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5장 – 첫 번째 이름, 첫 번째 칼날

25장 – 첫 번째 이름, 첫 번째 칼날 1. 〈성벽 안과 밖〉 2화 – 한 사람의 망설임이 활자가 되다 아침 7시. 지하철 안, 사람들은 각자 손바닥만 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뉴스 앱 상단에는 굵은 제목 하나가 새빨간 ‘속보’ 표시와 함께 떠 있었다. “〈성벽 안과 밖〉 2화 – 책임을 잘게 쪼개는 기술, 그리고 한 사람의 망설임” 첫 문단. “정○○ 사태 이후, 도시는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단지 책임을 더 잘게 쪼개는 기술만 정교해졌을 뿐이다.” 기사 중간에는 내부 회의록 일부가 익명 처리된 회사명과 함께 인용돼 있었다. “ ‘도덕적 비난은 일정 부분 감수하되, 법적 제재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계약 구조를 설계한다.’ ” “ ‘소송·사고 발생 시 1차 책임은 하청, 2차 책임은 재하청, 최종 책임은 계약상 면책 조항으로 상쇄 가능.’ ” 그리고 문단 하나. “이 문장들은 누군가의 상상력이 아니다.” “익명 제보자 A가 우리에게 보낸 실제 내부 회의록의 일부다.” “그는 여전히 이름을 밝힐 용기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익명성 속에서도 분명히 이렇게 적어 보냈다.” “ ‘저는 이 구조에서 죄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 “ ‘다만 더 늦기 전에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습니다.’ ”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사람 하나가 작게 혀를 찼다. “또 구조 얘기네…” 옆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스크린을 스크롤했다. 댓글창에는 벌써 수십 개의 반응이 달렸다. – “이제는 죄도 ESG로 포장하나 보네.” – “그럼 투자하지 말든가.” – “그래도 이런 문서를 까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보는 거지.” – “익명 제보자? 나중엔 그 사람만 잘릴 듯.” 어디에선가 출근길 커피를 들고 기사를 훑어보던 누군가는, 어디에선가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던 간호사는, 어디에선가 ...

심판의 전령 - 24장 – 드러난 이름, 드러나지 않은 칼날

24장 – 드러난 이름, 드러나지 않은 칼날 1. 로그 추적 – 숫자 속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는 기술 자산운용사 ○○타워 19층, 리스크 관리·준법감시팀 사무실. 회색 칸막이 사이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엷게 섞여 있었다. 팀장 박진수 는 모니터 두 대를 나란히 켜 놓고 눈을 좁혔다. 왼쪽 화면에는 최근 3개월간 내부 문서 열람 기록. 오른쪽 화면에는 사내 보안 프로그램이 자동 추출한 “비정상 접근 패턴” 목록. “……여기 있다.” 그의 마우스 커서가 특정 시각을 가리켰다. 접속 시간: 22시 37분 위치: 27층 ○○본부 접속 계정: 사원번호 ○○○-A17 열람 문서: “Risk_Dispersion_Internal_Meeting_3.hwp” 이후 행동: 개인 PC 폴더로 복사 (사내 규정상 ‘주의’ 대상) 옆에서 모니터를 같이 보던 주임이 물었다. “그 시간대에 야근하던 사람 몇 명 안 되지 않습니까?” 박진수가 짧게 끄덕였다. “인사팀에서 출입 카드 기록 받았어.” 그는 다른 창을 열었다. “22시 이후 27층에 남아 있던 사람, 세 명.” 화면에는 세 개의 이름이 떠 있었다. 민도윤 – 본부장 비서팀 ○○○ – 비서 ○○팀 대리 김성훈 주임이 중얼거렸다. “본부장이 자기 문서를 빼가진 않겠죠.” “비서는 관련 권한이 없고…” “남는 건 한 명이네요.” 박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신하긴 이르다.” “단순히 업무 때문에 복사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는 작게 덧붙였다. “요 며칠 우리 회의록 일부가 기사에 등장하고 있지.” 주임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신고하시겠습니까?” “윗선에 ‘유출자 추정 인원’으로…” 박진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구조를 지키는 팀에 속해 있다. 법과 규정을 통해 회사의 장부를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