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8장 – 기록을 바꾸려는 손, 기록을 지키려는 눈

28장 – 기록을 바꾸려는 손, 기록을 지키려는 눈

1. 청문회 다음 날 아침 – 제일 먼저 움직이는 것은 ‘해설’이다

다음 날 아침.

청문회가 끝난 지
하룻밤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는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어제의 장면을 ‘해석’하고 있었다.

포털 메인에는
각기 다른 제목들이 올라와 있었다.

“민도윤, 구조 설계 책임 인정… ‘제 이름도 함께 비판받아야’”
“김성훈, ‘완벽한 피해자 아니다’ 발언… 여론 엇갈려”
“여야, ‘ESG 구조 개선’ 놓고 공방… 결국 또 말뿐인가”

같은 청문회,
같은 문장들이었지만
기사마다 강조하는 단어는 달랐다.

어떤 매체는
민도윤의 발언을 크게 뽑았다.

“책임 회피 대신
‘내 이름도 비판받아야 한다’며
구조적 책임을 인정한 점은
이례적이다.”

다른 매체는
그 문장 앞뒤를 잘라내고
이렇게 정리했다.

“민도윤,
‘실무진 일탈 아니다’ 발언 후퇴…
결국 ‘회사 책임’으로 물타기?”

또 어떤 방송은
김성훈의 한 마디만
집요하게 반복했다.

“ ‘저는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

같은 말을 놓고
한쪽은 “양심 선언”이라고 불렀고,
다른 쪽은 “책임 회피용 안전한 자기비난”이라고 불렀다.

이른 아침,
정치인의 휴대전화에는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 “의원님 어제 질문 좋았습니다.
보도자료에 그 부분 꼭 넣겠습니다.”
– “오늘 라디오 출연 시
‘구조를 묻기 위해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다’ 멘트,
한 번 더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 “상대 당 의원은
제보자 공격 쪽으로 라인 잡는 것 같습니다.
대비 멘트 준비하겠습니다.”

어제
회의장 안에서 날아다니던 문장들이
이제는
각자의 입맛에 맞게 잘려
새로운 문장으로 재조합되는 중이었다.

청문회는
하루 만에
“기록”에서
“해설”로,
그리고 곧
“무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2. 회사 비상회의 – 계획이 어긋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것

같은 시간,
M사 20층 임원 회의실.

어제와 같은 방,
그러나 공기는 더 무거웠다.

스크린에는
어제 청문회 생중계 클립이
여러 개 분할 화면으로 떠 있었다.

민도윤이
“실무진 일탈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제 이름도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
그리고 김성훈이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

CEO가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설명해 보시죠.”

PR 담당 임원이
식은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민 본부장님의 발언은—”

“계획에 없던 부분이었습니다.”

“원래는
‘일부 문구 작성 과정에서의 일탈’ 프레임을 통해
구조와 회사를 분리하고,
실무진 책임으로
최소한의 손실만 감당하는—”

CEO가
말을 잘랐다.

“그건
어제도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묻는 건—”

“어제 그 계획이
어긋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입니다.”

모든 시선이
민도윤 쪽으로 쏠렸다.

그는
회의실 끝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CEO가
차갑게 물었다.

“민 본부장.”

“어제
왜 대본을 버리셨습니까.”

민도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뜯어낸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청문회 준비를 할 때
제가 예상했던 질문은—”

“ ‘누가 잘못된 문장을 썼는가’,
‘어떤 실무진이 일탈했는가’였죠.”

“그 질문에는
미리 준비한 답이
맞았을 겁니다.”

그는
어제 들었던 문장을 떠올렸다.

“하지만
실제 청문회에서 나온 질문은—”

“ ‘그 구조에서
피해자는 누구입니까’였습니다.”

“그 질문에
‘실무진 일탈’이라는 답은—”

그는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너무
작았습니다.”

회의실 안
누군가가
작게 혀를 찼다.

CEO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 이름을 올리셨다는 겁니까.”

“그 순간
회사 전체를
방패 없이 노출시키는 선택을
혼자서 하셨다는 뜻입니까.”

민도윤이 답했다.

“네.”

“제가 설계한 구조였고,
그 위에
제 서명이 있었으니까요.”

법무팀장이 끼어들었다.

“도덕적으로는
그 말이
설득력 있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법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발언입니다.”

“이제부터
검찰은
‘구조 설계자 민도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접근할 겁니다.”

PR 임원이 덧붙였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책임 인정한 드문 금융인’이라는
긍정적 톤이 있지만—”

스크린에 다른 기사 제목이 떴다.

“ ‘민도윤,
구조 설계 책임 인정…
정○○ 시즌2 되나.’ ”

“이 기조가
어디로 흐를지는
아직 모릅니다.”

