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7장 – 첫 번째 칼날이 스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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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 첫 번째 칼날이 스친 자리
1. 의식을 되찾은 자
병원 병실, 새벽.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번져 있었다.
기계는 일정한 박자로 소리를 냈고,
창문 틈으로는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밤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침대 위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에는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
입 안에는
말라붙은 피와 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긴… 어디지.
시야가 흐릿하게 따라잡은 것은
침대 옆 의자에 놓인
경찰의 모자였다.
침대 난간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쇠줄은 그의 손목과 침대 프레임을
짧게 이어 붙여 놓고 있었다.
그제야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문화센터…
계단…
가방…
심장이 옆구리에서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형사가 들어왔다.
“정신 드십니까,
이 재문 씨.”
남자는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이 재문.
전직 정보 경찰,
지금은 여론·위기 관리 컨설턴트.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신분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여기가…”
“병원입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셨죠.”
형사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운이 좋으신 편입니다.
조금만 더 나쁘게 부딪혔으면
이 얘기도 못 할 뻔 했어요.”
이 재문은
말없이 숨을 골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곳은
머릿속 어딘가였다.
“가방은…”
말끝이 잘렸다.
형사는
그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그 가방 말입니까?”
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프레이랑 칼, 폭죽,
그리고 재미있는 서류들이
잔뜩 들어 있더군요.”
이 재문의 목이
마르고 타들어갔다.
형사는
종이 몇 장을 꺼내
병상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복사된 문서였다.
“대상: ‘도시의 장부’ 간담회 참석자 일동.”
“목표: ‘전령 팬덤 폭력 집단’ 이미지 연출…”
“방법: 복면, 현수막 파손, 의자 투척, 스프레이 문구…”
맨 아래에는
마케팅 회사 로고,
그리고
그의 이니셜이 적힌 결재 표시.
“이 문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형사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 재문은
종이에 적힌 이니셜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결재 도장 하나를
이렇게 끝까지 따라와?
“…일종의
‘시뮬레이션’입니다.”
그가 말했다.
“실제로 할 계획은
아니었어요.”
형사가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은
변호사 오면
다시 한 번 해 주시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가려다
한 번 더 돌아봤다.
“참,
기자 기사 보셨습니까?”
“…무슨 기사요.”
형사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단독〉 ‘전령 팬덤 폭력 연출’… 문화센터 계단에 떨어진 가방 속 설계도 – 윤 서연.
기사에는
문화센터,
계단 사고,
가방 내용,
그리고
“연출 매뉴얼”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니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늘 묻는다.
폭력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오늘 계단에 떨어진 가방은
역으로 묻고 있다.”
“누가 ‘폭력의 그림’을 그려 놓고,
누가 그 그림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으려 했는지를.”
이 재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언론에서는
이걸 ‘개인의 일탈’로 볼지,
위에서 내려온 지시까지 본 걸지
아직 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누군가는
이 사고를
**‘선 그을 기회’**로 쓸 겁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윗사람들이
선을 그을 때
대개
선 이쪽에 있는 사람은
버려지더군요.”
문이 닫혔다.
남겨진 건
이 재문과
복사된 문서 몇 장뿐이었다.
그는
기계음과 침묵 사이에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버려지겠구나.
오래전,
경찰 조직에서 밀려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는
그래도 아직
갈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컨설팅, 자문, 마케팅.
권력 곁에서
**“어둠의 실무”**를 맡으며
위안 삼을 수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면
나도 이런 일 안 했겠지.
늘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놓인 문서를 보니
문장이 이렇게 바뀌고 있었다.
나 같은 놈이 있었기에
누군가는
더 편하게
시킬 수 있었겠지.
머리맡 TV에서는
뉴스 앵커가 말했다.
“한편,
문화센터 계단에서 발생한
‘전령 팬덤 연출’ 의혹과 관련해,
경찰은
한 민간 컨설팅 회사 직원을
피의자로 입건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화면에
블러 처리된 실루엣이 떠 있었다.
자막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여론 컨설턴트 이 모 씨,
‘개인적 일탈’ 주장.”
이 재문은
씁쓸하게 웃었다.
“개인적 일탈이라…”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침대 발치 쪽,
누군가의 그림자가
잠시 스쳤다.
그가 고개를 돌려 봤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의 장부에
새 줄을 긋고 있을 것만 같았다.
