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19장 – 붉은 도장, 검은 잉크, 그리고 한 번만 휘둘러진 칼

19장 – 붉은 도장, 검은 잉크, 그리고 한 번만 휘둘러진 칼

1. 새벽의 벨소리 – 인간이 만든 첫 번째 단두대

새벽 다섯 시.

정 그룹 본사 건물.

평소에는 야근을 마치고 나가는 직원들만
지나가던 1층 로비에
낯선 구둣발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영장 가져왔습니다.
○○지검 특수수사본부입니다.”

굳게 닫힌 유리문이 열리고,
검은 점퍼와 수사 조끼를 입은 사람들 수십 명이
서류 박스와 노트북 가방을 들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앞에 선 검사는
현관에 서 있던 경비원에게
영장 사본을 내밀었다.

“건물 내
재무본부, 전략기획실,
의료·복지 계열 관리 부서,
서버실 등—”

그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만큼 차가웠다.

“이 건물
대부분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든 눈을 비비며 출근하던
직원들이 멈춰 섰다.

노트북 가방을 든 젊은 대리가
동료에게 속삭였다.

“이거…
진짜로 왔네.”

“맨날 기사에서만 보던
‘대규모 압수수색’이…”

다른 직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그래도
나름 착하게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어디까지
공범인지도
모르겠다.”

서버실 문 앞에서는
디지털 포렌식 요원들이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 “메일 서버 전체 백업합니다.”

  • “윤리 신고 시스템 로그,
    삭제 기록 포함해서 다 뽑으세요.”

  • “요양원·병원 관련 파일,
    ‘리스크’라는 단어 들어간 건
    전부 표시.”

붉은 도장을 찍은 영장 사본이
복사되어 각 층에 배포됐다.

그 붉은 도장은
우연히도
단두대에서 떨어지는
칼날의 윤곽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이제
장부를 뒤집어 보는 건
전령이 아니라
검사들이네.”

그러나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날 새벽,
이 도시는
인간이 만든 첫 번째 단두대의 나사
제대로 조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2. 도망칠 것인가, 불어버릴 것인가 – 공범들의 밤

압수수색 소식은
짧은 시간 안에
정 그룹 계열사 전체로 퍼져 나갔다.

어떤 사무실에서는
문서 파쇄기가
갑자기 과열로 멈췄다.

“이제 와서
갈아도 소용없다니까…”

회계팀 과장이
파쇄기 위를 세게 내려쳤다.

“디지털 기록은
이미 다 떠갔을 텐데
이 종이 몇 장이
뭘 막겠냐.”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자진 출석하고
협조하면—”

“형량,
줄어듭니까?”

변호사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지금 흐름이면
‘먼저 부르는 쪽’이
유리할 겁니다.”

“원하신다면
검찰과
면담 자리를
주선해 보죠.”

그 말은
한 가지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배는 기울기 시작했고,
먼저 물 위로 손을 뻗는 사람이
덜 가라앉을 것이라는 예감.

내부 윤리 제보 시스템 담당이었던
최수진 역시
조사 대상 목록 한 가운데에 있었다.

특수수사본부 조사실.

형광등 빛 아래,
수진은
물컵을 손에 쥔 채
맞은편 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사가 말했다.

“최수진 씨는
회사 윤리 신고 제도 담당자로서—”

“요양원·병원 관련
수많은 내부 제보를
접수해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진의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네.”

“접수했고,
정리했고,
보고했습니다.”

검사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보고서가
그 뒤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고 계십니까.”

수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주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됐습니다.”

“ ‘윤리’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을 틀어막는 끈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

검사가
앞에 놓인 서류를 넘겼다.

“여기
최 씨가 작성한
내부 데이터 일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파일을 꺼냈다.

“여기
최 씨가
외부로 보낸
제보 메일이 있습니다.”

수진은
그 파일을 보며
미소인지,
자조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금고를 열었습니다.”

검사가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잠시 침묵.

“…무섭습니다.”

수진이 말했다.

