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18장 – 성벽 위에 올라선 사람들

18장 – 성벽 위에 올라선 사람들

1. 공청회 공고 – 장부가 낭독되는 날

○○시청 홈페이지 메인 화면.

평소 같으면
축제 홍보 배너와
관광 안내 이미지들이 차지하고 있을 자리 한켠에,
낯선 공지가 하나 걸려 있었다.

“도시 구조와 인권 실태에 관한
시민 공청회 개최 안내”

  • 주관: ○○시의회, ○○시 인권위원회

  • 일시: ○월 ○일 오후 2시

  • 장소: 시의회 대회의실

  • 안건:

    • 재개발·의료·돌봄·군 인권 관련
      시민·피해자 증언 청취

    • 관련 기업·기관·전문가 의견 청취

맨 아래,
작게 적힌 문장.

“누구든
자기 이름으로
이 도시에 대해 말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할 수 있습니다.”

윤 서연은
이 공지를
처음 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정말로
이 도시에
이런 문장이
공식 문서로 적히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는
곧이어 도착한 메일을 열어 보았다.

보낸 사람:
○○시 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제목:

“[참관 및 발언 요청]
〈도시의 장부〉 취재진 및 관련 변호인께”

내용은 간단했다.

“귀하의 보도가
이 공청회 개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청회 패널로
기자님과
한 지우 변호사님을
정식으로 초청합니다.”

“또한
기사에 등장했던
피해자·제보자 분들께서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자기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

발언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서연은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제
우리가 쓴 문장들이
공문서 안의 문장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취재가
판결문과 법령,
공청회 기록의 언어로
옮겨가고 있다.

그녀는
한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시에서
우리를 초청했어요.”

“성벽 위에
우리를 올리겠다고 합니다.”

한 지우가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웃었다.

“드디어
장부를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갈 시간이군요.”


2. 이름을 고르는 밤 – 성벽 위에 올릴 사람들

공청회 며칠 전 밤.

작은 회의실 하나에
몇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 장민수

  • 군 가혹행위를 증언했던 박진우

  • 재개발 현장 반장,
    네팔 노동자의 죽음을 제보했던 남자

  • 야간 요양원 간병인 이은희

  • 그리고
    이들을 대리하는 한 지우와
    기록하는 윤 서연.

테이블 한 가운데에는
A4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각자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힌 종이.

“공청회 발언 신청서.”

장민수가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 종이에
제 이름을 적으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이제
제 아이 이야기는
‘기사’나 ‘소송 서류’뿐만 아니라,
시 기록에도 남겠죠.

한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의회 회의록,
인권위 자료,
공문서.”

“당신 아이의 이름은
더 이상
병원 장부 한 구석의 숫자로만 남지 않을 겁니다.”

박진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군복 입고 가도 됩니까.”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예비군 훈련 때
입는 거라도.”

“제가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지금도
저 생활관 어딘가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전령을 자칭하며
후임을 밟고 있다’는 말을
그냥
‘전역자의 넋두리’처럼
들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uniform을 보고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지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법적으로
약간의 논란은 있겠지만,
예비군 훈련용 복장은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보다
당신의 말이
기록에 남는다는 점이
더 중요하죠.”

이은희는
신청서를 쥐고 있었다.

종이 위에는
“소속: ○○요양원 야간 간병인(비정규직)”
이라는 칸이 비어 있었다.

“…여기에
‘○○요양원’ 이름을
적어도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 적는 순간
제 일터는
제 얼굴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마
저는
오래 버티지 못하겠죠.”

한 지우가
숨을 들이켰다.

“그럼
‘익명’으로 가셔도 됩니다.”

“이 도시는
아직
내부 고발자에게
충분히 안전한 도시가 아닙니다.”

이은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녀는
볼펜을 들었다.

“한 번쯤은
제 이름으로 말해 보고 싶어요.

“밤마다
30명을 돌보면서
‘오늘 밤은 아무도 죽지 않게 해 달라’고
속으로 빌던 사람으로서.”

종이에
글씨가 새겨졌다.

“이은희,
○○요양원 야간 간병인(계약직).”

재개발 현장 반장은
더듬거리는 글씨로
네팔 청년의 이름을 적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 신청서 이름란에
조금 망설이다가
천천히 썼다.

“○○건설 하청 현장 반장,
○○○.”