2. 국회, 스스로를 씻으려는 자들
며칠 뒤,
국회 회의장.
보건·교육·언론을 모두 아우르는
‘사회안전·정보윤리 특별위원회’ 임시 회의가 열렸다.
회의장의 공기는
카메라와 마이크,
그리고 숱한 이해관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 영학은
정장 깃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의 앞에는
법안 초안이 놓여 있었다.
“괴담·가짜뉴스 방지 및 집단 심판 방지 특별법(안)”
위원장은
가볍게 의사봉을 두드렸다.
“자,
오늘은
최근 이슈가 된
‘도시의 전령’ 괴담과
문화센터 계단 사건을 포함한
모방범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겠습니다.”
한 야당 의원이
먼저 손을 들었다.
“발언 요청합니다.”
위원장이 허가하자
그가 서류를 들고 말했다.
“우선,
계단에 떨어진 가방 속 문서—
이른바
‘전령 팬덤 폭력 연출 매뉴얼’에 대해
질의하겠습니다.”
모니터에는
서류의 일부가 모자이크 처리되어 떠 있었다.
야당 의원이 계속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문서는
특정 마케팅 회사 로고와
‘여론 관리 플랜’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내용상
특정 괴담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려 한 계획으로 읽힙니다.”
그는
노 영학 쪽을 향해 서류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 마케팅 회사는
최근 3년간
노 영학 의원님의 캠프 및
후원 모임과
계약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회의장이
순간 술렁였다.
카메라의 렌즈가
일제히
노 영학 쪽으로 향했다.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먼저
해당 사건으로
놀라셨을 시민 여러분께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준비된 문장을 꺼냈다.
“해당 회사와
과거에 계약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시나 보고도 받은 바 없습니다.”
야당 의원이 물었다.
“그럼
의원님은
그들이 뭘 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노 영학이 답했다.
“오히려 저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야당 의원이
다른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는
회의실 스크린에
메일 캡처 이미지를 띄웠다.
보좌관 간 내부 메일이었다.
– “의원님, ‘도시의 전령’ 괴담 관련 여론 관리 플랜
초안 공유드립니다.”
– “의원님께서 ‘선 넘지 않는 선에서 검토해 보라’고 하신 건
이 방향이 맞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메일 하단에는
짧은 답장이 있었다.
– “네, 이 방향으로 진행해 보시지요.”
발신자는
노 의원의 메일 계정이었다.
회의장 안의 공기가
갑자기 바싹 말라붙었다.
노 영학의 눈이
스쳐 지나가는 화면을 잠깐 봤다.
…저 놈이.
그는 마음속으로
참고 있던 욕을 삼켰다.
보좌관 중 누군가가
이메일을 빼냈다.
그는
마이크 앞에서
부드럽게 웃었다.
“좋습니다.
이 기회에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해당 메일은
수많은 제안들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법과 윤리 안에서의
여론 대응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의원석에 놓인 법안을 가리켰다.
“괴담이 커지기 전에
제도 안에서
안전장치를 만들자는 취지였지,
폭력을 연출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당 의원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선 넘지 않는 선에서’라는 표현을 썼습니까?”
“그 문장은
괴담 자체를
‘사냥’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노 영학이 답했다.
“아무리 문제적이라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짓밟으면 안 된다는,
제 원칙을 담은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언뜻 그럴듯했다.
그러나
지금 이 방 안에는
이미 또 다른 문장이 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은
더 이상 깨끗하게 들리지 않았다.
“의원님.”
다른 야당 의원이 끼어들었다.
“지금 말씀은
괴담 자체를 막고 싶지는 않았지만,
괴담을 빌미로
법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는 걸로 들립니다.”
노 영학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법을 통해
무언가를 막기 위해
여기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다만
무엇을 막을지,
어떻게 막을지 고민할 뿐.”
그의 입술 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고민을
범죄와 동일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관련 회사 및 보좌진에 대한
추가 조사와 자료 제출을
요구하겠습니다.”
의사봉 소리가
탁, 하고 회의장을 울렸다.
카메라가 꺼지자
공기가
또 다른 색으로 변했다.
옆자리의 장 호진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습니까, 의원님.”
노 영학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나한테 ‘괜찮냐’고 물을 입장은 아니지 않나.”
그 말은
비웃음도,
농담도 아니었다.