“제가
이 자리에 앉게 될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후회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후회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녀는
단어를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

“제가
처음 믿었던 ‘윤리’라는 단어까지
같이 버리는 것 같아서요.”

검사는
그 대답을
노트에 그대로 적어 넣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금고 열쇠를 쥔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서류부터
봐야 하는지
안내해 주세요.”

그날,
여러 층의 사무실에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됐다.

어떤 이는
끝까지 침묵을 택했고,

어떤 이는
살아남기 위해
더 큰 이름들을 불렀고,

어떤 이는
자신이
언제부터 공범이었는지조차
모른 채
눈물만 흘렸다.

도시는
지금
각자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언제부터
이 성벽의 돌이었냐.”


3. 정 회장과 전령 –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아닐 대화

압수수색 당일 밤.

정 회장은
본사 건물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한 도시를 내려다보는 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 대신,
조용히 떨고 있는
손가락들이 들려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숫자와 그래프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이제는
그 그래프가
나를 내려다보는구나.

옥상 난간에 기대 선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은
밤이
조금
시끄럽군요.”

한 시온.

정 회장은
놀라지 않았다.

“당신이
온다는 걸…”

그는
웃었다.

“느낌으로
알겠더군.”

시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죠.”

“오늘 나는
칼을 휘두르러 온 게 아닌데.”

정 회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제일
이상한 점입니다.”

“이 정도면
당신이 할 일을
끝내도 되는 밤 아닌가요.”

“검찰,
인권위,
여론…”

그는
도시 곳곳에서
반짝이는 자동차 꼬리불빛들을
가리켰다.

“이 모든 게
당신이 말하던
‘인간이 만든 단두대’라면—”

“이제
당신 칼날은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시온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웃었다.

“흥미롭군요.”

“보통 인간들은
내 칼날이
‘아직 필요 없다’는 말을 들으면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당신은—”

그는
정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칼이
더 빨리 내려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군요.”

정 회장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호기심은
늘 같이 다닙니다.”

“나는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내가 만든 구조가
어디까지 버티고,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그리고
당신이
그 마지막 순간에
어디에 서 있을지.”

시온은
난간 위에 앉았다.

도시 불빛이
그의 뺨을 스쳤다.

“오늘
이 도시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그가 말했다.

“당신과 나의 대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묻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 ‘나는
언제부터
공범이었는가.’ ”

“ ‘나는
내 아이·부모·동료 이름을
장부 속 어디에
두었는가.’ ”

정 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질문들을
오래 전에
그만둔 사람이겠죠.”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신이
‘합의가
우리 죄의 영수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한 걸—”

그는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나는
들었거든요.”

장부 한 가운데에는
정 회장 이름이
굵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

“과거 –
구조 설계자.”

“현재 –
인간 단두대 위에
천천히 올라가는 자.”

“미래 –
(미정).”

정 회장이
웃었다.

“미래가
아직 ‘미정’입니까.”

“이 정도면
‘사형 확정’ 같은 문장이
찍혀 있어야 하는 게
아니오?”

시온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이 장부는
판결문이기도 하지만,
기록지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손으로
어디까지 쓰는지 보고 나서—”

그는
정의 이름을 가리켰다.

“마지막 줄에
내가
한 줄 보탤지 말지
정합니다.”

정 회장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끝까지
내 이름 옆에
칼표시가
안 붙는 경우도 있습니까.”

시온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지금 그걸
묻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미
늦었을 가능성을
가장 크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말 끝에
한 줄이 더 붙었다.

“다만—”

“인간의 단두대가
먼저 내려간 뒤에도
살아남는 죄들이 있습니다.”

“백지 수표를 들고
범죄를 사는 자들,
서류를 조작해
이름을 지우는 자들,
타인의 고통을
재미삼아 장난처럼 쓰다 버리는 자들.”

“그때가 되면—”

그는
장부를 덮었다.

“내 칼날은
여전히 필요할 겁니다.”

정 회장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빛은
도시의 미세먼지와 불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
당신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입니까.”

마치
마지막 고해성사라도 받는 사람처럼.

시온이
조용히 대답했다.

“결과를
속단하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보입니다.”

