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 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그 이름 없는 사람 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심판의 전령 - 22장 – 피 묻지 않은 주먹, 피 냄새 나는 구조

22장 – 피 묻지 않은 주먹, 피 냄새 나는 구조

1. 작업장의 소란 – 숫자 대신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

늦은 오후.

교도소 작업장.

플라스틱 부품을 맞추고,
종이를 접고,
반복적인 손짓들이
기계의 톱니처럼
한 줄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는
맨 끝자리에서
작업대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선풍기 하나 돌아가지 않는
답답한 공기 속에서
수용자들의 숨소리가
조용한 합창처럼 겹쳐졌다.

그때,
작업장 한쪽에서
낮게 섞인 욕설이 들려왔다.

“야, 이거도 못 맞추냐, 병신아.”

“손이 느리면
그만큼 더 내놔야지.”

몇 줄 앞.

왜소한 체격의 수용자 하나가
손가락 끝을 떨며
부품을 맞추고 있었다.

팔에는
옅은 흉터가 여러 겹.

그의 이름은
정준호.

폭력 사건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보증 사기와 빚 독촉에 쫓기다
자잘한 범죄로 구속된,
“구조의 밑바닥에서 떠밀려 들어온 사람”이었다.

옆에 앉은 덩치 큰 수용자가
준호의 작업물 상자를
툭 건드렸다.

“너 오늘
할당량 모자라면—”

그는
두 손가락을 비벼 보였다.

“알지?”

준호가
작게 말했다.

“…오늘은
진짜
더 못 내요.”

“가족들이…
면회도 안 와요.”

덩치 큰 수용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게
쓸모없는 인간이면
가족이라도 잘해주든가.”

그는
준호의 어깨를 콱 잡아
의자에서 반쯤 끌어내렸다.

작업장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정○○는
머리를 숙인 채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귀는
점점 그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간수 하나가
작업장 앞쪽에 서 있었지만,
멀찍이서
딴청을 피우는 척
휴대용 단말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기도
장부가 있다.

누구를
어디까지 맞아도 되는지,
누가
어디까지 빼앗겨도 되는지—

눈빛 몇 개로
그 선이 정해진다.

덩치 큰 수용자가
준호의 상자를 발로 밀었다.

부품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야,
이딴 손으로
뭐 먹고 살았냐.”

“밖에서도
남한테 뜯기고,
여기서도
뜯기고.”

그 말에
주변 몇몇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 순간,
정○○의 손이
멈췄다.

손끝에 쥐고 있던 부품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작업대 위에 떨어졌다.

나는
평생
구조를 움직이는 판에서만
손을 썼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맞는지는—

보고만 있었지.

하지만
지금 이 방에는
구조가 없다.

오직
주먹과
두려움과
침묵만 있다.

정○○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2. “내가 하겠다” – 피 묻지 않은 손이 처음으로 드는 말

작업장 공기가
정지된 듯 했다.

정○○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덩치 큰 수용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오,
회장님이
여기까지 나오시네?”

“뭐,
우리 노동환경까지
리모델링해 주시게요?”

주변에
낮은 웃음들이
한 번 퍼졌다.

정○○는
준호를 한 번 보고,
천천히 말했다.

“오늘
이 사람 할당량—”

그는
바닥에 쏟아진 부품들을
한 번 훑어봤다.

“내가 하겠다.”

작업장 여기저기서
숨죽인 기척이 났다.

덩치 큰 수용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라고요?”

정○○는
또렷이 말했다.

“내 몫과
이 사람 부족분까지
내가 맞추겠다.”

“대신—”

그는
덩치 큰 수용자를 바라봤다.

“오늘은
이 사람 상자에
손대지 마라.”

잠시 정적.

그러고 나서
폭발하듯 웃음이 터졌다.

– “야,
회장님이
작업 스폰도 해 주네!”
– “역시 큰손이야, 큰손!”
– “여기서도
구조조정 대신
업무 분담하시는 거냐?”

덩치 큰 수용자의 눈빛만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정○○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거래’를 합니까.”

“여긴
회의실이 아니라
작업장이에요.”

“몸으로 버티는 데지,
입으로 통하는 데가
아니라고요.”

그의 손이
정○○의 가슴팍을 밀쳤다.

정○○의 몸이
뒤로 휘청거렸다.

주변 수용자들 눈이
커졌다.

간수는
여전히
멀찍이서
휴대 단말기 화면만 보고 있었다.

그래.

여기도
장부가 있지만,
이 장부에는—

‘비상벨을 언제 누를 것인가’라는 항목은
없다.

