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14장 – 법정으로 향하는 행렬

14장 – 법정으로 향하는 행렬 1. 이름이 다시 불리는 방식 재판 출석 통지서는 늘 그렇듯 평범한 흰 봉투에 담겨 왔다. 특별한 문장도, 눈을 사로잡는 문양도 없었다. 다만 봉투 왼쪽 상단에 찍힌 “○○지방법원”이라는 네 글자가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 가슴을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봉투를 뜯어보며 서류를 소파 위에 펼쳤다. “증인 출석 통지서…” 문장을 따라가다 어느 대목에서 손끝이 멈췄다. “사건명: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그 아래 작게 들어간 설명. “피고인: 국회의원 노 영학 외 ○인.” 아버지는 한참 동안 그 이름을 바라만 보았다. 병원 진료실 문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날부터, 민원서류를 들고 복도를 서성이던 날부터, 그 이름은 늘 뉴스 속에서만 멀리 들려오던 소리였다. 이름이 처음으로 내 서류 속에 같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서류를 접어 조심스럽게 봉투에 다시 넣었다. “아빠, 뭐야 그거?” 곁에서 숙제를 하던 둘째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에게 서류를 보여주지 않고 말했다. “응… 아빠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 종이야.” “나중에 커서 알게 될 거야.” 멀리 다른 동네, 재개발 구역에서 쫓겨났던 노인은 같은 봉투를 싸구려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서류 위 “참석 안 할 시 법적 제재 가능”이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가 피식 웃었다. “법이란 게 우리를 불러세우기도 하는구먼.” “살던 집에서 나가라 할 때는 한 번도 내 이름을 제대로 안 부르더니.” 할머니는 출석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달력을 꺼냈다. 날짜 위에 힘없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날은 내가 살다 살다 처음으로 법원이라는 데 가 보는 날이야.” “그러니 다리가 아파도, 허리가 끊어져도—” “한 번은 가야지.” 도시의 다...

심판의 전령 - 13장 – 마지막 카드, 가장 깊은 상처

13장 – 마지막 카드, 가장 깊은 상처 1. 기소장 낭독, 이름이 법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날 지방검찰청 기자실. 벽에는 오래된 범죄 수배 전단이 누렇게 바래 있었고, 천장 형광등은 아침인데도 이미 피곤해 보였다. 앞쪽 브리핑 석에 검찰 관계자가 서 있었다. 그 뒤 스크린에는 굵은 글씨 몇 줄이 떠 있었다. “피고인: 국회의원 노 영학 외 ○인” 기자들의 펜 끝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사는 기소 요지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첫째, 특정 시행사 및 건설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 “둘째, 재개발 구역 지정 및 인허가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와 공모하여 직무를 유기하고 공공에 손해를 끼친 배임 혐의.” “셋째, 이른바 ‘도시의 전령’ 관련 여론 조작 회의를 주도하고,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 한 혐의.” 스크린에 USB, 회의 사진, 파쇄 문서 복원 이미지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검사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넷째, 위와 같은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 측 보좌진과 공모하여 자신을 겨냥한 ‘가짜 전령 공격’ 연출 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수사를 정치적 탄압으로 왜곡하려 한 혐의.” 기자실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한 번 더 무거워졌다. “가짜 전령 공격”이라는 단어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익명의 제보, 온라인 루머로 떠돌고 있었지만, 그것이 검찰의 입에서 정식 용어로 나오는 순간, 그 말은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갖게 되었다.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검사님, 피고인 노 영학 의원이 **‘괴담에 희생된 정치인’**이라고 주장해 온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검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피의자의 정치적 입장 표명에 대해서 검찰이 직접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바로는—” 그의 눈빛이 조금 단단해졌다. “피고인이 ‘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