CEO가
마침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좋습니다.”

“이미
말은 나갔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말을
어떻게 다시 써 넣을지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첫째,
회사 공식 입장을 통해
민 본부장의 발언이
‘개인의 양심적 고백’임을 강조합니다.”

“구조와 회사 전반이
불법이었다는 인정이 아니라—”

“몇몇 표현이
도덕적으로 부적절했음을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는
차원으로 축소하죠.”

“둘째,
내부적으로는
민 본부장의 직무를
일정 기간 조정합니다.”

“대외적으로는
‘개혁을 이끄는 내부 인사’처럼 보이게 만들되—”

“내부 결정 과정에서는
최종 의사결정 권한에서
한 발 빼게 해야 합니다.”

“셋째,
김성훈에 대한 대응은—”

그는
민도윤을 잠시 쳐다봤다.

“…일단
보류합니다.”

PR 임원이 놀랐다.

“보류…입니까?”

CEO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김성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언론은
‘양심 고백한 사람을
회사가 역으로 공격한다’는
프레임을 씌울 겁니다.”

“일단
구조 설계 책임을 인정한 사람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
활용해야 합니다.”

“버릴 수 있는 이름은—”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나중에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중’이라는 단어에
민도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은
나를 쓰고,

나중에는
나를 버리겠다는 뜻이겠지.

회사는
언제나
그런 순서를 좋아했다.


3. CEO와 민도윤 – 한 문장을 ‘정정’하라는 제안

회의가 끝난 뒤,
CEO는
민도윤을
따로 불렀다.

작은 응접실.
창밖으로는
회색 건물들 사이로
얇은 햇빛이 비껴 들어오고 있었다.

커피 두 잔이 나왔다.

CEO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민 본부장.”

“어제
용기를 낸 건
인정합니다.”

“다만
용기와
전략은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민도윤이
작게 웃었다.

“네,
압니다.”

“어제의 저는
전략가가 아니라—”

“그저
늦게 도착한
인간이었습니다.”

CEO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습니다.”

“그 인간적인 부분을
전략적으로
활용합시다.”

그는
서랍에서
프린트 한 장을 꺼냈다.

“여기
오늘 오후에 배포할
민 본부장 명의의
‘보충 입장문’ 초안이 있습니다.”

용지 상단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 ‘어제 청문회 과정에서
제 발언이
자칫
회사 전체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음을
뒤늦게 인지했습니다.’ ”

“ ‘저의 발언은
일부 문구의 도덕적 부적절성을
인정한 것으로,
회사 구조 전반이
법적 기준을 위반했다는 취지는
전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

마지막 문장.

“ ‘앞으로도
저는
회사의 준법과 윤리 경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CEO가 말했다.

“이 문장들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어제 하신 말씀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해설
조금 더 붙이는 거죠.”

민도윤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해설이라…”

그는
어제 청문회 장면을 떠올렸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합니다.”

그 문장은
프롬프터에 없었다.

어제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어쩌면
오늘 하루 중 가장 정직한 문장이었다.

민도윤이
천천히 물었다.

“제가
이 입장문에 서명하면—”

“검찰과 정치권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CEO가 답했다.

“검찰은
‘민 본부장이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으며,
그러나 회사 구조 자체가
불법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정리하겠죠.”

“정치권은
조금 시끄러워질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이슈가 나오면
관심이 분산될 겁니다.”

“중요한 건—”

그는
단어를 골랐다.

“우리가
기록을
어느 방향으로 고정하느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말은
아직 젖어 있는 잉크예요.”

“완전히 마르기 전에
우리가
몇 줄 정도는
더 그어 넣을 수 있습니다.”

민도윤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제
마이크 앞에서 했던 말은—

내가
처음으로
나 자신을 향해 겨눈 칼이었다.

오늘
여기서 서명하는 순간—

그 칼은
다시
칼집으로 돌아간다.

대신
둔탁한 나무 몽둥이 하나가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기록 위를 두들기겠지.

그는
한참 동안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당장
서명하기보다는—”

“제가
제 입으로
한 번 더
말해 보고 싶습니다.”

CEO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민 본부장.”

“우리는
지금
개인의 양심보다
회사의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
양심을 쓰셨으니—”

“오늘은
전략을 쓰실 차례입니다.”

민도윤이
시선을 들었다.

“어제
구조 책임을 인정한 사람이—”

“오늘
그 말에
‘법적 해설’을 덧붙이면—”

그는
천천히 물었다.

“사람들은
어제 말을
양심으로 기억할까요,
전략으로 기억할까요.”

잠시 정적.

CEO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프린트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남겨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안에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문이 닫혔다.

응접실에 남은 것은
종이 한 장과
깊은 숨소리뿐이었다.