덩치 큰 수용자가
정○○에게
더 가까이 붙으며 말했다.

“회장님.”

“당신 같은 인간들이
만든 구조 때문에
여기 들어온 인간들 많아요.”

“근데
이제 와서
착한 척한다고—”

그는
입가를 비틀었다.

“이 작업장
구조가 바뀔 것 같아요?”

정○○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적어도
오늘 이 사람에게
가는 구조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게 떨렸다.

“내가
막을 수 있다.”

순간,
덩치 큰 수용자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는
주먹을 들어
정○○의 옆구리를
세게 후려쳤다.

숨이
한 번에 튀어나갔다.

“크읏—”

정○○가
작업대 모서리에
몸을 부딪치며
한쪽으로 쓰러졌다.

주변에서
누군가
짧게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막았다.

간수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거기!
뭐야, 지금!”

하지만
덩치 큰 수용자는
이미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아, 예.
넘어지셨어요.”

“나이 드셔서 그런지
작업장 바닥이
미끄럽나 보네요.”

정○○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옆구리에서
둔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게
내가 사람들에게
강요해 온
‘수용 가능한 리스크’의
한 조각이었겠지.

이 통증을
숫자로 옮기면—

그는
생각을 멈췄다.

이제는
숫자로 옮기고 싶지 않다.

작업장 뒤쪽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교도관님.”

조용한 목소리,
그러나
마이크를 통과한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정준호였다.

“아까
제가 맞았다고
신고해도 됩니까.”

“이 아저씨는
말리다가
같이 맞으신 겁니다.”

작업장 공기가
또 한 번 멈췄다.

간수가
마지못해
무전기를 들었다.

“작업장 ○○구역,
다툼 발생.
의료실, 경비 인원 요청.”

정○○는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옆구리가
불에 덴 듯 아팠지만,
입술은
오히려
이상하게도
조금 올라가 있었다.

오늘
내 몸이
처음으로
구조의 피해자 편에 섰다.

너무 늦었고,
너무 작고,
너무 하찮은 선택이지만—

그래도
이 선택만은
장부에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적히기를 바란다.


3. 의무실의 소문 – “진짜로 맞을 줄은 몰랐다”

의무실 침대.

정○○는
옆구리에 얼음팩을 대고
누워 있었다.

의사는
갈비뼈를 눌러보며 말했다.

“금은 아니고,
심한 타박상입니다.”

“며칠은
크게 움직이지 마세요.”

간수 둘이
옆에서 서류를 적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로
맞을 줄은 몰랐는데.”

다른 간수가 물었다.

“누가?”

“정○○ 말이야.”

“그냥
‘내가 할당량 메우겠다’ 한 다음에
슬쩍 빠질 줄 알았지.”

“몸으로 막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의사는
진찰을 마치고
나가며 말했다.

“나이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다치면
회복 오래 걸립니다.”

“괜히
영웅 놀이 하지 마세요.”

정○○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영웅이라.”

“영웅들이라면
내 장부를 보고
뭐라고 했을까.”

의무실 문이
살짝 열리고,
정준호가
머리만 내밀었다.

간수가
눈을 흘겼다.

“면회 허가된 사람만 들어온다.”

준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냥…
할 말이 있어서요.”

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1분.”

정준호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정○○는
그를 바라봤다.

준호는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다치신 것 같아서요.”

정○○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 때문에
다친 게 아닙니다.”

“내가
평생 안 쓰고 버텨 오던
근육이—”

그는
옆구리를 가리켰다.

“처음으로
제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준호는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언가가
가슴 깊숙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저…
진정서 써 주신다는 말
들었습니다.”

“작업장 폭력하고,
간수님들이
대충 넘기는 거에 대해서.”

정○○가
미소를 지었다.

“장부 쓰는 건
내 평생 습관입니다.”

“이번에는
숫자 대신
이름을 쓰면 됩니다.”

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밖에서
저는

잘못된 계약서에
사인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도장 찍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근데
오늘—”

그는
작게 웃었다.

“처음으로
제가 한 말이
누군가의 장부에
제대로 적히는 느낌이었습니다.”

“교도관님한테
‘신고해도 되냐’고 물을 때.”

정○○는
준호를 바라보며 느꼈다.

그래.

어쩌면
심판이란—

위에서 내려오는 칼날이 아니라,
아래에서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숫자 밖으로 꺼내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간수가
시계를 보고 말했다.

“시간 끝.”

준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문이 닫힌 뒤,
의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는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전령.”

“어디선가
보고 있습니까.”

“오늘
이 작은 선택도—”

“당신 장부에
적힐까요.”