“그리고
제가 말하는 동안—”

그가 덧붙였다.

“통역사가
그 사람 가족이 보낸
음성 메시지 일부를
틀어도 될까요.”

“그 사람 동생이
형 사진을 보면서
네팔말로
뭐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 뜻을
다 이해하진 못해도,
그 울음 소리만큼은
알겠더라고요.”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네.”

“그 울음도
이 도시 기록 한가운데에
같이 남깁시다.”

그들은
서로의 종이를
한 번씩 돌아가며 읽었다.

각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공적인 성벽 위에 적힐 순간
앞두고 있는 밤이었다.


3. 마지막 거래 – “지금이라도 합의하면…”

공청회 이틀 전.

정 회장의 집무실에서는
또 다른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회의실 문이
반쯤 닫혀 있었고,
참석자 숫자도
훨씬 적었다.

정 회장,
법무팀장,
그리고
외부 로펌 파트너 변호사 한 명.

법무팀장이
두꺼운 서류 봉투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공청회에
증인으로 나올 예정인 사람들 중
일부에 대해
‘사적 합의’ 가능성을
검토해 봤습니다.”

“병원 피해자,
재개발 구역 주민,
군 가혹행위 피해자 가족 등.”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은.”

법무팀장이 말했다.

“정식 소송 이전에
별도 조정·합의금을 제시하고,
공청회 증언을
‘비공개 진술서 제출’로
대체하는 안입니다.”

“공식 기록에서
회장님 성함이
직접 거론되는 빈도를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대신
합의서에는
‘추가 민형사상 책임 추궁 포기’ 조항을
넣을 수 있습니다.”

정 회장은
잠시 침묵했다.

“결국
돈으로
성벽 위에 올라올 사람들을
밑으로 끌어내리겠다는 거군.”

외부 변호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법적으로
합의는
어느 쪽에도
허용된 선택지입니다.”

“사회적으로도
‘피해자 구제’라는 명분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고요.”

“공청회가
너무 일방적인
‘마녀사냥’ 분위기로 흘러가는 걸
막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정 회장은
서류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겉면에는
“장○○(병원 사망 사건 유가족)”
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사람에게
돈을 건넨다고 해서
그의 분노가
사라질까.

아니,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 분노의 소멸인가,

아니면
내 이름이
기록에서 빠지는 것인가.

그는
서류 봉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시도는 해보십시오.”

그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는
잊지 마세요.”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우리가
돈을 내밀 때—”

“그 돈이
그 사람의 입을 막는 돈이 아니라,
우리 장부의 죄를 인정하는 영수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법무팀장은
그 문장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장님.”

“최대한
조용히
최대한 많이
막아 보겠습니다.”


4. 돈의 유혹과 거절 – 성벽 아래서 들리는 속삭임

다음 날.

장민수는
국밥집 한 구석에서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정장 차림,
손목시계가 번쩍이는 남자.

서류 봉투 하나가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장 선생님,
저희도
선생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
누가
감히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래서
회사 측에서
정식 소송과 별개로
선생님 가족을 위한
특별 지원

준비했습니다.”

서류 봉투가
살짝 밀려 왔다.

“이 안에는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장학금,
심리치료 지원,
기타 다양한 혜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공청회에 나가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으셔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상처를
진심으로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장민수는
봉투를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제 아이 이름이
적혀 있습니까.”

남자가
당황했다.

“…예?”

“서류 안에요.”

장민수가
한 글자씩 말했다.

“제 아이 이름이
적혀 있습니까.”

남자는
마지못해
봉투를 열어
몇 장의 문서를 펼쳐 보였다.

“여기
‘피해자 유가족’이라고—”

“그게 아니라.”

장민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죽어 있지 않았다.

“이름이요.”

“세 글자.”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가 사랑해서 지어준
그 이름이
어디에도 없습니까.”

침묵.

국밥집 사장은
이상한 눈빛으로
둘을 힐끔거렸지만,
다가오지는 못했다.

남자가
겨우 말을 꺼냈다.

“…서류 형식상
구체 이름 대신
‘피해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장민수가
웃었다.

그 웃음은
기쁘지도,
광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어
새어 나온 웃음.

“그럼
이 돈은
제 아이가 아니라—”

“ ‘피해자’라는
단어에게 주는 돈이군요.”