정이
그를 바라봤다.

“무엇이죠.”

“당신이
처음 구조를 그릴 때
종이에 댔던 펜이—”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처음부터
잉크가 아니라
피를 먹은 펜이었다는 것.

정 회장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언젠가
한 번쯤은
누군가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다.

눈을 떴을 때
시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옥상에는
붉게 번지는 새벽 기운과,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만
남아 있었다.


4. 법이 닿지 못한 한 사람 – ‘브로커’라는 이름의 공백

특수수사가 시작된 지
몇 주 뒤.

한 지우는
늦은 밤
사무실에서
사건 파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추가된 이름 하나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윤상훈.”

재개발, 요양원, 이주 노동자,
군 사병까지—

여러 사건 사이를
기묘하게 오가며
중간에서 연결해 주던 사람.

  • 외국인 노동자 불법 알선,

  • 요양병원 간병 인력 용역,

  • 군 부대 납품 업체 소개,

  • 재개발 구역 이주 대책 민원 창구 ‘도우미’.

겉으로 보기엔
모두 다 “연결”과 “알선”이었다.

법적으로 애매한,
윤리적으로는 분명한,
그러나
증거는 흐릿한 영역.

수사팀의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윤상훈 –
실질적 브로커로 추정되나,
직접적인 지시·대가성 입증 어려움.”

“단순 알선,
중간 소개 수준 주장 가능성 큼.”

“자금 흐름 파악
아직 미완료.”

한 지우는
주먹을 쥐었다.

이 사람은

한 발짝 옆에 서 있었다.

‘난 단지 사람들을 연결해 줬을 뿐이다.’

그 말 한 줄로
책임을 피해 갈 것이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해외 협력 변호사.

– “윤상훈,
곧 출국 준비 중이랍니다.”
– “싱가포르 쪽 계좌 정리한 흔적도 있고요.”
– “정 회장 쪽보다
먼저
빠져나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통화를 끊은 뒤,
지우는
책상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버텼다.

정 회장은
최소한
이 도시 안에서
단두대 위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놈은—

이 구조의 가장 더러운 손은—

조용히 미끄러져
국경 밖으로 나가겠지.

창밖 유리창에
어렴풋이
한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뒤편 회의실에
흐릿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한 시온.

그는
회의실 불을 켜지 않았다.

“오늘은
나를 찾았군요.”

그가 말했다.

지우는
놀랄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 법으로는
이 사람을
제대로 잡기 어렵습니다.”

“지금 증거로는
‘알선’ 정도밖에
안 나옵니다.”

“몇 년 집행유예 받고—”

“다시
같은 짓 하겠죠.”

시온이
창가에 기대 섰다.

“그래서
나에게
묻는 겁니까.”

“ ‘당신 칼,
이번에 한 번만
빌려 쓰자’고.”

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법을 하는 사람이고,
끝까지
법으로 가야 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류 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 이름은
몇 년째
모든 사건 옆에
기생하듯 붙어 있었습니다.”

“늘
한 발짝 옆에서
이득만 취하고
책임은 피해 가는 손.”

“이 손을
한 번도
제대로 자르지 못하면—”

지우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우리가 만드는
어떤 법도,
어떤 판결도—”

“사람들에게
‘정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온은
잠시 지우를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을
내가 제일
귀찮아합니다.”

그 말은
농담 같기도,
진심 같기도 했다.

“대부분은
나를 욕하거나
나만 찾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

“당신은
둘 다 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천천히 말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우가
눈을 들었다.

“…질문이라면.”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인간의 법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전령의 칼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

“ ‘그 칼이
새로운 믿음을 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존을 만들 것인가.’ ”

그는
책상 위 윤상훈 파일을
손끝으로 톡 쳤다.

“이 사람은
당신 법정에서는
겨우
손목만 얻어맞고 나가겠죠.”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이 이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우가
숨을 삼켰다.

“…이미
장부에
올라가 있습니까.”

시온이
조용히 장부를 펼쳤다.

“윤상훈 –
구조 틈새를 파고들어
가장 연약한 이들을
되팔아온 자.”

