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13장 – 마지막 카드, 가장 깊은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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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 마지막 카드, 가장 깊은 상처
1. 기소장 낭독, 이름이 법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날
지방검찰청 기자실.
벽에는 오래된 범죄 수배 전단이 누렇게 바래 있었고,
천장 형광등은 아침인데도 이미 피곤해 보였다.
앞쪽 브리핑 석에
검찰 관계자가 서 있었다.
그 뒤 스크린에는
굵은 글씨 몇 줄이 떠 있었다.
“피고인: 국회의원 노 영학 외 ○인”
기자들의 펜 끝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사는
기소 요지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첫째,
특정 시행사 및 건설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
“둘째,
재개발 구역 지정 및 인허가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와 공모하여
직무를 유기하고
공공에 손해를 끼친
배임 혐의.”
“셋째,
이른바 ‘도시의 전령’ 관련
여론 조작 회의를 주도하고,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 한 혐의.”
스크린에
USB, 회의 사진, 파쇄 문서 복원 이미지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검사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넷째,
위와 같은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 측 보좌진과 공모하여
자신을 겨냥한
‘가짜 전령 공격’ 연출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수사를 정치적 탄압으로
왜곡하려 한 혐의.”
기자실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한 번 더 무거워졌다.
“가짜 전령 공격”이라는 단어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익명의 제보,
온라인 루머로 떠돌고 있었지만,
그것이
검찰의 입에서
정식 용어로 나오는 순간,
그 말은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갖게 되었다.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검사님,
피고인 노 영학 의원이
**‘괴담에 희생된 정치인’**이라고
주장해 온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검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피의자의 정치적 입장 표명에 대해서
검찰이 직접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바로는—”
그의 눈빛이
조금 단단해졌다.
“피고인이
‘괴담에 희생되었다’기보다,
괴담을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는 정황이
더 많이 드러났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법정에서
공방을 통해 확인될 것입니다.”
뒤쪽,
윤 서연은
기자들 사이에 섞여 서 있었다.
손에는
늘 그렇듯
검정색 노트와 펜.
검사의 말 하나하나가
그녀의 노트 위에서
다른 언어로
재번역되고 있었다.
“괴담을 도구로 활용.”
“가짜 전령 공격.”
“법정에서 확인될 것.”
그녀는
머릿속으로
조용히 제목을 하나 떠올렸다.
도시의 장부 ⑧ –
괴담을 휘두르다,
괴담에 베인 자
브리핑이 끝나자
플래시와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그러나
윤 서연은
단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녀가 던질 질문은
검찰에게가 아니라,
이 도시 전체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도시의 장부는
어디까지 적어낼 수 있을까.
노 영학이라는 이름 하나만
붉게 칠하고
덮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뒤에 있던
다른 이름들까지
마주 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편집국의 토론, ‘악한 한 사람’과 ‘악한 구조’ 사이
같은 날 오후,
신문사 편집국 회의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편집국의 소음이
바다처럼 들려왔다.
회의실 안,
편집장, 부장, 법조팀장,
그리고 윤 서연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편집장이 입을 열었다.
“자,
내일자 1면,
노 영학 기소가
메인인 건
이견 없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법조팀장이 말했다.
“검찰 브리핑 정리하고,
혐의 구조 한 번에 보이게
도표 구성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 회장,
컨설팅 회사,
의원실 구조까지
한 장에 그려 넣고요.”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가 말했다.
“문제는
서연이 연재.”
“〈도시의 장부〉를
내일자에서
어느 위치에 배치할지,
어떤 톤으로 가져갈지가
관건이야.”
법조팀장이
서류를 뒤적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도시의 전령’ 이름을
기사에서
덜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검찰이
정치자금·배임·연출 혐의까지
다 묶어서
기소했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전령 미화’라고
연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편집장이
윤 서연을 보았다.
“본인 생각은?”
서연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도시의 전령이라는 말,
이제
기사에서
굳이
앞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도시의 장부’라는 말은
더 크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편집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노 의원 하나만
악당으로 만들면
쉽습니다.”
서연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 공청회,
피해자들,
군대,
병원,
재개발,
요양원,
학교…”
“전령이 있든 없든,
이 도시가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장부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이제
노 영학이라는 이름을
빨간 줄로 긋는 건
시작일 뿐입니다.”
