한 혐의.” 스크린에 USB, 회의 사진, 파쇄 문서 복원 이미지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검사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넷째, 위와 같은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 측 보좌진과 공모하여 자신을 겨냥한 ‘가짜 전령 공격’ 연출 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수사를 정치적 탄압으로 왜곡하려 한 혐의.” 기자실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한 번 더 무거워졌다. “가짜 전령 공격”이라는 단어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익명의 제보, 온라인 루머로 떠돌고 있었지만, 그것이 검찰의 입에서 정식 용어로 나오는 순간, 그 말은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갖게 되었다.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검사님, 피고인 노 영학 의원이 **‘괴담에 희생된 정치인’**이라고 주장해 온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검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피의자의 정치적 입장 표명에 대해서 검찰이 직접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바로는—” 그의 눈빛이 조금 단단해졌다. “피고인이 ‘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