“제 아이 이름이 아니라,
당신들 장부 안의
리스크 항목에게 주는 돈.”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장 선생님,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충분히 생각해 봤습니다.”

장민수가
봉투를 밀어 돌려주었다.

“제가
공청회에서 말하고 싶은 건
‘돈을 달라’가 아닙니다.”

“제 아이 이름이
당신들 장부와
이 도시 기록에
어떻게 적힐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봉투를 받으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언젠가
제 아이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이 봉투가
같이 떠오르겠죠.”

“그건
제가
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닙니다.”

남자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슷한 시각,
다른 장소.

이은희 역시
별도의 연락을 받았다.

  • “조만간
    계약 연장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 “공청회 발언은
    신중히 생각해 보라.”

  • “우리는
    내부 문제를
    외부에서 떠들기보다
    안에서 해결하는 걸
    선호한다.”

요양원 원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은희 씨를 지켜봤잖아요.”

“성실하고,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누구보다 열심히인 거
알고 있습니다.”

“굳이
바깥 사람들 앞에서
우리 기관 욕하면서
얼굴 드러낼 필요 있어요?”

“그 에너지로
안에서
조금씩 바꾸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이은희는
고개를 숙였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다가,
겨우 말했다.

“…원장님.”

“제가
여태까지
쓴 보고서들,
기억하시죠.”

“야간 인력 부족,
사고 위험,
낙상 우려…”

원장이
애써 웃었다.

“그럼, 그럼.
다 보고 있습니다.”

“예산만 좀 나면
바로 인력 충원 할 거예요.”

이은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 ‘곧’이
몇 년째인지
아십니까.”

“그 사이에
넘어져서 다친 분들,
숨이 막혀서
조용히 떠난 분들—”

“그분들 이름,
다 기억하시나요.”

원장은
눈을 피했다.

“…현실적으로
다 기억하긴 어렵죠.”

이은희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하러 나갑니다.”

“공청회에서
그분들 이름 대신,
제 이름으로라도.”

“내가
그 밤의 구조를
알고 있었고,
그래도
같이 버티려 했다는 걸—”

“어딘가 한 곳에는
남겨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원장은
더 이상
붙잡을 말을 찾지 못했다.

성벽 아래에서
돈과 안전,
계약 연장과 불이익의 언어들이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날 밤 이후,
공청회 증인 신청 취소 메일은
한 통도 들어오지 않았다.


5. 성벽 위의 하루 – 시민 공청회가 여는 입들

공청회 당일.

○○시의회 대회의실 앞 복도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방청 신청을 하러 온 시민들,
취재진,
시의원들,
인권단체 활동가들.

복도 한쪽에는
임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도시의 장부’
당사자들이 말하는 날
입니다.”

회의실 안쪽에는
마이크와 발언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피커 테스트를 하던 기술자가
마이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나, 둘, 셋…”

“오늘
이 마이크는
사람 이름을 부르기 위해 쓰입니다.

첫 순서.

사회자가
공청회 취지를 설명한 뒤,
오늘 발언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장민수 씨,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장민수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장민수의 아이 사진이
스크린에 떠 있었다.

이제는
사망진단서의 한 줄이 아니라,
분홍색 셔츠를 입고 웃는
아이의 얼굴.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제 이름은
장민수입니다.”

“제 아이 이름은
장하늘입니다.”

그는
어제 국밥집에서
밀어 돌려보냈던
합의 봉투를 떠올렸다.

“어제
어떤 분이
저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네셨습니다.”

“그 안에는
돈과
여러 가지 지원 약속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서류 어디에도—”

그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제 아이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 ‘피해자’라는 단어만
여러 번 적혀 있었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합의를 거절한 이유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이를
도시 장부 속
‘리스크 관리 항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 나와 말을 하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아이는
영원히
병원 장부와 회사 장부 속
숫자로만 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다음 순서.

“박진우 씨,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예비군 훈련용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발언대로 걸어 나왔다.

일부 시의원들이
살짝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저는
전 일병,
박진우입니다.”

그는
생활관에서 들었던
선임의 말을 떠올렸다.

“ ‘너 전령 믿냐.’ ”

“ ‘지금 너를 밟는 나는,
이 생활관의 전령이다.’ ”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전령이 아니라,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구조
더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군복을 입고 나온 이유는—”

그가
회의실을 한 번 훑어봤다.

