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14장 – 법정으로 향하는 행렬

14장 – 법정으로 향하는 행렬

1. 이름이 다시 불리는 방식

재판 출석 통지서는
늘 그렇듯
평범한 흰 봉투에 담겨 왔다.

특별한 문장도,
눈을 사로잡는 문양도 없었다.

다만
봉투 왼쪽 상단에 찍힌
“○○지방법원”이라는 네 글자가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 가슴을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봉투를 뜯어보며
서류를 소파 위에 펼쳤다.

“증인 출석 통지서…”

문장을 따라가다
어느 대목에서
손끝이 멈췄다.

“사건명: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그 아래
작게 들어간 설명.

“피고인: 국회의원 노 영학 외 ○인.”

아버지는
한참 동안
그 이름을 바라만 보았다.

병원 진료실 문을 부여잡고 울부짖던 날부터,
민원서류를 들고 복도를 서성이던 날부터,
그 이름은 늘
뉴스 속에서만
멀리 들려오던 소리였다.

이름이
처음으로
내 서류 속에
같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서류를 접어
조심스럽게 봉투에 다시 넣었다.

“아빠,
뭐야 그거?”

곁에서 숙제를 하던 둘째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에게 서류를 보여주지 않고 말했다.

“응…
아빠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 종이야.”

“나중에
커서 알게 될 거야.”

멀리 다른 동네,
재개발 구역에서 쫓겨났던 노인은
같은 봉투를
싸구려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서류 위
“참석 안 할 시 법적 제재 가능”이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가
피식 웃었다.

“법이란 게
우리를
불러세우기도 하는구먼.”

“살던 집에서 나가라 할 때는
한 번도
내 이름을 제대로 안 부르더니.”

할머니는
출석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달력을 꺼냈다.

날짜 위에
힘없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날은
내가 살다 살다
처음으로
법원이라는 데 가 보는 날이야.”

“그러니
다리가 아파도,
허리가 끊어져도—”

“한 번은
가야지.”

도시의 다른 곳,
군대에서 가혹행위를 견디다
제보를 했던 일병은
지금
민간 병원 병실에서
같은 봉투를 받아들고 있었다.

“증인으로
출석해 달랍니다.”

인권상담관이
그에게 설명했다.

“전령 괴담과
가짜 전령 연출 사건,
그리고
군대 내 구조적 폭력 문제까지
한 번에 묶여서
다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병은
눈을 깜빡였다.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냥
한 생활관 안에서
당한 일밖에 모르는데.”

상담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 ‘한 생활관’이
이 도시 전체 군대의 단면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겪은 걸
법정에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활관 누군가에겐
숨통 한 번 트이는 일이 될 수 있어요.”

일병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장부에
무엇을 적게 될까.

‘불쌍한 피해자’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고 싶지는 않다.

이 도시가
군대라는 이름으로
만든 지옥의 구조를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서툰 손으로
출석 여부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가겠습니다.”

짧은 한 마디가
도시 어딘가의 장부 한 귀퉁이에
새 문장으로 적혔다.


2. 검찰의 전쟁 회의, ‘정치재판’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싶어서

그 시각,
지방검찰청 9층 회의실.

창밖으로는
법원 건물이 가까이 보였다.

회색 벽과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그 건물은
멀리서 보면 고요한 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건과 이름들이
매일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대한 에스컬레이터였다.

책상 위에 놓인
빔프로젝터 화면에는
굵은 제목이 떠 있었다.

“노 영학 외 ○인
1심 공판 준비 회의”

주임검사가
레이저 포인터를 들었다.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단어는
딱 하나입니다.”

그가 말했다.

“정치재판.”

수사팀장이
팔짱을 꼈다.

“이미
저쪽에서는
‘검찰 쿠데타’라는 말 꺼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조금만
감정이 섞인 듯 보이면,
바로 프레임 씌우겠죠.”

주임검사가 화면을 넘겼다.

재개발 도표,
자금 흐름 도식,
가짜 전령 연출 사건 구조도.