“혐의 –
이주 노동자 착취,
돌봄 인력 착취,
폭력 은폐 알선,
증거 인멸 주선.”

그 아래에는
긴칸 비어 있는 칸 하나.

“처리 –
(보류).”

지우가 물었다.

“…왜
보류였습니까.”

시온이
창밖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 법이
먼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죠.”

“이제
거의 끝까지 왔다고.”

“더는
당신 법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는
장부에
붉은 줄 하나를 그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한 번—”

그의 눈빛이
조용히 식어갔다.

“전령의 칼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보여 드리죠.”


5. 첫 번째 ‘최종 심판’ – 증거도, 흔적도 남기지 않는 사고

윤상훈은
출국 하루 전날 밤,
마지막으로
한 호텔 바를 찾았다.

도시 한가운데,
유리창 너머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곳.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핸드폰 화면의 뉴스를 훑었다.

  • “정○○ 특수수사,
    측근들 줄소환”

  • “정 그룹 내부 제보자,
    보호 프로그램 신청”

  • “도시의 장부,
    시민 공청회 기록으로 영구 보존”

그는
코웃음을 쳤다.

“다들
센 척은…”

“결국
살아남는 건—”

그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먼저
빠져나가는 놈이지.”

그의 출국 계획은
치밀했다.

  • 해외 계좌 정리,

  • 국적 세탁 준비,

  • 현지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

  • 새 이름으로 발급된 신분증.

이 도시가
날 잊는 데
얼마나 걸릴까.

몇 달?
1년?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가
바에서 일어났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먼저 서 있었다.

“먼저 타시죠.”

낯선 남자가
문을 붙잡고 말했다.

윤상훈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같이 타죠.”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낮은 진동,
층수를 표시하는 숫자가
천천히 올라갔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순간적인 정적.

윤상훈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고장인가?”

검은 코트의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세요.”

“이건
당신한테만
고장입니다.”

윤상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 엘리베이터는
당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열린 장부라고 생각하죠.”

“위로 가는 척 하다가—”

그 순간,
엘리베이터 조명이
한 번 번쩍였다.

벽면을 비추던 거울에는
윤상훈 혼자만
비쳐 있었다.

검은 코트의 남자는
거울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
누구야.”

윤상훈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받아 왔습니다.”

“전령이냐,
사신이냐,
환상이냐.”

“하지만
당신에게
그게 중요한가요.”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비상벨이 울리고,
위쪽에서
철심이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윤상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거
진짜—”

“진짜 떨어지는 겁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정적 속에서
또렷이 들렸다.

“아뇨.”

“당신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그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동안
당신이 연결해 온
모든 구조와 연결이,
한꺼번에 끊어질 뿐.”

엘리베이터 문이
툭, 하고 열렸다.

호텔 직원들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엘리베이터 바닥에는
윤상훈이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목에는
어떤 흔적도,
외상도 없었다.

구급대원이 달려와
맥을 짚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심정지입니다.”

“죽은 지…
금방 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나온 부검 결과는
간단했다.

“심장 돌연사.
기저 질환 및 스트레스 복합 작용.”

어느 누구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
말할 증거는 없었다.

엘리베이터 CCTV에는
윤상훈 혼자 탑승한 화면만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실루엣은
어느 각도에서도
포착되지 않았다.

단지
영상이 깨지기 직전,
화면 한 구석에서
이상한 픽셀 노이즈가
잠시
책 넘기는 모양을 연상케 했을 뿐.


6. 기자의 눈 – 사고인가, 심판인가

다음 날 아침.

포털 사이트 하단에
작은 기사 하나가 떴다.

“정 그룹 관련
브로커 윤○○ 씨,
호텔 엘리베이터 내
심장마비로 사망.”

짧은 단신,
몇 줄짜리 기사.

그러나
윤 서연의 눈은
그 몇 줄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한 지우가
커피를 들고 와
모니터를 같이 보았다.

“…봤습니까.”

서연이 물었다.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가
가장
잡고 싶어 하던 손이었죠.”

