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25장 – 첫 번째 이름, 첫 번째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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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 첫 번째 이름, 첫 번째 칼날
1. 〈성벽 안과 밖〉 2화 – 한 사람의 망설임이 활자가 되다
아침 7시.
지하철 안,
사람들은 각자
손바닥만 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뉴스 앱 상단에는
굵은 제목 하나가
새빨간 ‘속보’ 표시와 함께 떠 있었다.
“〈성벽 안과 밖〉 2화 –
책임을 잘게 쪼개는 기술,
그리고 한 사람의 망설임”
첫 문단.
“정○○ 사태 이후,
도시는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단지
책임을 더 잘게 쪼개는 기술만
정교해졌을 뿐이다.”
기사 중간에는
내부 회의록 일부가
익명 처리된 회사명과 함께
인용돼 있었다.
“ ‘도덕적 비난은 일정 부분 감수하되,
법적 제재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계약 구조를 설계한다.’ ”
“ ‘소송·사고 발생 시
1차 책임은 하청,
2차 책임은 재하청,
최종 책임은 계약상 면책 조항으로
상쇄 가능.’ ”
그리고 문단 하나.
“이 문장들은
누군가의 상상력이 아니다.”
“익명 제보자 A가
우리에게 보낸
실제 내부 회의록의 일부다.”
“그는 여전히
이름을 밝힐 용기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익명성 속에서도
분명히 이렇게 적어 보냈다.”
“ ‘저는 이 구조에서
죄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
“ ‘다만
더 늦기 전에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습니다.’ ”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사람 하나가
작게 혀를 찼다.
“또 구조 얘기네…”
옆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스크린을 스크롤했다.
댓글창에는
벌써 수십 개의 반응이 달렸다.
– “이제는
죄도 ESG로 포장하나 보네.”
– “그럼 투자하지 말든가.”
– “그래도
이런 문서를 까주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보는 거지.”
– “익명 제보자?
나중엔
그 사람만 잘릴 듯.”
어디에선가
출근길 커피를 들고
기사를 훑어보던 누군가는,
어디에선가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던 간호사는,
어디에선가
야식 냄새를 지우지도 못한 채
학교로 향하던 학생은
짧게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구조 안에
나도 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한
바깥 사람이 아니다.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곧
지하철 문이 열리고,
각자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딘가,
이 기사 한 편은
분명
몇몇 사람의 심장 박동을
눈에 띄게 바꿔 놓고 있었다.
2. 긴급 회의 – 책임을 쪼개려는 자들
같은 시각,
○○타워 20층 대회의실.
자산운용사 M사
임원들이
긴급 소집돼 있었다.
스크린에는
〈성벽 안과 밖〉 2화가
웹 페이지 형태로 띄워져 있었다.
법무팀장이 말했다.
“회사명은
이니셜 처리됐습니다.”
“하지만
업계 사람이라면
문맥과 상품 구조만 봐도
어느 회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무담당 임원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래서
어떻게 대응합니까.”
“법적 대응?
명예훼손?”
법무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내부 문서가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
명예훼손으로 가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침묵.
누군가
탐색하듯 말했다.
“그럼
선제적 사과문을
내는 건 어떻습니까.”
“ ‘일부 문구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며
표현을 조정하겠다고…”
다른 누군가가
즉각 맞섰다.
“사과문은
잘못 쓰면
책임 인정이 됩니다.”
“우리 상품에 투자한
기관들이
소송을 걸어오면
누구 돈으로
막겠습니까.”
회의실 공기가
점점
답답해졌다.
그때,
사회공헌·PR 담당 임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스로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모으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내부 문구 작성 과정에서
‘부적절한 표현’을 쓴 직원에게
인사 조치를 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하는 거죠.”
“자, 보십시오.”
그는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정○○ 사태 이후,
대중은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얼굴을 찾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작은 얼굴 하나를 내놓으면—”
손가락이
'그래프' 위를 따라갔다.
“구조 전체에 대한 공격은
완화될 수 있습니다.”
“이건
위기관리입니다.”
몇몇 임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 “내부 책임자 색출…”
– “일탈 직원 하나를
명확히 해서
잘라내는 모양새라면…”
민도윤은
회의실 끝에 앉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또다시
성벽 위에
한 사람의 머리를 올리려 하는군.
이번엔
정○○가 아니라,
이름 없는
누군가.
법무팀장이 물었다.
“구체적인 인물은
누구로 할 생각입니까.”
PR 임원이
주저 없이 말했다.
