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 2025의 게시물 표시

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25장 – 첫 번째 이름, 첫 번째 칼날

25장 – 첫 번째 이름, 첫 번째 칼날 1. 〈성벽 안과 밖〉 2화 – 한 사람의 망설임이 활자가 되다 아침 7시. 지하철 안, 사람들은 각자 손바닥만 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뉴스 앱 상단에는 굵은 제목 하나가 새빨간 ‘속보’ 표시와 함께 떠 있었다. “〈성벽 안과 밖〉 2화 – 책임을 잘게 쪼개는 기술, 그리고 한 사람의 망설임” 첫 문단. “정○○ 사태 이후, 도시는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단지 책임을 더 잘게 쪼개는 기술만 정교해졌을 뿐이다.” 기사 중간에는 내부 회의록 일부가 익명 처리된 회사명과 함께 인용돼 있었다. “ ‘도덕적 비난은 일정 부분 감수하되, 법적 제재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계약 구조를 설계한다.’ ” “ ‘소송·사고 발생 시 1차 책임은 하청, 2차 책임은 재하청, 최종 책임은 계약상 면책 조항으로 상쇄 가능.’ ” 그리고 문단 하나. “이 문장들은 누군가의 상상력이 아니다.” “익명 제보자 A가 우리에게 보낸 실제 내부 회의록의 일부다.” “그는 여전히 이름을 밝힐 용기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익명성 속에서도 분명히 이렇게 적어 보냈다.” “ ‘저는 이 구조에서 죄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 “ ‘다만 더 늦기 전에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습니다.’ ”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사람 하나가 작게 혀를 찼다. “또 구조 얘기네…” 옆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스크린을 스크롤했다. 댓글창에는 벌써 수십 개의 반응이 달렸다. – “이제는 죄도 ESG로 포장하나 보네.” – “그럼 투자하지 말든가.” – “그래도 이런 문서를 까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보는 거지.” – “익명 제보자? 나중엔 그 사람만 잘릴 듯.” 어디에선가 출근길 커피를 들고 기사를 훑어보던 누군가는, 어디에선가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던 간호사는, 어디에선가 ...

심판의 전령 - 24장 – 드러난 이름, 드러나지 않은 칼날

24장 – 드러난 이름, 드러나지 않은 칼날 1. 로그 추적 – 숫자 속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는 기술 자산운용사 ○○타워 19층, 리스크 관리·준법감시팀 사무실. 회색 칸막이 사이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엷게 섞여 있었다. 팀장 박진수 는 모니터 두 대를 나란히 켜 놓고 눈을 좁혔다. 왼쪽 화면에는 최근 3개월간 내부 문서 열람 기록. 오른쪽 화면에는 사내 보안 프로그램이 자동 추출한 “비정상 접근 패턴” 목록. “……여기 있다.” 그의 마우스 커서가 특정 시각을 가리켰다. 접속 시간: 22시 37분 위치: 27층 ○○본부 접속 계정: 사원번호 ○○○-A17 열람 문서: “Risk_Dispersion_Internal_Meeting_3.hwp” 이후 행동: 개인 PC 폴더로 복사 (사내 규정상 ‘주의’ 대상) 옆에서 모니터를 같이 보던 주임이 물었다. “그 시간대에 야근하던 사람 몇 명 안 되지 않습니까?” 박진수가 짧게 끄덕였다. “인사팀에서 출입 카드 기록 받았어.” 그는 다른 창을 열었다. “22시 이후 27층에 남아 있던 사람, 세 명.” 화면에는 세 개의 이름이 떠 있었다. 민도윤 – 본부장 비서팀 ○○○ – 비서 ○○팀 대리 김성훈 주임이 중얼거렸다. “본부장이 자기 문서를 빼가진 않겠죠.” “비서는 관련 권한이 없고…” “남는 건 한 명이네요.” 박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신하긴 이르다.” “단순히 업무 때문에 복사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는 작게 덧붙였다. “요 며칠 우리 회의록 일부가 기사에 등장하고 있지.” 주임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신고하시겠습니까?” “윗선에 ‘유출자 추정 인원’으로…” 박진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구조를 지키는 팀에 속해 있다. 법과 규정을 통해 회사의 장부를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