“그래서
이번 공판 전략의 핵심은
**‘괴담’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그가 말했다.

“전령이 있느냐, 없느냐,
괴담을 믿느냐, 안 믿느냐—”

“이건
법정이 판단할 사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괴담을 이용해
실제 권력과 돈을 움직였는지
여부입니다.”

자료화면에는
USB 회의록 중 일부 문장이
강조되어 있었다.

– “괴담은
없앨 수 없습니다.”
– “다만
괴담이 물어뜯을 방향은
조정할 수 있죠.”

주임검사가
말을 이었다.

“이 문장은
우리가 ‘정치적 발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레이저 포인터가
다음 문장을 가리켰다.

– “의원님,
이번에는
우리 쪽으로
피해가 가지 않게만
설계하겠습니다.”

“이 문장과 함께
묶어서 보여줘야 합니다.”

주임검사가 말했다.

“여기서
‘설계’라는 단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증인 진술로
하나씩 쌓아가야 합니다.”

수사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자 증인,
재개발 피해 노인,
병원 유족,
군 가혹행위 제보자,
요양원 가족…”

“이 사람들을
‘참혹한 사연’으로만 세우면
감정 재판이 됩니다.”

“그 대신,
각자의 서류를 중심에 놓고
질문하죠.”

“사망진단서,
민원서류,
진료기록,
행정결정서,
요양 급여 청구 내역…”

주임검사가 웃었다.

“장부로
장부를 치겠다는 거군요.”

“전령의 장부가 아니라,
이 도시의 행정·사법 장부로.

그는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겼다.

“기억해 둡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운명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 결과는
이 도시가
앞으로
괴담 뒤에 숨을 수 있는지 없는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회의실 한쪽,
막 들어온 막내 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법원이
생각보다
약한 형을 선고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임검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땐
검찰의 장부에
또 하나의 문장이 적히겠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 정도까지밖에
할 수 없었다’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 문장을 다시 읽어가며
다음 장부를 쓸 겁니다.”

그의 말은
자기 변명 같기도 했고,
담담한 사실 진술 같기도 했다.


3. 성벽 안의 거래, 서로의 장부를 들이밀다

도시 중심부,
한 호텔 고층 라운지.

창밖으로
법원과 검찰청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잔 대신
생수병과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여당 실세 의원 두 명,
다른 쪽에는
정 회장 측 재계 인사,
그리고
주요 언론사 임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침묵 끝에
언론사 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 의원 건,
생각보다
길게 갈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한 번에
끝나지 않을 겁니다.”

여당 의원 A가
팔짱을 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정리해야 할 문제는
딱 두 가지입니다.”

그가 말했다.

“첫째,
어디까지 내줄 것인가.

“둘째,
누구까지 끌어넣을 것인가.

정 회장 측 인사가
조용히 웃었다.

“대표님 말씀은
결국
‘희생양의 숫자’
문제란 말씀이죠.”

“회사 쪽에서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중간 간부 몇 명,
서류상 책임자 두세 명쯤은
이미
리스트에 올려놨습니다.”

그는
폴더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
‘법정에서 내줄 수 있는 이름들’이
정리돼 있습니다.”

언론사 임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도
비슷한 리스트가 있습니다.”

“광고·협찬
깊이 들어갔던 기사들,
특정 사안을
과도하게 옹호했던 칼럼들…”

“작성에 관여했던
기자 이름,
데스크 이름쯤은
제시할 수 있겠죠.”

여당 의원 B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당 윤리위에서
중간급 인사 몇 명
추가로 징계하는 선에서
맞춰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이 사건이
‘여당 전체의 부패 구조’가 아니라,
**‘노 영학 일파의 일탈’**로
정리되게끔
도와주셔야 합니다.”

언론사 임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 마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요양원,
병원,
군대,
재개발,
학교까지
연달아 취재가 나오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구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 이름만 던져준다고
쉽게 잊어주지 않습니다.”