장 호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제 쪽 자료들은—”
“다시 한 번 정리해.”
노 영학이 말을 잘랐다.
“내가 네 이름까지
장부에 올리진 않게.”
그의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숨어 있었다.
“…장부요?”
장 호진이 되물었지만,
노 영학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는 회의장을 나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내 이름을
어디에 올리고 있는지,
나도 궁금하군.
3. 법률사무소 사이, 장부를 나누는 사람들
그날 오후,
법률사무소 사이(間).
작은 회의실 안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지우,
윤 서연,
그리고 문화센터 간담회에 참석했던
피해자 모임 대표.
테이블 위에는
프린트물과 노트북,
녹취록이 뒤섞여 있었다.
한 지우가
TV 뉴스를 끄며 말했다.
“메일이 공개된 건
분명
내부자 제보입니다.”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
“이건
오늘 아침
익명 메일로 온 자료예요.”
화면에는
메신저 캡처 몇 장이 떠 있었다.
– “의원님께서
‘선 넘지 않는 선에서 검토하라’고 하셨습니다.”
– “여론 관리 플랜,
‘전령 팬덤’ 이슈화 포함.”
발신자는
국회 보좌관 계정으로 추정되었다.
서연이 말했다.
“…위험한 제보네요.”
한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여기로 왔겠죠.”
피해자 대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정도면…
그 사람들,
처벌받게 할 수 있습니까?”
그의 눈에는
기대와 불신,
피로가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한 지우가 대답했다.
“법적으로는
‘직접적인 지시’가 입증되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도라는 건
법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서연이
노트를 펼쳤다.
“여론이라는 장부도 있죠.”
그는 웃었다.
“네.
그래서 기자님이 필요합니다.”
한 지우가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두 갈래입니다.”
그녀는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하나는
가방 속 문서와
메일들을 묶어서
‘조직적 여론 조작 및 폭력 연출 시도’로
고발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녀가 서연을 봤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런 괴담과 연출까지 사용해서
불만을 돌리려 했는지,
그 **‘원래의 장부’**를
끝까지 파고드는 것.”
서연이 말했다.
“병원, 학교, 재개발…”
피해자 대표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몇 년 동안
소리 질러도
아무도 안 보던 일들.”
한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사건들이
모여서
‘도시의 전령’이라는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그 전설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이용하려 한 사람들,
그리고
처음부터
그 전설을 부른 사람들—”
그녀는
양손으로 공중에 두 개의 원을 그렸다.
“이 두 원을
같이 보여 줘야 합니다.”
서연은
노트를 넘기며 말했다.
“그럼
제 연재의 다음 편은—”
그녀는
제목을 또렷하게 적었다.
“〈도시의 장부 ③ –
‘전설을 설계한 자들,
전설을 불러낸 자들’〉”
한 지우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피해자 대표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기자님,
변호사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그는 말했다.
“이 도시에서
‘전령’을 만들었던 사건들을
더 모아보겠습니다.”
“병원 말고,
학교 말고,
동사무소에서,
군대에서,
공장에서,
집에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세상에 기대를 버리게 된 순간들을.”
서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게
진짜 장부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전령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먼저 읽어야 할 장부.”
4. 어두운 복도, 흔들리는 양심
국회 의원회관,
늦은 밤.
형광등이 일부 꺼진 복도는
길게 비어 있었다.
복도 끝 사무실 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모니터에는
메일함이 열려 있었다.
노 영학의 수석 보좌관,
최 도윤이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일함 한쪽에
“보낸 편지함”이 떠 있었다.
그 리스트 중 하나가
그의 눈에 걸렸다.
– “의원님, ‘도시의 전령’ 괴담 관련 여론 관리 플랜
초안 공유드립니다.”
그 메일을 쓴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며칠 전,
이메일 캡처가 언론에 흘러나갔을 때
그는 몸이 굳는 걸 느꼈다.
내가 보낸 메일이
내 발목을 잡는구나.
하지만
결정적인 문장,
즉
“네, 이 방향으로 진행해 보시지요.”
라는 답장은
분명
노 영학이 직접 보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어디까지
같이 가야 하지.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노 영학이 들어왔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눈 밑에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 안 갔나, 도윤 씨.”
그가 말했다.
“자료 정리 좀 하고 있었습니다.”
최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 영학은
책상에 기대어
서류들을 훑어봤다.