4. 검찰 조사실 – ‘참고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피의자의 그림자

그날 오후,
서울중앙지검 조사실.

창문 없는 방
한 가운데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고,
위쪽에는
녹음 중임을 알리는
빨간 불빛이 켜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검사와 수사관,
옆에는
기록 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김성훈은
“참고인” 신분으로
그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검사가
형식적인 멘트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자산운용사 M사 관련
구조 실태 조사와 관련된
참고인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참고인 인적 사항 확인하겠습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이 오고 갔다.

이름,
주민번호,
주소,
이력.

그 후
검사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어제 청문회에서
말씀하신 내용 중—”

그는
서류를 넘겼다.

“ ‘저는 이 구조에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

“이 발언,
맞으시죠.”

김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사가 물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어느 정도
가담자로 보신다는 뜻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들이
형사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의 톤은
‘참고인’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에게 묻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김성훈이
침을 삼켰다.

“…저는
법률 전문가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 했던 일들—”

그는
천천히 나열했다.

“문서 초안 작성,
리스크 설명 방식 협의,
투자자 대상 설명회에서
구조의 한계에 대해
충분히 알리지 않은 점—”

“이런 것들은
분명히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사가
재빨리 파고들었다.

“도덕적 책임 말고,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
사기,
배임,
부작위에 의한 책임 같은 것들에 대해.”

김성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법적 책임도 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증언자가 아니라
피의자가 된다.

하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고 말하는 순간—

어제 청문회에서 한 말이
전부
포장된 연설이 되어 버린다.

검사가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 씨.”

“한 가지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세상은
당신을
‘양심적인 내부고발자’로
보고 싶어합니다.”

“그 프레임이
유지되는 한—”

그는
볼펜을 굴리며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도
당신을
증언자로
활용하는 편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자기 책임을
지나치게 축소하려 들거나—”

“회사와의 분쟁이
격화되면—”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때는
이야기 구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정○○도
처음엔
‘구조의 희생자’로
불리던 사람이었다는 걸.”

김성훈의 등골을
차가운 공기가 타고 내려갔다.

기록을 쓰는 손은—

언제든
역할을 바꿀 수 있다.

어제의 증언자를
오늘의 공범으로,

어제의 가해자를
오늘의 참고인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은—”

“법률가인
검사님이
판단해 주셔야 합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는
마이크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가능한 한
빠짐없이
말씀드리겠다는 것뿐입니다.”

검사는
그 말을 듣고
짧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게
지금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답입니다.”

기록 담당자가
노트북에
다음 문장을 타이핑했다.

“참고인 김성훈,
‘법적 책임 부분은
검사 판단에 맡긴다’고 진술.”

그 문장은
문장 자체로는
아무 색깔도 없어 보였지만,
언젠가
어느 쪽으로든
색칠될 수 있는
여백을 품고 있었다.


5. 감옥의 노트와 국회의 속기록 – 두 개의 장부를 나란히 놓는 법

며칠 뒤,
○○교도소 작은 도서실.

정○○는
도서 담당 교도관에게
특이한 부탁을 했다.

“혹시
국회 속기록 같은 것도
신청해서 볼 수 있습니까.”

교도관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여긴
도서관이지
국회도서관이 아닙니다.”

“그런 건
인터넷으로 봐야지.”

정○○가
천천히 말했다.

“인터넷은
못 쓰니까요.”

“청문회가
공식 기록으로 남으면—”

“그 기록도
언젠가
누군가는
봐야지 않겠습니까.”

교도관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형,
그런 거
본다고 뭐가 달라져.”

“당신 판결문도
기록이고,
뉴스 기사도 기록이야.”

“근데
여기 앉아 있는 건
결국 당신이잖아.”

정○○는
잠시 웃었다.

“맞습니다.”

“그래도—”

그는
짧게 덧붙였다.

“제가
제 판결문만 보다가
인생을 끝낼 순 없잖아요.”

교도관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신청을 넣어 주었다.

일주일 뒤,
도서실 책상 위에
두꺼운 제본물이 하나 올라왔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회 회의록 제○○호 –
ESG 구조개선 및 금융책임 실태조사 청문회”

정○○는
제본물을 펼쳤다.

흑백 글자들 사이에서
어제 TV에서 들었던 문장들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저는
이 구조에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제 이름도
그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그 구조에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합니다.”

그는
자기 노트를 꺼내
국회 속기록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한쪽에는
국가의 장부,
다른 한쪽에는
자기 개인의 장부.

정○○는
노트 한 페이지 상단에
새 제목을 적었다.

“국가 장부와
내 장부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그 아래에
작게 썼다.

“나는
이 장부들 사이의
낙차만큼을
살아온 사람이다.”