정 회장 측 인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러니
구조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않는 선에서
적당히 구멍을 내자는 겁니다.”

“노 의원,
중간 간부들,
일부 언론인,
여기저기
조금씩 피가 보이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피를 봤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당 의원 A가
그를 바라봤다.

“정 회장님,
정말
성벽에
구멍만 내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 회장 측 인사가
웃으며 말했다.

“성벽이라는 게
원래
구멍을 메우고
또 메우면서
버티는 겁니다.”

“완전히 새로 짓는 성벽은
혁명 때나 가능한 일이고요.”

언론사 임원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법원 건물 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장부를 들이밀며
숫자를 교환하고 있다.

‘이 사람 둘이면
저 사람 하나 지키고.’

‘이 기사 세 개면
저 광고 한 줄 유지하고.’

그런데
누군가는
이 계산 전체를
다른 장부에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한 시온의 얼굴을 떠올렸으나,
그 존재를 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다만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어떤 눈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공포만이
가슴 한 구석에
마른 비수처럼 박혀 있었다.


4. 작은 변화들, 여전히 남은 지옥들

요양원.

조사단이 다녀간 뒤,
원장은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새로 부임한 임시 관리자는
제일 먼저
식사 기록표를 뜯어냈다.

“이제부터
밥그릇은
숫자가 아니라
사진으로 찍어서

저장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얼마나 남았는지,
눈으로 보이게.”

간호조무사들은
처음에는
귀찮다는 얼굴을 했지만,

일부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거짓 숫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

‘50% 이상 섭취’라는 거짓말 대신,
‘오늘은 한 숟갈도 못 드셨다’는
사실을 쓸 수 있다.

305호 할머니의 차트에는
오랜만에
이름이 또렷하게 적혔다.

“○○○ 어르신 –
금일 식사량 매우 저조,
보호자와 상의 필요.”

군부대.

인권조사 이후,
해당 생활관은
완전히 재배치되었다.

가혹행위를 주도하던 상병은
의가사 전역 판정을 받았고,
새로 온 간부는
자습시간에
이상하게 긴 말을 했다.

“여러분,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군대는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가는 군대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생활관에서
누가 누구를
매일 죽이고 있다면—”

그는
침상들을 둘러봤다.

“그건
훈련도,
규율도,
전통도 아닙니다.”

“그냥
범죄입니다.”

일병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누군가 제대로 봐 줬으면 좋겠다.

그때의 소원이
지금
조금 다른 형태로
눈앞에 서 있었다.

병원.

노 영학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다뤄진 뒤,
문제가 되었던 병원 중 하나는
가까스로
“즉시 폐쇄”는 면했다.

그러나
병원 이사회는
뒤늦게
‘윤리위원회’를 만들었다.

회의 첫날,
간호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이 얘기를 할 수 있게 되네요.”

그녀가 말했다.

“감염관리 지침 위반,
인력 부족,
서류 조작…”

“예전에는
이런 얘기 꺼냈다간
인사고과에
바로 찍혔습니다.”

“이제라도
이 장부를
같이 쓰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옆 다른 병원에서는
아직도
“병원 이미지”를 이유로
내부 고발이 묵살되고 있었다.

재개발 구역.

일부 구간에서는
재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시청 관계자와
시공사 대표,
주민 대표가
한 자리에 앉았다.

“이제라도
주민 의견을
반영하겠습니다.”

공무원이 말했다.

“늦었지만,
라도.”

노인은
그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이 말,
처음에 했어야지.”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

그러나
한 블록 건너 다른 구역에서는
여전히
밤마다 용역 차량이 드나들고 있었다.

어느 골목 구석에서는
또 다른 가족이
이삿짐을 꾸리며
“언젠가
돌아올 수 있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한 시온은
장부의 여러 페이지를
번갈아 펼쳤다.

“요양원 –
조사 후 구조 일부 개선,
원장 직무정지.”

“○○연대 생활관 –
인권 조사 후 재배치,
가해자 전역.”