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누군가의 펜이
조용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4. 회의실의 프레젠테이션 – 새 설계자, 오래된 냄새

도시 중심가,
유리 외벽으로 둘러싸인 고층 빌딩.

한 자산운용사의 대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이 한창이었다.

스크린에는
굵은 글씨로
이 제목이 떠 있었다.

“Post-Justice Era Impact Fund
– 정○○ 사태 이후
구조 개혁에 투자하는 새로운 기회”

발표자는
민도윤.

정장 차림의 젊은 금융인,
언론에서
“새로운 세대의 책임 있는 자본가”라고
칭송하던 인물이었다.

“우리는
이 도시가
겪은 거대한 스캔들을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그는
강단 위에서 말했다.

재편의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슬라이드에는
이런 문장들이
세련된 그래픽과 함께 떠 있었다.

  • “돌봄 인프라 재정비를 위한
    민관 합동 프로젝트”

  • “ESG 기준을 강화한
    장기 요양·의료 펀드 구성”

  • “위험 분산 구조를 통해
    투자자의 안정성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확보”

한 투자자가 물었다.

“정○○ 그룹처럼
또 다른 재앙이
터지진 않겠습니까.”

민도윤이
잔잔히 웃었다.

“우리는
그 사건을
누구보다 정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몇몇 계열사와
몇몇 이름에
집중시켰습니다.”

“우리는
책임과 소유 구조를
훨씬 더 세분화하고,
피해 가능성을—”

그는
차트를 가리켰다.

“여러 계층,
여러 계약 관계에
분산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느 한 지점에
‘정○○’ 같은
상징적 악역이
탄생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투자자가 물었다.

“그러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민도윤의 눈빛이
잠시 빛났다.

“모두가
일부씩 책임지는 구조죠.”

“누구도
모든 걸 뒤집어쓰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구조.”

“그게
바로 현대적 거버넌스입니다.”

회의실 안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누군가는
더 안전해진 구조라고 느꼈고,

누군가는
“책임이 퍼지는 만큼
사라지는 구조”를
상상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
시범 투자 의향서에
여러 사인이 올라갔다.

민도윤은
손목시계를 보며
노트북을 닫았다.

이 도시 사람들은
공포를 싫어한다.

정○○ 같은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지.

그렇다면
나는—

‘얼굴 없는 구조’를 만들어
팔면 된다.

그에게
“구조 개혁”은
진심이기도 했고,
상품이기도 했다.

그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전령이 있든 없든—”

“내 장부는
규정 안에서,
법의 언어 안에서
완벽하게 설계될 것이다.”

그 말은
혼잣말이었지만,
어딘가에서
그 문장이
다른 장부 위에
옮겨 적히고 있었다.


5. 〈성벽 안과 밖〉 1화 – 파문이 번지는 방향

밤.

언론사 온라인 편집국.

윤 서연이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고
‘발행’ 버튼을 눌렀다.

새 연재 〈성벽 안과 밖〉 1화.

제목은
예고했던 대로였다.

“정○○ 이후,
더 세련된 성벽을 설계하는 사람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정○○의 이름이
법정 판결문에 박힌 날,
도시의 다른 회의실에서는
벌써
‘그 이후의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들의
펜끝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에는
실명 대신 이니셜 처리된
몇몇 금융·정책 인물들이 등장했다.

  • “Post-Justice Era Impact Fund”라는 이름,

  • ESG를 앞세운 투자 구조,

  • 책임이 분산되는 만큼
    어느 한 지점에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사람이 사라질 위험.

댓글창은
곧 뜨거워졌다.

– “또 시작이네,
기업 때리기 기사.”
– “이제는
투자까지 죄라고 할 건가요?”
– “그래도 누가
저 구조를 분석해서 써줘야
우리가 구경이라도 하지.”
– “정○○ 하나 보내놓고
안심하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말엔
동의.”

SNS에서는
기사 링크와 함께
이런 문장들이 공유됐다.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
빈 땅만 남는 게 아니라—”

“새 성벽의 설계자들이
곧바로 모여든다는 사실.”

편집장이
서연에게 말했다.

“욕도 먹고,
인용도 많이 되네.”

“성공적인
첫 회다.”

서연은
모니터를 한참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욕을 먹든,
인용이 되든—”

“어디선가는
이 기사를 읽는 사람이
회의실 안에 섞여있을 겁니다.”

그 말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6. 내부 메일 – 또 다른 장부가 열리는 소리

늦은 밤.

민도윤의 사무실.

그는
야근을 마치고
노트북을 정리하다가
한 메일을 발견했다.