“이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까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말로
괴롭힘과 폭력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내무반 바닥에서
‘이 생활관의 전령’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딘가 먼 곳에서
우리를 숫자로만 보는 장부가
있다는 걸
저는 몰랐습니다.”

“오늘
그 장부를 쥔 사람들이
이 자리에 나와 있지는 않겠지만—”

그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이 말만큼은
기록에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밟는 동안,
누군가는
우리를 숫자로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역사가 준비된 자리에는,
네팔 청년의 동생이
영상 통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현장 반장이
발언대로 나와
서툰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는
○○건설
하청 현장 반장,
**○○○**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현장에서
네팔에서 온 청년 하나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스크린에는
그의 뒷모습 사진 하나가 떠 있었다.
얼굴이 아닌,
안전모와 작업복만.

“우리는
그를
‘네팔 애’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이크를 꽉 쥐었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천천히,
한 글자씩
그 이름을 발음했다.

낯선 모음과 자음이
회의실 공기 속에
새겨졌다.

통역사가
네팔어 음성 메시지를 틀었다.

– (형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는 소리)
– “집에 언제 오냐고 했던 거
기억나?”
– “우리는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어…”

말의 뜻을
모두 이해한 사람은
적었지만,
그 울음의 의미를
못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6. 간병인의 고백 – 구조의 최하단에서 올려다본 성벽

마지막 순서 중 하나로
이은희가
발언대로 걸어 나왔다.

등 뒤 스크린에는
복도, 침대,
야간 조명 아래 누워 있는
노인들의 실루엣이
사진으로 떠 있었다.

“제 이름은
이은희입니다.”

“○○요양원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간병인입니다.”

그녀는
메모지를 펼쳤다가
곧 접어 넣었다.

이건
원고처럼 읽으면 안 된다.

매일 밤
내 발이 기억하는 이야기다.

“야간 근무 때
저는
보통
30명의 어르신을 맡습니다.”

“저와
다른 동료 한 명,
둘이서요.”

회의실 뒤편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어떤 날은
2층과 3층을 합쳐
60명을 둘이 맡을 때도 있습니다.”

“누가
침대에서 떨어질지,
누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질지,
누가
새벽에 숨이 막힐지—”

“저는
밤새
그 생각을 합니다.”

“야간 근무자 인원을
늘려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습니다.”

“돌아온 답은

같았습니다.”

“ ‘예산이 없다.’ ”

“ ‘인력을 구하기 힘들다.’ ”

“하지만
그 예산과 인력을
어디다가 쓰고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최근 기사들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요양원을 포함한 여러 시설이
같은 펀드,
같은 법인 아래 묶여 있다는 걸.”

“그 위에
누가 있는지도.”

한 지우와 서연이
뒤쪽 참관석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은희가 말했다.

“오늘
제가 여기 나와서
말하는 이유는—”

“회사나 기관을
전부 악마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밤마다
넘어지고,
숨이 막히고,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누군가
이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자기 이름으로 말해 줬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왔습니다.”

“제 이름으로.”

회의실 안 공기는
더 이상
단순한 공기가 아니었다.

각자의 말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문서로 남고,
영상으로 저장되는 순간.

성벽 위에
처음으로
이름들이
제대로 적히는 시간.


7. 내부 장부의 폭로 – 마이크를 통해 읽힌 숫자들

공청회 후반부.

시의회 측은
“관련 기관과 기업의 입장 발표” 시간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정 그룹 측에서는
법무 담당 부사장이
나와 있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오늘
여러 분들께서
들려주신
아픈 이야기들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당사는
도시 인프라와 복지,
의료·돌봄의 발전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으며—”

“일부 현장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그 부분은
겸허히 돌아볼 것입니다.”

그의 말은
매끄럽고,
낯익었다.

언제나
위기 상황에서 들을 수 있는
“책임 있는 기업”의 언어.

그러나
그가
“구조적 악의 중심”이라는 표현을
부드럽게 부인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장 뒷편에서
손 하나가 번쩍 들어올라왔다.

사회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정된 발언 순서는
모두 끝난 상태입니다만…”

그때
한 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사회자님.”

그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의 취지는—”

“도시 구조와 인권에 대해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 그룹 내부에서
오랜 시간
윤리 신고 제도를 담당해 온
한 직원이—”

그는
USB 하나를 들어 보였다.