“오늘 메일 유출 건—”
“죄송합니다, 의원님.”
최 도윤이 먼저 말했다.
“아마
제가 예전에 보냈던 메일이
어디선가
유출된 것 같습니다.”
노 영학이
그를 바라봤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
우리를 장부에 올리려고 한다.”
그가 말했다.
“내 이름 옆에
붉은 점을 찍으려 하지.”
최 도윤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장부요?”
“그래서
질문하자면 말이야.”
노 영학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장부에
네 이름이 같이 올라가는 건
얼마나 괜찮겠나.”
그 말은
그를 위하는 말 같기도,
시험하는 말 같기도 했다.
최 도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의원님과
같이 일해 온 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다만
오늘 같은 메일들이
계속 쌓이고,
그게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설계도가 될 때…”
그는 말을 멈췄다.
노 영학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말해 보게.”
“…그때
그 장부에
제 이름까지 올라가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적.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노 영학이 웃었다.
“…양심 고백인가?”
“아닙니다.”
최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제 자리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정말로
의원님은
문화센터 계단 사건을
몰랐습니까.”
그 질문은
며칠째
그의 목 끝에 걸려 있던 것이다.
노 영학은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봐왔지.”
그는 말했다.
“그리고
늘
이렇게 기도해 왔다.”
“‘제발
위험선 안에서
끝나게 해 달라고.’”
최 도윤이 물었다.
“…그 기도가
실패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 영학은
조용히 웃었다.
“기도는
늘 실패한다네, 도윤 씨.”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컨설팅을 쓰고,
장부를 숨긴다.”
그는 서류를 덮었다.
“내 답은
이 정도면 됐나?”
최 도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문을 나가려는 그를
노 영학이 불렀다.
“도윤 씨.”
그가 돌아봤다.
“그 장부에
꼭 올라가고 싶지 않다면—”
노 영학이 말했다.
“당분간은
내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게.”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복도에 나와
문을 닫은 순간,
최 도윤은
자신의 심장이
어딘가 다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기자가 될지,
검사가 될지,
변호사가 될지—
그는 아직 몰랐다.
다만,
어디선가
기록을 기다리는 장부들이
펴져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5. 창가, 지켜보는 자
어느 오래된 빌딩 옥상.
도시의 불빛은
멀리서 보면
마치 별자리처럼 보였고,
가까이서 보면
현관등, 가게 간판,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모자이크에 불과했다.
한 시온은
옥상 난간에 앉아
국회 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이 재문 –
설계된 폭력 연출,
계단 사고 후 중태.
현재,
자신의 역할 자각 중.”
“최 도윤 –
내부 자료 접근 권한,
양심의 갈림길에 서 있음.”
“노 영학 –
메일 지시,
공적 발언으로 책임 회피 시도.”
붉은 점 옆에는
여러 색의 기호들이
얽혀 있었다.
시온은
국회 건물 위를
가늘게 흘러가는 공기를 보았다.
“성벽은
안쪽에서부터
갈라진다.”
그가 혼잣말을 했다.
“돌을 쌓은 자가
그 균열을 직시하지 않으면—
결국
돌과 함께 묻히게 되겠지.”
그는
손가락으로 장부 위
노 영학의 이름을 짚었다.
“아직
마지막 줄을 적을 때는 아니다.”
“인간들끼리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더 지켜볼 시간은 남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단,
그 시간을
더 늘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바람이
장부 페이지를 살짝 넘겼다.
다른 페이지에는
윤 서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늘 기사 –
‘계단에 떨어진 가방 속 설계도’
여론 파장,
내부 제보 촉진.”
“위험도: 상승,
영향력: 상승.”
시온은
웃음 아닌 웃음을 지었다.
“인간 세계에는
두 종류의 칼이 있다.”
“하나는
살을 가르는 칼,
하나는
글자를 새기는 칼.”
윤 서연의 펜은
후자의 칼이었다.
그러나,
그 칼끝이
언젠가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존재까지 겨누게 될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쓸지—”
시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것도
장부가 정할 일이다.”
6. 봉투, 처음 날아온 칼날
노 영학의 집무실, 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뒤,
사무실은
특유의 고요한 냄새를 풍겼다.
책상 위에는
오늘 회의에서 쌓인 서류 더미,
모니터에는
로그인이 풀린 메일창이 켜져 있었다.