발신인: 익명.
제목: 〈성벽 안과 밖 1화 관련 내부 정보 제보〉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오늘 기사, 잘 읽었습니다.”

“당신들이 설계한 구조가
어떻게 사람들의 이름을
숫자로 바꾸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들뿐만이 아닙니다.”

“첨부한 문서는
‘리스크 분산’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해체하는
내부 회의록 일부입니다.”

“이 내용을
〈성벽 안과 밖〉 팀에 전달해 주십시오.”

메일 하단에는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저는
이 구조에서
오래 일해 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장부의 숫자로만 남고 싶지 않습니다.”

민도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첨부 파일을 열어 보았다.

내부 회의록에는
아까 자신이 말했던 표현들이
훨씬 노골적으로 적혀 있었다.

  • “소송 리스크를
    계열사·하청·재하청으로 분산”

  • “단일 책임 주체를 회피하는 계약 구조 설계”

  • “도덕적 비난은 피할 수 없으나,
    법적 책임은 최소화 가능”

민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 정도면
위험하다.

이 문장들이
그대로 기사에 나가면—

그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래도
괜찮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구조를 만드는 사람은
늘 욕을 먹는다.”

“중요한 건
구조가 작동하는지 여부지,
누가 욕을 먹느냐가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
아주 미세한 균열이
그의 마음 한쪽에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이 제보자는
왜 지금
움직인 걸까.

정○○ 사태 이후,
사람들의 장부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적당히 양심을 덜어 보려는
한 사람의 몸부림’일까.

그는
메일을
임시로 다른 폴더에 옮겼다.

아직
삭제하지는 못했다.


7. 전령의 장부 – 두 개의 선택, 두 개의 기록

어느 새벽.

도시와 교도소를
함께 내려다볼 수 있는
어딘가.

한 시온이
장부를 펼쳤다.

먼저
정○○ 페이지.

새로운 기록이
덧붙여져 있었다.

“감옥 작업장에서
약한 수용자를 위해
몸으로 개입.”

“폭행으로 인한 타박상 입음.”

“이 사건을 계기로
내부 폭력에 대한
진정서 작성 및
구조 개선 요구 움직임 발생.”

그 아래에
작게 적힌 문장.

“동기 –
순수한 속죄와
습관적인 구조 계산이
섞여 있음.”

“그러나
몸이
처음으로
피해자 편에 선 사실

부인하기 어려움.”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고,
부족하고,
결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는
펜을 들어
짧게 적었다.

“구조 설계자의 몸이
처음으로
타격을 받은 날.”

다음 페이지.

민도윤의 이름이
새로 올라와 있었다.

“민도윤 –
Post-Justice Era Impact Fund
설계자.”

“ESG와 개혁 언어를 사용하여
책임 분산 구조를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설계.”

“목표 –
‘정○○ 같은 얼굴 없는 구조’ 만들기.”

그 아래에는
오늘 도착한
익명 제보 메일 내용 일부가
요약되어 있었다.

“내부 인원 중
구조에 반감을 가진 자
등장 확인.”

“이름 없음.”

“그러나
숫자 안에 숨어 있던 사람이
스스로
‘이름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한
첫 흔적.”

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죄인이
늦게나마
자기 몸으로 개입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설계자가
더 정교한 구조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이름 없는 자가
처음으로
제보 메일이라는
작은 칼을 들었다.

그는
두 페이지를 나란히 펼쳐 놓았다.

한쪽에는
감옥 작업장의 소란,
다른 한쪽에는
회의실의 프레젠테이션.

두 장면 어디에도
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둘 다
분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피 묻지 않은 주먹.

피 냄새 나는 구조.

시온은
장부 끝 페이지에
새 제목을 적었다.

“23장 –
이름 없는 제보자,
이름을 가진 죄인들.”

그리고
작게 한 줄을 더 적었다.

“전령의 칼은
아직
칼집에 있다.”

“대신—”

“오늘은
사람들이
스스로 들기 시작한
작은 펜과 작은 용기들을
기록하기로 한다.”

장부를 덮었을 때,
도시는
느리지만 분명한 속도로
다음 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감옥 안에서는
정○○가
진정서를 다듬고 있었고,

어느 컴퓨터 앞에서는
민도윤이
제보 메일을
삭제할지 말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으며,

한 편집국에서는
〈성벽 안과 밖〉 2화를 위한
새로운 인터뷰가
잡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 위에서,
전령은
칼이 아닌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심판은
언제든
다시 칼날이 될 수 있지만,

오늘만큼은
기록의 형태로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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