“본인의 위험을 감수하고
장부 일부를
이 자리로 보냈습니다.”

회의실이
순간 술렁였다.

정 그룹 법무 부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변호사님,
이건
절차적으로—”

사회자가
말을 막았다.

“오늘 공청회는
재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자기 구조를
직시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자료를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한 지우가
스크린에
자료를 띄웠다.

  • 요양원·병원 인력 구조표

  • 야간 근무자 1인당 환자 수

  • 내부 윤리 신고 요약본

  • “인력 충원 필요”라는 빨간 주석들.

그리고
주석 옆에 적힌
짧은 문장들.

– “예산 상황 상
당분간 현 인력 유지.”
– “리스크 지수 상승 감수 가능.”
– “요양원 수익성 고려 시
인력 충원 불가.”

한 장에는
이런 표제어가 적혀 있었다.

“돌봄 부문 리스크 관리 지침 초안”

  • “야간 사망·사고 발생 건수 –
    연간 ○건 내외 유지 시
    수용 가능 범위.”

  • “언론 노출 발생 시 –
    신속한 유가족 위로 및 합의 진행.”

  • “정치·언론 네트워크 활용
    이슈 확산 최소화.”

회의실이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정 그룹 법무 부사장이
급히 말했다.

“저 자료는
내부 검토용 초안에 불과하며—”

한 지우가
끊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들에는
숫자와 사람의 자리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한 줄을 가리켰다.

“ ‘야간 사망·사고 발생 건수 –
연간 ○건 내외 유지 시
수용 가능 범위.’ ”

“이 문장은
누군가의 부모와 조부모의 죽음을
리스크 허용치로 계산한 문장
입니다.”

시의원 한 명이
숨을 들이켰다.

“이 문장이
도시 장부 한가운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도시 시민들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회자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정 그룹 측에서는
이 자료들의 출처와 사실 관계에 대해
추후
공식적인 설명을 제출해 주십시오.”

정 그룹 법무 부사장은
알겠다고 했지만,
이미
공청회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회의장 뒤편에서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장부가
읊어지고 있네…”

“전령이 아니라,
숫자와 이름이…”


8. 성벽 위에서 – 도시가 처음으로 올려다본 얼굴

공청회가 끝나갈 무렵.

사회자는
오늘 나온 이야기를
짧게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온 말들은—”

“법적 판단이나
최종 결론이 아니라,
이 도시가 자기 구조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한 기록
입니다.”

“이 기록은
시의회 회의록,
인권위 자료로 보존되고,
향후
수사와 입법,
행정 결정의 중요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시의원 중 한 명이
발언을 요청했다.

그는
당초
정 그룹과 가까운 인물로 알려져 있던,
자유주의 경제를 강조하던 정치인이었다.

“저는
그동안
여러 자리에서
‘자본의 역할’과
‘도시 경쟁력’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지금도
자본이 이 도시 인프라의 중요한 축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순간,
정 그룹 측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에서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구조의 최하단에서 들려온 목소리들
들었습니다.”

“병원 복도,
군 생활관,
재개발 현장,
요양원 야간 근무실에서
올려다본
이 도시의 얼굴을요.”

“이 목소리들을
‘감정적’이라고만 치부하고
넘기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우리는
이 도시의 성벽을
더 이상
지킬 자격이 없습니다.”

정 그룹 법무 부사장은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성벽”이라는 단어가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도시 성벽의
돌 하나 정도겠지.

하지만
오늘 발언들을 듣고 나니—

어쩌면
이 성벽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 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서는
즉석 토론이 이어졌다.

– “이제
특별 수사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야?”
– “정○○이
직접 조사 대상 올라갈까?”
– “적어도
계열병원·요양원 인력 기준은
전면 손보고 들어가야지.”

누군가는
이미
온라인 청원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정○○ 및 관련 기업
구조적 인권 침해
특별 수사 및 청문회 요구.”

도시는
성벽 위로 올라간 사람들의 말을
당장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누가”와 “어디”를 향해
요구해야 하는지
처음으로
다 같이 알게 되었다는 것.


9. 옥상 위의 전령 – 칼날을 꺼낼 시간이 가까워지는 밤

공청회가 끝난 밤.

시청 건물 옥상 난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람이
그의 코트를 휘날렸다.