“작성 실무를 맡았던
중간 직급 직원,
그리고—”
잠깐 머뭇,
그러나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최근
야근 시간대에
비정상적인 문서 열람 이력이 있는
모 대리급 직원입니다.”
“내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업무 범위를 넘어선 자료 열람 및 외부 반출 가능성’이 있었다고
발표하고—”
“그를
‘윤리 규정 위반’으로
중징계하거나
해고하는 쪽으로…”
회의실 안
여러 쌍의 눈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민도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짧게 말했다.
“조사 결과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공식 책임자로 지목하는 건
너무 빠릅니다.”
재무담당 임원이 쏘아붙였다.
“민 본부장,
지금은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개별 직원이
문구를 과도하게 쓴 틈을 타—”
“우리는
구조 전체를 점검하고
개선 방향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PR 임원이 덧붙였다.
“대중은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더 빨리 용서합니다.”
“물론—”
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 ‘나’가
꼭 우리 중
누군일 필요는 없고요.”
회의실에
짧은 웃음이 퍼졌다.
민도윤은
웃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설계한 구조를
너무 잘 배웠다.
책임을
더 잘게 쪼개는 기술.
이번에는
그 기술을—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에게
돌리려 한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잠시 빈 회의실에 남았다.
스크린에는
아직도
기사 제목이 떠 있었다.
“책임을 잘게 쪼개는 기술,
그리고 한 사람의 망설임.”
민도윤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한 사람의 망설임이
김성훈인지,
나인지—”
“기자는
아직 모를 테지.”
“하지만
나는 안다.”
3. 정치인의 계산 – 또 한 번, 성벽 앞에 세울 얼굴을 찾다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
한 중진 의원이
보좌관들이 프린트해 온
기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요즘
이 〈성벽 안과 밖〉이
꽤 회자가 됩니다.”
보좌관이 말했다.
“정○○ 사태 이후
구조 문제를 파고드는
몇 안 되는 연재라서…”
의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좋지.”
“우리가
작년에 통과시킨
‘사회책임투자 촉진법’도—”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법안 홍보 자료를 톡톡 쳤다.
“이런 기사 덕에
더 의미 있어 보이지 않겠나.”
다른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이번 2화는
의원님께
약간 불편한 지점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의원님이
홍보에 참여하신
‘공공-민간 합동 복지 인프라 펀드’가—”
그는
회의록 인용 부분을 가리켰다.
“이 구조와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업계에서 평가받고 있어서요.”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이냐.”
“내가
악한 구조를 홍보했다는 거야?”
보좌관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언론이나 야당에서
‘정○○ 이후에도
정치권과 금융권이
손잡고 구조를 방치했다’는 식으로
연결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짧은 침묵.
의원은
천천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럼
우리는
먼저 나가야지.”
“청문회를 제안하자.”
보좌관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봤다.
“청문회…요?”
“누구를 대상으로요?”
의원이 말했다.
“금융당국,
자산운용사들,
그리고—”
그는
조금 전 기사 속
문장을 떠올렸다.
“이 구조를 설계한
‘얼굴 없는 설계자들’.”
“그중
한 명쯤은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는 게
나쁘지 않겠지.”
그는
입가를 올렸다.
“우리가
구조를 방치한 게 아니라,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나섰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거야.”
보좌관이 물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불러야 할까요.”
의원이 대답했다.
“이 기사에
이니셜로 등장하는
자산운용사 본부장 하나.”
“그리고—”
그는
눈빛을 가늘게 했다.
“익명 제보자 A.”
“익명 뒤에 숨은 사람을
‘국민 앞에’
불러 세우는 건—”
“항상
시청률이 잘 나오거든.”
그 말은
농담처럼 던졌지만,
방 안 누구도
웃지 못했다.
4. ‘내 이름으로 죽을 것인가, 남의 이름으로 죽을 것인가’
오후 2시.
○○타워 27층,
김성훈의 자리.
동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모니터를 보며
엑셀과 이메일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훈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문장만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익명 제보자 A.
한 사람의 망설임.
방금 전까지
그는
자기 이름이
기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안도하고 있었다.
그때,
사내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발신: 준법감시팀.
제목: 언론 보도 관련 내부 조사 안내.
“최근
당사 구조와 유사한 내용을 다룬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당사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내부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간 중
관련 문서를 열람하거나
외부 반출 가능성이 있는 행위를 한 임직원은—”
“조사 절차에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장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조사 과정에서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확인될 경우—”
“개인 차원의
법적 책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김성훈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개인 차원의 법적 책임.
그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처럼
그의 목을
조금씩 조여 왔다.
내가
이 문서를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숫자만 맞추고 있었겠지.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뒤따라온 또 다른 생각.