“△△병원 –
윤리위원회 신설,
일부 구조 개선 시도.”

그 옆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요양원 –
아직 조사 손길 닿지 않음.”

“타 연대 생활관 –
유사 가혹행위 의심,
제보 없음.”

“다른 병원들 –
‘우리는 아니길 바란다’며
침묵 유지.”

시온은
조용히 웃었다.

“인간들의 심판은
느리고,
구멍이 많다.”

그가 말했다.

“그래도
심판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장부는
한동안
그들의 시도를
지켜볼 것이다.”


5. 변명과 고백 사이 – 한 편의 글

노 영학의 집무실,
이젠
공식 직함을 잃어
‘의원실’이라 부르기 어려운 공간.

책상 위에는
두 종류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변호사가 가져온
공판 준비서면.

“피고인은
일부 혐의에 대해
사실 관계는 인정하나,
고의성 및 범의는 부인하며…”

다른 하나는
아직 제목도 없는
빈 종이 묶음.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원님,
첫 공판에서의 입장은
최대한
법리 중심으로 가져가는 게 좋습니다.”

“감정 섞인 발언,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재판부에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노 영학이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내가
처음으로
법정에 서는 것도 아닌데요.”

그가 말했다.

“어느 정도
어떻게 말해야
판사가 싫어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이번 사건은
전국이 보고 있는 재판입니다.”

“의원님이
한마디만
삐끗해도—”

“모든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노가

의원님 한 사람에게
쏟아질 수 있습니다.”

노 영학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성벽 안에서
모두가
나만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군요.”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면 한 구석을 가리켰다.

“여기
‘반성’ 관련 문장,
이 정도면 적당합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유감 표명,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 정도.”

“그러나
구체적인 사과나
직접적 책임 인정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노 영학이
서면을 내려다봤다.

“유감,
안타까움…”

그가 중얼거렸다.

“이 도시가
제일 많이 써먹어 온 단어들이죠.”

변호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의원님이
더 깊이 책임을 느끼고 계신 건
압니다.”

“그러나
법정은
‘심리상담소’가 아닙니다.”

“여기서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짊어지고
자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의원님이
정말로
전부를 인정하고 싶어지실 날이 온다면—”

“그건
형이 확정되고 난 뒤,
다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노 영학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변호사가 나간 뒤,
방 안에는
두 종류의 종이만 남았다.

법리 서면과
빈 종이.

밤이 깊어갈수록,
노 영학의 손은
자연스럽게
빈 종이 쪽으로 갔다.

그는
제목을 쓰려다 멈췄다.

고백문?

유서?

변명?

결국
이상한 제목이 한 줄 적혔다.

“나의 변명과 고백 사이”

그는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악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숫자로 계산했고,
재개발 구역의 삶을
지도로만 바라봤으며,
병원 복도의 신음소리를
통계표로만 기입했다.”

펜 끝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나는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손 위에는
다른 손들이 있었고,
내 장부 위에는
다른 장부들이 겹쳐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의 악인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악의 관습 속에
길들여진 인간
이었다.”

문장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과
자신을 찌르는 방향 사이에서
흔들렸다.

어느 문단에서는
“구조적 문제”를 강조하며
자기 책임을 희석시키는 듯했고,
다른 문단에서는
스스로를
“사람을 숫자로 본 죄인”이라고
적나라하게 적었다.

“나는
여전히
마지막 칸까지
솔직해질 자신이 없다.”

“모든 이름을
여기 적을 수도 없고,
모든 잘못을
이 자리에서
인정할 용기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내가
누군가의 장부 위에서
빨간 줄로 그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

그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이 글이
법정에서 읽힐지,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나도 모른다.”

“다만
전령이든,
하나님이든,
역사든,
후손이든—

“누군가가
언젠가
이 글을 읽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펜이 멈췄다.

종이 위에는
흔들리는 글씨와
얼룩처럼 번진 잉크가
뒤섞여 있었다.