“이제
법정으로 데려갈 수 없게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안도도,
환호도 없었다.

그저
묵직한 허탈함.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압수수색, 공청회,
특수수사,
시민 청원…”

“도시가
처음으로
장부를 뒤집기 시작한 이 시점에—”

그녀는
기사 제목을 가리켰다.

“가장 미끄러운 손 하나가
스스로 끊어진 듯
떨어졌다는 게.”

지우가
서류 가방 안에서
한 파일을 꺼냈다.

윤상훈 이름이
굵게 써 있는 표지.

“그 사람은

남의 손을 빌려
더러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아무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겠죠.”

서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 ‘우연한 심장마비’라고
쓰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감히 쓰지 못하는
어떤 단어가
이 도시 어딘가에서
이미 쓰여졌을까요.”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도 모르게
그날 밤
회의실에서 마주했던
한 얼굴을 떠올렸다.

전령의 칼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어쩌면
답은
이미 내려졌는지도 모른다.

서연은
결국
기사를 쓰기로 결정했다.

제목은
이렇게 달았다.

“출국 하루 전,
구조의 틈새를 오가던 한 남자의 죽음”

기사 말미에는
이 문장이 덧붙었다.

“우리는
이 죽음이
우연인지,
심판인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이 도시가
처음으로
자기 장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날들 속에—”

“가장 미끄러운 손 하나가
더 이상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록해 둘 가치가 있다.”


7. 전령의 장부 – 한 번 휘둘러진 칼, 그리고 남아 있는 이름들

밤.

한 시온은
낡은 벤치에 앉아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

도시의 어느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

윤상훈 이름 옆에는
새로운 줄이 적혀 있었다.

“처리 –
즉시 심정지.”

“특이사항 –
외상 없이,
증거 없이,
그러나
구조 전체가
이 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시점에
집행됨.”

그 아래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인간의 법이
닿지 못한 손 하나를
전령의 칼이 대신 잘라냈을 때—”

“이 도시는
그 사실을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가.”

시온은
잠시 펜을 멈추었다.

나는
사람들의 믿음을
대신 세워주러 온 존재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결국 끝까지
닿지 못하는 구석을
마무리하러 온 존재인가.

멀리서
누군가 웃음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부모,
야근을 마치고 걸어가는 직장인,
배달 가방을 멘 라이더.

그들은
오늘 엘리베이터에서
죽은 한 남자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는
이상한 공백 하나가 생겨 있었다.

다음 착취를 향해 뻗어 나갈
브로커의 손이
갑자기 사라진 자리.

시온은
장부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정 회장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 –
인간 단두대 위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자.”

“상태:
수사·기소·재판 가능성
급상승.”

“전령의 칼 개입 여부 –
(보류).”

그는
작게 웃었다.

“당신은
아직
인간의 칼을
더 많이 맛봐야겠지요.”

도시는
오늘도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어느 검찰청 사무실에는
새로운 기소장이
타자기로 찍히고 있었고,

어느 신문사 데스크에는
윤 서연의 기사 초안이
편집자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며,

어느 저렴한 원룸에서는
한 변호사가
피로에 절어 눈을 감으면서도
내일 법원에 낼 신청서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시온은
장부 마지막 장을 펼쳤다.

맨 위에는
새 제목이 적혔다.

“20장 –
단두대 위에 선 자와
단두대 아래에서 지켜보는 자들.”

그 아래
빈 칸들 사이로
이름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 정○○,

  • 이름이 밝혀질 또 다른 공범들,

  • 증언대에 설 피해자들,

  • 판결문을 쓰는 판사,

  •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시민들,

  • 그리고
    그 모든 장면 구석에서
    조용히 펜을 들고 있는 전령.


이 도시 법정에서는
인간이 만든 칼날이
한 번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칼날이
어디까지 정확히 떨어지는지 본 뒤—

나는
내 칼을
마지막으로
어디에 쓸지
정하게 되겠지.

가로등 불빛에
장부가 반짝였다.

바람이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전령은
책을 덮었다.

도시는
아직
잠들지 않았고,

심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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