그렇다면
죽어야 할 때도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겠지.
컴퓨터 모니터 한쪽에는
뉴스 사이트가 떠 있었다.
댓글 하나.
“익명 제보자?
결국
조용히 잘리고 끝날 듯.”
다른 댓글.
“그래도
자기 구조 고발하려고 나선 사람을
‘배신자’라고만 부르면—”
“누가
다음 제보자가 되겠냐.”
김성훈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배신자인가.
아니면
증언자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의
어정쩡한 회색 지대에
서 있는 사람인가.
잠시 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
그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방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또렷했다.
“김성훈 씨 맞으시죠.”
“저는
〈도시의 장부〉,
그리고 〈성벽 안과 밖〉을 쓴
윤 서연 기자입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떻게
제 번호를…”
“회사 내부에서
온 건 아닙니다.”
서연이 말했다.
“다른 경로로
익명 제보자 A께 연락을 드릴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당연히
지금 이 통화 내용은
녹음하고 있지 않습니다.”
“김성훈 씨가
동의하지 않는 한—”
그녀는
한 단어씩 또렷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실리지 않을 겁니다.”
긴 침묵 끝에
김성훈이 물었다.
“…저를
어떻게 알고
‘A’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혹시
회사에서…”
서연이
짧게 웃었다.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지금
회사와 정치권 어딘가에서—”
그녀는
집중해서 말했다.
“누군가는
김성훈 씨를
새로운 정○○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 ‘일탈 직원 하나 잘라냈다’는 말로
구조 전체를 다시 포장하려는 사람들.”
김성훈의 손이
전화기를 쥔 채 떨렸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익명으로 숨어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까.”
서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기자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남의 고통 위에 문장을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언제나 안겨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성훈 씨.”
“제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은
드릴 수 있습니다.”
전화기 너머,
숨소리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들렸다.
“당신이
끝내 익명으로 남는다면—”
“회사와 정치권은
누구를
얼굴로 세울까요.”
“당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를
또다시
성벽 위로 올릴 겁니다.”
“그러고는 말하겠죠.”
“ ‘우리는
책임질 사람을 찾았습니다.’ ”
“그때
구조는
또다시
살아남을 겁니다.”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반대로
당신이
이름을 걸고 나선다면—”
“당신은
큰 위험에 처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사와 기록과 장부 어디엔가—”
“ ‘이 구조에서 일했다가
이 구조를 증언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문장이
남게 될 겁니다.”
“둘 중
어느 쪽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건
당신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통화는
그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둘 사이의 침묵은
몇 분은 부풀어 올랐다가,
마침내
김성훈의 한 마디로
터졌다.
“…기자님.”
“오늘 밤,
조용한 곳에서
만나 주실 수 있습니까.”
“제 목소리로
제 문장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름을
쓸지 말지는—”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결정하겠습니다.”
5. 교도소의 되치기 – 전령의 칼날이 처음으로 빛을 내는 곳
같은 날 오후,
○○교도소.
진정서와 외부 조사 이후,
작업장 내
눈에 띄는 폭력은 줄었다.
그러나
폭력의 기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다른 모양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한 교도관이
감방 복도를 걸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요즘
애들이
언론 타령이야.”
“진정서 한 장 썼다고
세상이 바뀌는 줄 아나.”
그의 이름은
오 상무라고 불렸다.
(교도관들 사이에서 붙인 별명.
늘 ‘상무님’처럼 윗사람인 척해서였다.)
그는
폭력을 직접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폭력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누가 누구를 얼마나 때리는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 폭력의
허가권자였다.
“이번 조사 끝나면—”
그는
동료에게 작게 말했다.
“진정 넣은 놈들
작업장에서
따로 빼 돌려.”
“힘든 라인으로 보내든지,
눈에 안 보이는 구석으로 돌리든지.”
“사람은
맞아도 잊고,
고생해도 잊어.”
“하지만
찍히면
평생 안 잊지.”
그날 저녁,
정○○와 정준호에게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호, ○○호—
내일부터
작업장 라인 변경이다.”
새 라인은
“중노동”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환기장치도 좋지 않고,
무거운 상자를 들어 나르는 작업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곳.
정준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건강이 안 좋아서
의무실—”
교도관이 sp 웃었다.
“건강 안 좋아도
법정에서 잘도 서 있더니.”
“여긴
다 아픈 사람들이야.”
“누구는
마음이 아프고,
누구는
몸이 아프지.”
복도 끝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오 상무의 입가에
얇은 선이 그어졌다.
언론?
진정?
한 번
겪어 보라고 해.