한 시온.

그는
대회의실이 있던 층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아직도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회기록을 정리하는 직원들,
쓰러질 듯 피곤한 인권위 조사관들,
오늘 나온 발언 일부를 정리하는 기자들.

시온은
장부를 펼쳤다.

새로운 페이지 맨 위에
굵게 적힌 제목.

“성벽 위에 올라선 사람들.”

그 아래에
이름들이
줄줄이 써 내려가고 있었다.

“장민수 –
합의를 거절하고
아이 이름을
도시 기록에 올린 자.”

“박진우 –
군복을 입고
생활관 바닥에서 보았던 구조를
성벽 위에서 말한 자.”

“○○○(네팔 출신, 27세) –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제대로 발음된 자.”

“이은희 –
야간 요양원에서 본 구조를
자기 이름으로 증언한 자.”

“최수진 –
내부 장부를 금고 밖으로 내보낸 자.”

“기타 다수 –
오늘
성벽 아래에서
성벽 위를 올려다본 자들.”

그는
붉은 펜을 들었다.

“이 날 이후—”

“도시는
더 이상
‘전령이 누구냐’가 아니라,
**‘장부를 쥔 자가 누구냐’**를
묻게 됨.”

“심판의 칼날은
얼굴 없는 괴담이 아니라,
이름이 적힌 구조를 향해
조금씩
기울기 시작함.”

시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빌었지.

‘도시의 전령이여,
악인을 없애 달라.’

하지만
오늘
그들은
내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장부를 부르고,
구조를 불렀다.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내 칼날을
조금 늦게 꺼내도
괜찮겠군요.”

그러나
장부 다른 페이지에는
이미
한 이름 위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정○○ –
도시 구조 설계자,
회계장.”

“상태:
인간 장부와 분노가
임계점에 가까워지고 있음.”

“다음 단계 –
광범위한 수사,
자산 추적,
공범 구조 드러날 것.”

시온은
붉은 펜으로
작게 덧붙였다.

“인간의 단두대 –
거의 완성.”

“전령의 칼날 –

마지막 확인만 남을 예정.”


10. 마지막 장면 – 성벽 안에서 홀로 앉은 남자

그 시각.

정 회장은
집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모든 회의가 끝나고,
임원들도 돌아갔다.

책상 위에는
오늘 공청회 관련
속보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 “도시 공청회에서 드러난
    요양원 야간 리스크 관리 문건 파문”

  • “재개발 현장, 이주 노동자 죽음
    ‘리스크 허용치’로 본 내부 자료 논란”

  • “특별 수사 요구 청원,
    하루 만에 ○만 명 돌파”

TV 화면 하단에는
실시간 자막이 흘러가고 있었다.

“검찰,
정○○ 일가
전방위 계좌 추적 검토.”

“여당 내부에서도
‘특별조사위’ 구성 주장 나와.”

“인권위,
정 그룹 계열 요양원·병원
전수 조사 착수.”

정 회장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시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단두대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 “도시의 입들이
조금씩
나무판자를 모으고,
도르래를 만들고,
줄을 매고—”

– “그렇게
먼저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것.”

그때는
그 말이
추상적인 비유처럼 들렸다.

지금은
너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청문회,
공청회,
시민 청원,
인권위 조사,
검찰 수사…

이 모든 게
나무판자와 도르래,
줄과 기둥이구나.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자기 이름이 적힌 서류를 바라봤다.

“참고인 조사 통지서.”

유리창 밖에서는
도시 야경이
아직도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그 불빛 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름이
욕설, 분노,
그리고
새로운 언어와 함께
이야기되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평생
숫자 뒤에 숨어 살았다.

이제
숫자 앞에
얼굴이 나왔다.

그때,
책상 한 켠에 놓인
모니터 화면이
잠시 깜빡였다.

하얀 화면 위에
짧은 글씨가 떠올랐다.

“단두대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잠시 후
글씨는 사라지고,
다시 일상적인
그래프와 표가 떠올랐다.

정 회장은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래서
이제
누가 줄을 잡고 있는지
보러 가야겠지.”

그의 웃음은
승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의 웃음.

몸을 일으키며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그 단두대 위에
올라가게 되겠지.

다만
그 전에—

내가 쌓아 올린 이 성벽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한 번 보고 싶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한
장부를 쥔 자의 호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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