“그 뒤에
누가 있었는지,
누가
무엇을 알고도
모른 척 했는지,
누가
숫자로만 사람을 봤는지—”
“그 장부들을
끝까지 쓰고 싶습니다.”
법조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여기저기서
또 전화 많이 오겠네요.”
“검찰에서
‘언론이 수사 가이드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당에서는
‘정치 공세’라고 할 수 있고,
일부 피해자들 중에서도
‘또 이용 당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들 나올 겁니다.”
서연이
조용히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는
끝까지 써 보는 역할을
맡아야겠죠.”
편집장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잠시 바라봤다.
“좋아.”
그가 말했다.
“그럼
내일 1면은
법조팀 기사로 가고,
3면 전면을
‘도시의 장부 ⑧’로 쓰자.”
“제목은
네가 정하고.”
“다만—”
그는
눈빛을 굳혔다.
“전령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름을
최대한 많이 적어라.”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 도시가
더 이상
‘괴담’이라는 단어 뒤에
숨지 못하게.”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이번 편의 부제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노트에
한 줄이 적혔다.
‘괴담 뒤에 숨어 있던,
구체적인 얼굴들’
3. 비밀 서랍, 성벽 안쪽의 또 다른 장부
도시 외곽,
오래전부터 쓰이던
낡은 오피스텔 건물.
이곳 한 층의 한 호실은
공식 등록된 어떤 사무실 목록에도
올라 있지 않았다.
문 안에는
책상 하나,
의자 둘,
그리고
작은 금고 하나.
노 영학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금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철컥.
금고 문이 열리자,
안에는
종이 서류뭉치 몇 개와
작은 외장하드 두 개,
그리고
USB 한 개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외장하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레이블에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성벽_내부_장부_A”
다른 하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벽_내부_장부_B(비상)”
그는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도
이 이름을 붙일 때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었다.
성벽.
나는
이 성벽의
중요한 돌 하나라고
믿어왔지.
그러니
성벽 내부의 균열과 얼룩을
기록해 두는 건,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는
작은 노트북에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화면에
폴더 목록이 떴다.
“/정치자금_비공개기록/”
“/재개발_로비/”
“/인허가_전화통화녹취_발췌/”
“/당내_비리_메모/”
“/정 회장_각서_스캔본/”
“/언론사_광고_거래_내역/”
노 영학은
마우스를 움직여
랜덤하게 파일 하나를 열었다.
“2018-10-07_회의록_발췌”
–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겁니다, 의원님.”
– “이번에만
서로 눈감아 주면,
다음엔
저희가 도와드리죠.”
– “개인적으로는
아주 이해합니다만,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일로 해야겠죠. 하하.”
문장 하나하나가
지독하게도 평범했다.
어디든 있을 것 같은 말들.
그래서 더
지독했다.
이 장부를
통째로 풀어버리면—
노 영학은
생각했다.
성벽 바깥으로
나만 떨어지지 않는다.
다 같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대표,
원내대표,
정 회장,
언론사 간부들,
검찰 고위직 몇 명…
누가
누구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아무도 말 못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입술을 핥았다.
“…그래.”
그가 중얼거렸다.
“마지막 카드는
칼이 아니라,
장부다.”
“그들이
날 성벽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면—”
“나는
성벽 전체를
폭로의 장부 위에 올려놓겠다.”
그는
폴더 하나를 열었다.
“/배포용_정리본/”
이미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
정리해 놓은 파일들이 보였다.
특정 언론사,
특정 기자 이름이
파일 메모에 적혀 있었다.
“A신문_사설위원용_요약본”
“B방송_탐사프로그램_패키지”
“익명업로드_준비_자료”
노 영학은
잠시 생각하다가
새 폴더를 하나 더 만들었다.
“/마지막_카드/”
그는
거기에
가장 치명적인 일부 파일들만
복사했다.
-
정 회장과의 사적 각서,
-
당 지도부와의 비공개 회의 메모,
-
고위 검찰 간부와의 식사 자리 녹취 일부…
이 정도면
적어도
‘나만 악인’이라는
장부는
막을 수 있다.