그는
자켓을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 병을 가져와
잔에 조금 따랐다.
“…오늘도
잘 버텼어.”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인지,
성벽 전체에게 한 것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문 아래로
하얀 봉투 하나가
쓱 밀려 들어왔다.
노 영학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누구요?”
복도에는
기척이 없었다.
그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앞면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장난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복사된 문서 한 장이
나왔다.
그가 그것을 펼친 순간,
숨이
아주 짧게 멎었다.
문서 상단에는
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도시의 전령 – 여론전 관리 플랜(초안)”
그 아래,
굵은 펜으로
수정된 글씨.
그리고
오른쪽 상단 한 구석,
볼펜으로 짧게 적힌 문장.
“좋다.
이 방향으로 추진하시지요. – 영학”
그 필체는
얼마 전에 자신이 본
메일 캡처 속
문장과 거의 같았지만,
이건
메일이 아닌
실제 종이 문서 위의 친필 메모였다.
눈앞이
가늘게 흔들렸다.
…언제 쓴 거지?
기억을 더듬었다.
회의실,
여론 전략 회의,
마케팅 회사 대표,
이 재문.
그들이 가져온 PPT 출력본 맨 앞장에
그가
볼펜으로 이런 말을 적었다.
“선 넘지 않는 선에서
검토해 보시지요.”
그 뒤에,
장난처럼 덧붙였던 한 문장.
“좋다.
이 방향으로 추진하시지요.”
그때는
그 말이
그저
“회의 끝”을 알리는 도장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걸
누가—”
그는
문서를 뒤집어 봤다.
뒷면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봉투 안쪽도
살펴봤지만
발신인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봉투 가장자리 한 구석에
아주 희미하게
이니셜 두 글자가 보였다.
Y.S.
“…윤 서연?”
그는
이름을 속으로 불러봤다.
기사를 쓴 기자.
문화센터에서
간담회를 취재했고,
계단 사고와
가방 속 설계도를
보도한 사람.
그녀에게
이 문서 사본이 있다는 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선들이
한 번에 엮였다.
“보좌관,
마케팅 회사,
컨설턴트,
피해자 단체,
기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으로
칼날이
내 이름을 스치기 시작했군.”
그의 손이
문서를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잠시 후,
그는 문서를 접었다.
서랍을 열어
가장 밑바닥에
그 종이를 넣었다.
“아직
제 발로
칼날 위에 올라설 생각은 없다.”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가 얼마나 칼을 잘 휘두르는지,
한 번
지켜보지.”
그의 눈빛에는
두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이상한 흥분.
이 게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쪽은
누구일까.
그는
서랍을 닫았다.
덜컥, 하는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을 울렸다.
7. 서로 다른 장부, 하나의 문장
그 시각,
도시의 다른 쪽.
윤 서연은
사무실 구석 자리에서
새 기사의 초고를 쓰고 있었다.
“도시의 장부 ③ –
전설을 설계한 자들,
전설을 불러낸 자들”
그녀는
첫 문장을 적었다.
“어떤 전설은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되지만,
어떤 전설은
누군가의 필요에서 시작된다.”
“도시의 전령이라는 이름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 이름이
정치인의 회의실과
마케팅 회사의 프레젠테이션 파일 안에서
몇 번이나 회전했는지는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커서가
문장 끝에서 깜빡였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췄다.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그 이름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는
쓰지 말자.
그녀의 펜은
한 사람의 그림자를
떠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검은 코트,
문화센터 계단,
옥상 난간.
당신이
진짜든 가짜든—
서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이 도시가
먼저 써야 할 장부를
다 쓰고 나서
묻겠습니다.
그녀는
다음 문장을 타이핑했다.
“우리는 아직
전령이 누군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전령을 필요로 하게 만든
도시의 얼굴은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창밖,
어디선가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쳤다.
어느 옥상,
같은 시간.
한 시온은
장부를 덮었다.
붉은 점 옆에
작게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첫 번째 칼날이
성벽을 스침.”
“아직
피가 나지는 않았으나,
돌의 결이
분명히 변하기 시작함.”
그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 칼이 아니라,
그들의 펜과 목소리가
먼저 움직일 시간이다.”
바람이
그의 코트를 스쳤다.
도시는
여전히 시끄럽고,
여전히 무감각하고,
여전히 분노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성벽 어딘가에
새 금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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