그러면
다음엔
아무도
글 같은 건 쓰지 않을 거야.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 너머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확실합니까.”
오 상무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에는
형광등 빛과
수용자들의 숨소리만
떠다니고 있었다.
“누가…?”
그는
잠시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내
혼잣말이었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몰랐다.
그 순간,
자신의 뒤에
다른 발걸음이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6. 감시 사각지대 – 첫 번째 칼날이 떨어지는 공간
그날 밤,
작업장 창고.
CCTV가 닿지 않는
문과 벽 사이의 좁은 틈.
오 상무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정식 규정상
금지된 행위였지만,
그는
항상
이곳에서
한 개비씩 태우곤 했다.
“휴…”
담배 연기가
어둠 속에서
가늘게 흩어졌다.
진정이 뭐고,
기사고 뭐고.
결국
여기 사람들
하루를 쥐고 흔드는 건—
나 같은 놈이다.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때,
눈앞 공기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마치
열기 위로
풍경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그 앞에는
어느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옷,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눈.
오 상무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삼켰다.
“누… 누구야?”
“여기
출입 통제 구역인데—”
남자는
어깨를 약간 기울였다.
“출입 통제 구역이었습니까.”
“그럼
여기서 담배 피우시는 건—”
그는
담배 끝에서 올라오는 불빛을
가리켰다.
“규정 위반이겠군요.”
오 상무는
순간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당신
어디 소속이야.”
“교정본부?
감사실?”
“이 시간에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
남자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당신이
오늘 낮에
한 말이 있습니다.”
“ ‘사람은 맞아도 잊고,
고생해도 잊는다.’ ”
“그래서
찍힌 놈들은
평생 안 잊게 만들어야 한다.”
오 상무의 얼굴이
질렸다.
“…어디서
들었어.”
남자가 말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의 말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공장과 재개발 현장에서,
그리고—”
그는
감옥 천장을 올려다봤다.
“여기서도.”
오 상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 누구냐고 했지.”
“여기 CCTV 다 있어.”
“지금 당장—”
그 순간,
남자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공기 속에서
어딘가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찰칵.
보이지 않던 칼날이
빛을 한 번
짧게 받아냈다.
아주 잠깐,
형광등의 희미한 빛이
검의 선을 타고 흘렀다.
오 상무의 눈에는
그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따끔한 통증을
목 아래에서 느꼈다.
“…읏—”
손이
목을 더듬자,
거기에는
상처도,
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심장은
갑자기
박자를 잃기 시작했다.
쿵.
…
쿵.
그리고
한 번.
더 이상
다음 박자가 오지 않았다.
오 상무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담배가
손에서 떨어지며
바닥을 데웠다.
남자는
검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한 시온.
“오늘,
이 감옥에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의 작은 장부가
첫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 장부를
찢어 버리려 하는 손 하나쯤은—”
검 끝을
쓰러진 몸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잘라 내도
괜찮겠지요.”
CCTV 화면에는
창고 앞 복도가
고요하게 담겨 있었다.
문과 벽 사이
좁은 틈은
카메라 각도 밖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도소에는
짧은 소문이 돌았다.
– “어제
오 상무
야간 근무하다가
쓰러졌대.”
– “급성 심장마비래.”
– “그 사람
워낙 스트레스 많이 받았잖아.”
어느 누구도
창고 구석의
보이지 않는 칼날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는
분명히 일어났다.
정준호와 정○○의
작업장 이동 명령은
“인사 착오”라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리고
“진정 넣은 놈들 좀 보자”던 말은
복도 어딘가에서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전령의 칼은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방향을 바꾸고자 하던
작은 장부 하나를—
오늘만큼은
살려 두었다.
7. 첫 번째 이름 – 스스로 활자 위에 올라서는 자
밤 10시.
작은 방송국 스튜디오.
라이트들이 켜지고,
테이블 위에
물컵 두 개가 놓였다.
한쪽에는
윤 서연,
다른 한쪽에는
검은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카메라 테스트 중,
스태프가 말했다.
“얼굴은
역광 처리하고,
목소리는
변조 넣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방송 시작 5분 전,
그는
갑자기
마스크를 벗었다.
스태프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봤다.
“저…
이렇게 나오시면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남자는
손을 흔들었다.
“목소리 변조와 역광은
그대로 두세요.”
“얼굴은—”
그는
카메라 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돌렸다.
“그냥
보이게 두죠.”
서연이
그를 바라봤다.
“…괜찮겠습니까.”
“당신 이름이
내일 아침이면
검색창 맨 위에 뜰 겁니다.”