다 같이
악인이 되거나,
아니면
지금까지의 심판이
모두
무의미해지거나.
그는
외장하드를 뽑아
작은 USB로 복사했다.
USB 라벨에는
짧게 적었다.
“벽_안쪽의_장부”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떨렸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정 회장”
노 영학은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그냥 꺼버렸다.
“이제
당신과 나의 장부는
따로 쓰일 겁니다, 회장님.”
그가 말했다.
“나를
버리기로 한 순간부터,
당신도
이 카드의
일부가 됐다는 걸
이해해야지.”
그는
USB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 장부를
어디에 어떻게 풀어놓느냐만
남았다.
4. 한 도시의 구석, 조용히 죽어가던 방 하나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언덕 위 요양원.
겉으로 보기에는
정갈했다.
정원에는 작은 분수와
색색의 꽃들이 심어져 있었고,
입구에는
“어르신을 내 부모처럼”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복도 안 공기는
달랐다.
소독약 냄새와
묵은 침구 냄새,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무관심의 냄새.
저녁 약 배급 시간이 끝난 뒤,
간호조무사 둘이
휴게실에서 소곤거렸다.
“오늘도
305호 할머니
밥 거의 못 드셨어요.”
한 명이 말했다.
“그 나이에
편마비 오셨으면
당연한 거지.”
다른 이가 대충 대답했다.
“기록에만
‘식사 50% 이상 섭취’라고 적어.”
“보호자들이
자꾸 묻잖아.”
첫 번째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이렇게 써도 되나.”
“나중에
문제 되면…”
다른 이가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
“원장님이
다 알아서 해.”
“여기
어차피
‘요양등급’ 맞춰서
돈 들어오는 곳이야.”
“종이만 깨끗하게 쓰면
아무도
안 뒤져봐.”
휴게실 문 밖
복도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조용한 발걸음.
한 시온.
그는
휴게실 문틈 사이로
그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곳의 장부는
언제나
숫자로 시작한다.
1등급,
2등급,
투약 횟수,
식사량,
체중…
이름보다는
숫자가 먼저 쓰이는 장부.
시온은
복도를 따라
305호 병실 앞에 섰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침대 위,
몸의 절반이 굳어버린 할머니 한 분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눈은 떠 있었지만,
초점은 흐릿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어떤 감정이
분명히 있었다.
살고 싶다.
이대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더라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
시온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는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는
차트를 내려다봤다.
“305호 – ○○○(83세)
치매 3기, 편마비,
섭식 곤란(기록상 완만한 호전)”
‘완만한 호전’이라는 글자가
눈에 걸렸다.
바로 아래,
오늘자 기록.
“조식 60% 섭취,
중식 50%,
석식 70%”
그러나
쓰레기통 안에는
거의 untouched된 죽그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온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장부 위에
거짓 숫자를 쓰는 자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들은
사람의 남은 시간을
숫자로 빼앗는 자들이다.”
휴게실 쪽에서
다시 말소리가 났다.
“305호,
이번 달까지만 버티면 좋겠다.”
간호조무사 한 명의 목소리.
“왜?”
“보호자랑
계약 기간 끝나.”
“새로운 보호자 들어오면
요금 더 잘 낼 사람으로 받자고
원장님이 그러시잖아.”
짧은 웃음.
“그럼
어르신은요.”
“에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그 순간,
복도 끝 비상벨이
갑자기 울렸다.
“삐—삐—삐—”
간호조무사 둘이
놀라 뛰어나왔다.
“뭐야?
어디야?”
벽 모서리 쪽
소화전 함 안에서
미세한 연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스파크?
누전인가?”
한 명이 다가가
급하게 소화전을 열었다.
그러나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원장실 쪽에서
더 큰 소리가 났다.
“원장님!
여기 불꽃 튀어요!”
소화전 내부 배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녹아 있었다.
허술하게 감아둔 테이프는
달궈진 금속과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스프링클러가
갑자기 작동했다.
천장에서
갑자기 물이 쏟아졌다.
문서함,
캐비닛,
원장 책상 위
서류더미들이
한꺼번에 젖어 들었다.
원장실에서
비명이 터졌다.
“서류!
서류부터!”
원장은
허겁지겁 서류들을 그러모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먼저 집어든 서류철은
의도치 않게
어떤 것을 드러냈다.