6. 장부와 편지 사이, 옥상의 독서

같은 시각,
도시 한복판의 옥상.

한 시온은
노 영학의 집무실과
그가 앉아 있는 책상을
먼발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종이 묶음의 윤곽과
움직이는 손만 겨우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종이 위에 적혀가는 문장이
어느 정도
읽히고 있었다.

“나의 변명과 고백 사이…”

그는
자기 장부를 펼쳤다.

노 영학 이름이 적힌 페이지 옆에
조그만 빈 칸 하나를 만들어
적기 시작했다.

“개인적 서면 작성 –
자신을 악인이라 인정하되,
끝까지
구조 뒤에 숨으려는 마음
함께 드러남.”

“완전한 참회와
자기 합리화 사이에서
끝내 한쪽으로 기울지 못함.”

그는
잠시 펜을 멈췄다.

“어쩌면
인간의 고백이란
원래
다 이런 모양일지도 모른다.”

그가 중얼거렸다.

“완벽하게
자신을 부정하는 문장도,
완벽하게
자신을 미화하는 문장도 아닌—”

“두 사이를
오가는
불완전한 문장들.”

바람이
장부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가
다시 돌려놓았다.

시온은
붉은 펜을 들었다.

“최종 심판 –
다시 연기.”

그가 적었다.

“이유 –
인간 세계의 장부와
피고인의 편지가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킬지
지켜보기 위함.”

“첫 공판,
증인들의 목소리,
언론의 기록,
당·재계의 반응…
모두 확인 후 결정.”

장부 한구석에
작게 한 문장이 더 써졌다.

“심판은
때로
칼날보다
종이의 문장으로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다.

그는
도시를 내려다봤다.

법원 건물의 창문에는
밤늦게까지 켜진 불빛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내일이면
그 건물 안 복도에서
수많은 이름들이
다시 한 번 불릴 것이다.

그래서
도시 어딘가에서는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고르고 있었다.

피해자들,
피고인,
변호사,
검사,
판사,
기자,
그리고—
이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장부를 쓰는 한 전령까지.


7. 법정으로 향하는 아침, 서로 다른 걸음들

다음날 아침.

법원 앞 광장은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로 가득했다.

취재진이
카메라 삼각대를 세우고 있었고,
시민 단체는
“도시의 미해결 피해자들에게 정의를”이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정치 탄압 중단하라”는
피켓을 든 지지자 몇 명이
짧게 구호를 외쳤다.

병원 피해자 아버지는
수척한 얼굴로
법원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한 지우가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물었다.

“너무 길게 서 계시면
힘드실 텐데.”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시간에 비하면,
이 계단 앞에서 기다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재개발 피해 노인은
유모차를 끌고 온 이웃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지팡이 말고
이걸 잡고 올라가세요, 아주머니.”

이웃이 말했다.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부터
아주머니가 됐어.”

“그래도
고맙네.”

군 가혹행위 제보자는
군복 대신
평 civilian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연대에서 준
진단서와 진술서가 들려 있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생활관 누군가에게
닿을까.

아니면
그저
뉴스 한 줄로 스쳐 지나갈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법원 입구 한편에서
윤 서연이
노트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피해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이 사람들은
오늘
다시 한 번
자신의 장부를
입으로 읽게 된다.

나는
그 장부를
또 다른 언어로 옮겨 적는 사람이다.

법원 건물 벽 위,
보이지 않는 난간 어딘가에
한 시온이 서 있었다.

그는
장부를 펼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의 걸음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오늘은
인간들의 무대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객석에 앉아
조용히 보고 있겠다.”

“단지—”

그의 눈빛이
법원 건물 꼭대기를 향했다.

“이 무대가
또 다른 연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

법원 안,

판사의 입에서
첫 문장이 나올 것이다.

“사건번호 ○○-○○,
피고인 노 영학 외 ○인에 대한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 한 줄이
이 도시의 장부에
또 하나의 굵은 선을 긋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인간의 장부와
전령의 장부가
또 한 번
잠시 겹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작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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