“국가 장부에는
‘복지 인프라 확충’이라고 쓰여 있을 때—”

“내 장부에는
‘돌봄 인력 감축,
병실 회전율 증가,
식단 비용 절감’이라고 쓰여 있었다.”

“국가 장부에는
‘사회책임투자 상품 개발’이라고 쓰여 있을 때—”

“어딘가 다른 장부에는
‘리스크를 최대한 잘게 쪼개
책임을 분산시키는 구조 설계’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그는
국회 속기록을 읽다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구조를 쓸 때,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한다.”

그 문장을
자기 노트에도 옮겨 적었다.

“내가 만들었던 구조들 옆에도
사람 이름들이 있었다.”

“나는
그 이름들을
숫자로 덮어 버렸다.”

“이제
남은 생 동안—”

그는
새로운 항목을 하나 적었다.

“나머지 시간은
숫자 옆에
다시 이름을 적어 넣는 데 쓰겠다.”

정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나중에
이 노트
어떻게 할 겁니까.”

정○○가 답했다.

“모르겠다.”

“언젠가
밖에 나가게 된다면—”

그는
국회 속기록을 가리켰다.

“이 기록을 쓴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보내 볼 수도 있겠지.”

“ ‘여기
한 사람의 작은 장부가 있다.’ ”

“ ‘당신들이 쓴 국가 장부와
어떻게 맞춰볼 수 있을지
함께 보자’고.”

정준호가 웃었다.

“정말
그 사람들이
읽어 줄까요.”

정○○는
미소를 지었다.

“읽든
안 읽든—”

“적어도
나는
내 이름으로 쓴 장부 하나를
갖게 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남들 이름으로만
장부를 썼으니까.”

국회 속기록의 활자와
교도소 노트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책상 위에서
조용히 마주보고 있었다.


6. 전령의 장부 – 지워진 문장, 덧칠된 기록을 읽는 법

그날 밤,
한 시온은
도시 위
늘 서 있던 자리에서
또 한 번
장부를 펼쳤다.

이번에는
장부에
특이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기록을
바꾸려는 손들”

그 아래에는
여러 줄이 적혔다.

“회사 –
민도윤의 발언 위에
‘보충 입장문’을 덧씌우려 함.”

“정치 –
어제 청문회의 문장들 중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반복 인용.”

“검찰 –
‘참고인’이라는 이름 아래
언제든
‘피의자’로 전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

옆 칸에는
다른 제목이 있었다.

“기록을
지키려는 눈들”

그 아래에는
이름들이 적혔다.

“윤 서연 –
청문회에서 나온
‘완벽한 피해자는 아니다’
‘이름도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
문장을
기사 속에서
그대로 살려 냄.”

“정○○ –
국회 속기록을 신청해
자신의 노트와 함께 펼쳐 놓고,
숫자 옆에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

“김성훈 –
검찰 조사에서
법적 책임 판단을
검사에게 넘기되,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고 진술.”

시온은
장부 가장자리에
작게 메모를 썼다.

“기록을 바꾸는 손은
언제나
펜을 쥐고 있지는 않는다.”

“때로는
보도자료를 쓰는 사람의 손,
기사 제목을 정하는 사람의 손,
속기록에서
어느 문장을 강조할지 고르는 손이다.”

“기록을 지키는 눈은
때로는
아무 권한도 없다.”

“그저
읽고,
기억하고,
다시 써넣을 뿐이다.”

그는
한숨처럼
짧게 웃었다.

이 도시는
칼과 이름뿐만 아니라—

기록으로도
서로를 벤다.

누군가는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고,

누군가는
기록 위에
이름을 다시 써 넣는다.

오늘 밤,
시온의 검은
여전히 칼집 안에 있었다.

그러나
칼집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조금씩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곧—”

그는
장부 마지막 줄에
짧게 썼다.

“곧
칼이 다시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기록을
조작해
또 다른 정○○,
또 다른 김성훈을 만들려는 손이—”

“다시
장부를 찢으려 할 때.”

그는
도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딘가의
작은 사무실,
컴퓨터 화면 앞에서
보도자료 문장을 고치고 있는 사람들.

어딘가의
편집국,
어느 문장을 살리고
어느 문장을 잘라낼지
회의하는 사람들.

어딘가의
홍보대행사,
“이미지 회복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슬로건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 중—

누군가는
단지
빵을 벌기 위해
글자를 옮기는 사람일 뿐이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그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분명히
알고서
기록을 바꾸는 사람일 것이다.

누가
자기 손으로
장부를 찢고 있는지—

나는

보게 될 것이다.

장부가
조용히 덮였다.

바람이 불었다.

칼집 안의 검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손잡이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 장의 제목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29장 –
지워진 기사,
사라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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