물에 젖어
겉표지 색이 변한 파일.
“요양 급여 청구 내역(수정본)”
바닥으로 떨어진
다른 서류들.
“식사량 및 투약량 허위 기록 의심 사례.”
“시설 내 사망자 통계(비공식).”
“보호자 민원 처리 방향(내부 참고용).”
원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걸
왜 여기다 놔둔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복도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119에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관할 구청 복지과.
“예,
○○요양원입니까?”
“방금
화재 오인 신고 들어왔는데요,
겸사겸사
현장 점검 좀 해야겠습니다.”
“지난번
민원 건도 있고요.”
그 날 밤,
요양원은
“작은 감전 사고”로
뉴스 한 귀퉁이에
잠깐 등장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조용한 뉴스가
다른 서류 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요양원 –
요양급여 부정 청구 및 관리 소홀 의혹,
관할 기관 합동 조사 착수 예정.”
할머니는
305호 침대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던 물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처음으로
오랜만에
다른 감정 하나가
눈에 비쳤다.
뭔가가
달라지고 있다.
비록
내가 다 보지 못한다 해도,
누군가가
여기까지
와 준 것 같다.
복도 끝,
비상구 쪽에서
한 시온이
조용히 장부를 펼쳤다.
“○○요양원 –
장기 방치 및 허위 기록,
구조적 학대.”
그 옆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주요 책임자 –
원장 ○○○,
향후
‘사고’ 여부 검토 중.”
그는
펜끝을 잠시 멈췄다가
원장 이름 옆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오늘은
제도가
먼저 움직이게 두자.”
그가 중얼거렸다.
“이 장부는
인간들이
얼마나 제대로 적을 수 있는지
조금 더 지켜보겠다.”
5. 마지막 카드의 방향, 그리고 손을 베는 각도
그날 늦은 밤,
한 카페 2층.
영업시간은 끝났지만,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노 영학은
창가 자리에서
커피잔을 앞에 두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 됐을 때,
한 남자가 올라왔다.
검은 코트,
어딘가 익숙한 얼굴.
예전에
그에게 호의적인 칼럼을 쓰고,
야당 인사들을 매섭게 공격하던
유명 시사 칼럼니스트였다.
“의원님.”
그가 인사했다.
“이 시간에
보자고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노 영학이
작게 웃었다.
“요즘은
낮에는
어디를 가든
카메라가 따라 붙어서요.”
그가 말했다.
“밤이어야
사람을
제대로 만날 수 있더군요.”
칼럼니스트가 의자에 앉았다.
“그럼
본론으로 가시죠.”
그가 말했다.
“연락 주신 내용이
꽤
묵직해 보이던데요.”
노 영학은
주머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냈다.
“이 안에는—”
그가 말했다.
“당과 정계,
재개발,
검찰,
언론,
재계 사이의
진짜 장부가 들어 있습니다.”
칼럼니스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의원님이
스스로 불을 지르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기소된 것만 해도
충분히 큰데.”
노 영학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혼자 타는 건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미
‘악인 한 명’ 프레임은
완성됐습니다.”
“나를 버림으로써
성벽은
잠시 버틸 겁니다.”
“나는
그 성벽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칼럼니스트는
USB를 내려다봤다.
“이걸
저한테 주시면—”
“제가
의원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노 영학은
조용히 웃었다.
“도움이랄 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까지
내려갈 걸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의 눈빛이
잠시 빛났다.
“내가
혼자 떨어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성벽 안에 있던
다른 얼굴들도
조금은
보여 줘야
공평하겠죠.”
칼럼니스트는
USB를 집어 들었다.
“제가
이걸 쓰면—”
그가 말했다.
“당연히
저를 포함해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함께 타겠죠.”
“의원님,
그 결과가
어디까지 갈지
정말 상상하시는 겁니까.”
노 영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늘
누군가를
심판하는 글을 써 왔으니까.”
“이번에는
자신이 서 있던 성벽까지
함께
심판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칼럼니스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의원님.”
그가 말했다.
“저는
칼을 든 사람이지,
함께
바닥까지 떨어질 사람은 아닙니다.”
“이 정도 장부면—”
그는
USB를 가볍게 흔들었다.