남자가 웃었다.
“기자님이
낮에 하신 질문,
계속 생각해 봤습니다.”
“ ‘내 이름으로 죽을 것인가,
남의 이름 뒤에 숨어 죽을 것인가.’ ”
“어차피
어느 쪽이든
언젠가 한 번은 죽는다면—”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물컵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적어도
제 이름으로
기록되고 싶습니다.”
ON AIR 빨간 불이 켜졌다.
진행자가
오프닝 멘트를 마치고
말했다.
“오늘
저희 스튜디오에는—”
“〈성벽 안과 밖〉 기사에서
‘익명 제보자 A’로 등장한 분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카메라가
서서히
남자 쪽으로 이동했다.
얼굴은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자막에는
분명하게
이름이 떠올랐다.
“자산운용사 M사
전(前) 대리,
김성훈 씨입니다.”
‘전(前)’이라는 한 글자에
서연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이미
회사를 떠났다는 뜻.
오늘 이 인터뷰에 나오기 직전—
어디선가
누군가는
그의 이름을
사내 인사 시스템에서 삭제했다.
진행자가 물었다.
“김성훈 씨.”
“왜
이 구조에서
나오기로 결심하셨습니까.”
김성훈은
천천히 대답했다.
“전
오랫동안
숫자만 보고 일했습니다.”
“사람이
구조를 움직인다고 배우긴 했지만,
실제로는—”
“구조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정○○ 사건 이후,
저희 회사에서는
‘그런 악당은 되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서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습니다.”
“ ‘도덕적 비난은 감수하되,
법적 제재 가능성을
최저로 유지한다.’ ”
“그 문장을 쓰던 손 안에
제 손도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목소리가 흔들렸다.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진행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김성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합니다.”
“이 구조에서
월급을 받으며
아무것도 모른 척 살아온 시간들을.”
“하지만
후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과—”
“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후회’.”
그는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얼굴을 돌렸다.
“오늘 이후
저는
두 번째 후회를
감당하기로 했습니다.”
“이름을
썼으니까요.”
스튜디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어딘가,
멀리서
도시의 소음이
유리벽 너머로 스며들었다.
8. 전령의 장부 – 첫 이름과 첫 칼날을 한 페이지에 적다
그 밤,
도시와 감옥을
함께 내려다보는 높이.
한 시온이
장부를 펼쳤다.
오늘 날짜 옆에
두 줄이
나란히 적혔다.
첫 번째 줄.
“김성훈 –
익명 제보자 A에서
‘증언자 김성훈’으로.”
“자신이 참여한 구조를
자신의 입으로 드러냄.”
“익명을 벗고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배신자와 증언자 사이
회색 지대를
스스로 잘라냄.”
두 번째 줄.
“오○○(오 상무) –
감옥 내 비공식 폭력 구조의
허가권자.”
“진정서를 넣은 자들을
되치기하려다—”
“전령의 첫 칼날에 의해
심장 박동 정지.”
“사인 –
‘급성 심장마비’로 기록.”
시온은
장을 넘기지 않고
한동안
그 두 줄만
바라봤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칼을 뽑았다.
그러나
이 도시의 활자 위에
진짜로 새겨진 이름은—
내 칼에 죽은 자가 아니라,
자기 입으로
자기 죄와 구조를 말한 자였다.
그는
펜을 들어
페이지 아래에 썼다.
“칼은
한 사람을 멈추게 했다.”
“이름은
한 구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먼 ripple을 낳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멀리서
TV 스튜디오의 불빛이
작은 점처럼 반짝였다.
감옥 창문 몇 개에서도
희미한 불빛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어디선가
정○○는
좁은 TV로
김성훈의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자막에 뜬 이름을
조용히 따라 읽었다.
“김… 성훈…”
당신도
결국
자기 장부를
다시 쓰기로 했군요.
정○○는
자신의 노트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빈 공간 하나에
새 문장을 적었다.
“나보다 먼저
이름을 걸고
구조를 증언한 사람이 있다.”
“나는
아직
숫자로 남아 있다.”
그 문장은
자기 자신을 향한
느린 고백이었다.
시온은
그 노트 위 문장까지
모두 읽고 나서야
장부를 덮었다.
“이 도시는
조금씩
칼이 아닌 이름으로
스스로를 벤다.”
“나는
그 칼날이
무뎌질 때마다만—”
검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 번씩
도와주면 되겠지.”
어둠 속에서
장부와 검이
서로 기대어 섰다.
첫 번째 이름과
첫 번째 칼날은
이제
한 페이지 안에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후의 장들은,
그 페이지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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