“검찰과
딜을 할 수도 있고,
다른 당과
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의원님이 아니라
저에게요.”
노 영학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딜?”
“네.”
칼럼니스트가 담담히 말했다.
“의원님이
이걸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이건
의원님 카드가 아니라
제가 쓸 수 있는 카드입니다.”
“의원님이
이미 정치적으로
죽어 있는 상황에서,
누가
의원님을
진지하게 상대하겠습니까.”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저는—”
그는
자기 가슴을 가볍게 쳤다.
“이 장부를 가지고
얼마든지
새로운 성벽에
올라탈 수 있습니다.”
순간,
테이블 위 공기가
싸늘해졌다.
노 영학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역시.”
그가 말했다.
“칼을 쥔 입들은
서로를
너무 잘 닮았군요.”
“나도
그랬고,
당신도
그렇고.”
칼럼니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의원님,
이 도시에서
누구나
장부 하나쯤은
가지고 삽니다.”
“문제는
언제
그 장부를 펼치느냐,
그리고
누구를 위해
펼치느냐죠.”
그는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걱정 마십시오.”
“의원님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게 두진 않을 겁니다.”
“다만
어떤 문장 위에
놓이게 될지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제 선택입니다.”
카페 문이 닫히며
작은 종이 울렸다.
노 영학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도시에서
심판을 한다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 장부를 감추는 데
더 익숙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 저 남자도 그렇다.
전령이 있다면,
그는
이런 장부들을
어떻게 쓸까.
창가 밖,
골목 건너편 건물 옥상 난간에
어렴풋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
빛이 적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분명히 느껴졌다.
노 영학은
창 너머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입니까.”
“이 도시 사람들이
전령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
난간 위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노 영학은
이상하게도
그 침묵에서
무언가를 이해한 듯했다.
나의 마지막 카드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이제
내가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장부에
달려 있다.
6. 장부의 방향이 바뀔 때 – 다른 손에 쥐어진 칼
다음 날 새벽,
신문사 메일함.
윤 서연의 업무용 메일함에
새로운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익명 메일 서비스 주소.
제목은
단 세 글자였다.
“장부입니다.”
메일을 열자
짧은 본문과
첨부파일 목록이 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쥐었던 장부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어떻게 쓰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부가
누구에게
쥐어져야 하는지입니다.”
“당신과
한 지우 변호사에게
보내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 주십시오.”
첨부파일 목록.
“성벽_내부_장부_A.zip”
“성벽_내부_장부_B.zip”
“배포용_정리본(미사용).zip”
서연은
손가락이 굳은 것처럼
마우스를 움직이지 못했다.
…설마.
그녀는
즉시
한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메일 하나 받으셨습니까.”
한 지우의 목소리가
조금 숨이 찬 듯 들려왔다.
“지금
얘기하려던 참이었어요.”
“저도
같은 제목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첨부파일 이름도
똑같아요.”
둘은
잠시 침묵했다.
서연이 먼저 말했다.
“…열어보셨나요.”
“아니요.”
한 지우가 대답했다.
“이건
절대
혼자 열면 안 됩니다.”
“검찰과의 관계,
보도의 시점,
제3자 피해 여부까지
다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사무실로 오실 수 있습니까.”
한 시간 뒤,
법률사무소 사이 회의실.
노트북 한 대와
백업용 외장하드 한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한 지우가 말했다.
“열기 전에
합의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안에
누가 들어있든—”
“우리가 이 장부를
‘복수의 도구’로 쓰지 않는다는 것.”
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보고 싶은 사람들만 보는 장부’가 아니라,
**‘사람들이 언젠가 읽을 수 있는 장부’**를
만들기 위해
이 파일을 엽니다.”
“전령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지우가
비밀번호 없는 압축파일을 풀었다.
화면에
수십 개의 폴더가 떴다.
정치자금,
재개발,
검찰,
언론,
당내 비리,
검찰-언론 회동 리스트…
각 폴더마다
수십 개의 파일이 들어 있었다.
메일 본문 마지막 줄이
서연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쓰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부가
누구에게 쥐어져야 하는지입니다.”
한 지우가
천천히 말했다.
“…이 장부는
원래
‘협박용’이었을 겁니다.”
“검찰과 딜을 하거나,
당과 거래를 하거나,
누군가를
함께 끌어내리기 위한.”
“그런데
지금은—”
그녀는
서연을 바라봤다.
“어쩌면
이 도시가
처음으로
자기 성벽 안을 들여다볼 기회일지도 모르겠어요.”
서연이
노트를 펼쳤다.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첫째,
이 장부를
법적으로 보존하고,
필요한 부분은
검찰에 제출합니다.”
“둘째,
이 안에서
피해자들의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익명화와 맥락 정리를 합니다.”
“셋째,
기사로 쓸 때
‘누가 얼마나 나쁜가’가 아니라—”
“**‘이 구조가
어떻게 악을 가능하게 했는가’**를
중심에 둡니다.”
한 지우가
미소를 지었다.
“복수 대신
구조를 겨냥한다.”
그녀가 말했다.
“좋네요.”
“그러나
동시에,
이 장부를 쥐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서게 될지도
알아야 합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장부를
칼이 아닌 펜으로 써야 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회의실 유리창 밖,
멀리
도시 불빛 사이로
어슴푸레한 그림자 하나가
자리를 옮겼다.
한 시온은
다른 옥상에서
그 건물을 내려다보며
장부를 펼쳤다.
“노 영학 –
마지막 카드 상실.”
“성벽_내부_장부 –
노 영학의 손에서
피해자와 기록자들의 손으로 이동.”
그 옆에는
짧은 문장이 적혔다.
“마지막 카드는
결국
가장 깊이
자신의 손을 벤다.”
7. 떨어지기 직전의 사람, 장부 위에 남는 한 줄
같은 시각,
노 영학의 비밀 사무실.
금고는 열려 있었고,
안은 비어 있었다.
노 영학은
금고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없어졌군.”
그가 중얼거렸다.
“장부가.”
휴대폰을 꺼내
칼럼니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갔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대신,
뉴스 알림 하나가 떴다.
“[단독] 검찰,
노 의원 측 비공개 자료 확보…
‘성벽 내부 장부’ 수사 착수하나”
노 영학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 도시에서
비밀은
오래 숨지 못하지.”
그는
창문을 열었다.
밤 공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멀리
도시 불빛들이
흔들렸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 남았나.
도망?
이미 늦었다.
자백?
너무 늦었다.
폭로?
카드가 사라졌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전령.
그들이
그렇게 부르던 존재.
만약
그런 게
정말 있다면—
그 장부에는
내 이름이
어떻게 적혀 있을까.
창밖,
다른 건물 옥상 난간에
또다시
어렴풋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서 보였다.
검은 코트,
손에 든
두꺼운 책 한 권.
노 영학은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입을 열었다.
“…거기 있습니까.”
“도시의 전령.”
실루엣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악인이었습니다.”
노 영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을
숫자로만 보았고,
괴담을
도구로 쓰려 했고,
그 대가로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손이
창틀을 잡았다.
“심판을
피하는 게 아니라,
마주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바람이
그의 말끝을
가져갔다.
맞은편 옥상 난간에서
한 시온은
장부를 펼쳤다.
“노 영학 –
자기 죄를 인지,
그러나
끝까지
완전한 참회에는 이르지 못함.”
그는
붉은 펜을 들었다.
“최종 심판 –
곧.”
다만
그는
펜을 조금 더 눌렀다.
“형식 –
아직 미정.”
“이 도시와
인간들의 장부가
끝까지
어떤 문장을 쓰는지
마지막으로 본 뒤.”
노 영학은
창문을 닫았다.
“…아직은
아니다.”
그가 말했다.
“마지막 줄은,
아직
쓰지 않겠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쓰는지
끝까지 보고 싶다.”
그 말 속에는
후회와
집착과
비겁함과
미약한 양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문장으로
그의 이름은
장부에 기록되었다.
“악인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장부가
어떻게 쓰일지에만
관심을 가진다.”
한 시온은
조용히 장부를 덮었다.
도시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고,
여전히 얼어 있었고,
여전히
누군가의 손에서
누군가의 장부가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장부를 쥔 손들 중
일부는
칼을 쥔 손이 아니라,
펜을 쥔 손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분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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