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1장 – 감옥 안에서 다시 쓰이는 장부, 감옥 밖에서 다시 쌓이는 성벽

21장 – 감옥 안에서 다시 쓰이는 장부, 감옥 밖에서 다시 쌓이는 성벽

1. 첫 번째 새벽 점호 – 설계자가 줄의 끝에 선 날

정○○이
교도소 철문 안으로 들어온 지
벌써 몇 달이 흘렀다.

어느새
이른 새벽의 일정도
몸에 배어 있었다.

  • 5시 기상

  • 5시 30분 점호

  • 6시 식사

  • 작업, 교육, 점검…

새벽 점호 시간.

좁은 운동장에
같은 수의, 같은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 있었다.

정 회장은
줄의 거의 끝에 서 있었다.

감옥 안에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가
뉴스를 보고 알게 된 죄수들”과,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죄수들”이 섞여 있었다.

– “야, 쟤 그 양복 아저씨 맞지 않냐?”
– “뉴스에 나오던 그 사람?
요양원, 병원, 뭐 어쩌고…”
– “어차피 여기선
다 똑같은 수번이지.
별명은 ‘회장님’이겠지만.”

간수의 호각 소리가 울렸다.

“수용자 전원
머리 들고 정면!”

정 회장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무표정한 간수의 얼굴,
옆 줄 죄수들의 어깨.

한때
수천 명이
내 사인을 기다렸다.

이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여기서
아무도 없다.

오로지—

그는
자기 가슴에 달린
네모난 패치를 내려다봤다.

“수용자 번호 ○○○번.”

이곳에서는
성벽 설계자도,
재벌도,
회장도 아닌 이름.

숫자로 호명되는 사람.

점호가 끝난 뒤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 죄수가
정 회장 옆을 지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선
다 똑같아요, 회…
아니, 아저씨.”

“어차피
이 안에서도
따로 벽이 쌓이긴 하지만.”

정 회장이
그를 쳐다봤다.

“여기에도
성벽이 있나?”

죄수가 웃었다.

“있죠.”

“누가 말 잘 통해서
작업 좋은 데 배치되는지,
누가
간수들이랑 친한지,
누구 말이
‘민원’이 되고
누구 말이
그냥 ‘투덜거림’이 되는지.”

“여기도
장부 있습니다, 아저씨.”

“다만
그 장부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쓰던 장부보다
훨씬
엉망이고,
훨씬
비인간적일 때도 많죠.”

그 말은
정 회장의 귀에
묘하게 박혔다.

나는
평생
내 장부가
가장 잔인한 장부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이 안에도
또 다른 장부가 있단 말인가.


2. 독방의 노트 – 숫자 대신 이름을 적기 시작하다

며칠 뒤,
정 회장은
“교정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은 노트 한 권을 받았다.

표지에 적힌 문장.

“나의 삶을 돌아보는 기록 노트”

다른 죄수들은
이 노트를
대부분 대충 사용했다.

  • 시간 때우기용 낙서장,

  • 작업 시간 빼먹기용 핑계거리,

  • 혹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그냥 서랍 속에 넣어 두는 종이.

하지만
정 회장은
그 노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펼쳤다.

첫 페이지 상단에는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느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는
펜을 쥐었다가
손가락이 굳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라…

첫 회사 인수,
첫 구조조정,
첫 투자,
첫 병원 설립,
첫 요양원 인수…

도대체
어느 날을 골라야 하지.

잠시 망설이던 그는
엉뚱하게도
아주 오래전
한 장면을 떠올렸다.

신입사원 시절.

부장 책상 위에 올라 앉은
인사발령 내역.

내가 작성한 보고서 한 장 때문에
누군가가 다른 도시로 발령났던 날.

그는
노트에
천천히 적었다.

“나는
처음 사람의 운명을 바꾼 날이
출세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 사람이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
나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음 페이지 질문.

“당신의 결정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정 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많다.”

병원 복도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요양원 복도에서
밤을 버티던 간병인들,
재개발 구역에서
이삿짐을 싸던 사람들,
군부대와 공장에서
열을 맞춰 서 있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한 번도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던
자들.

그는
오래 고민하다가
몇 개의 이름을 적었다.

물론
그중 일부는
실제 이름이 아니라,
법원과 공청회에서
처음 알게 된 이름들이었다.

“장하늘 –
병원 복도에서
수치를 넘어서 죽은 아이.”

“이름 모를 네팔 청년 –
재개발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노동자.”

“밤마다
숨이 막히던 노인들 –
내 장부에는
숫자로만 적혀 있던 사람들.”

마지막으로
그는
한 이름을 적으려다
멈칫했다.

“윤상훈 – …”

펜이
노트 위에서 떨렸다.

그 사람은
나와 같은 편이었나,
아니면
내가 만들어둔 틈새를
자기 멋대로 파먹던
또 다른 포식자였나.

정 회장은
윤상훈 이름 옆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 줄을 덧붙였다.

“윤상훈 –
내가 만든 구조 틈새에서
가장 더럽게 자란 손.”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안도와 허탈감을
동시에 느꼈다.”

“정말로
우리 중 한 명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감각을
그때 처음 알았다.”

노트장을 덮으려던 순간,
철문 밖에서
간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
상담교육 시간이다.
노트 들고 나와!”

정 회장은
노트를 쥔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놓았다.

내가 평생 써 온 장부는
남의 인생을
감가상각하는 장부였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얇은 노트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감가상각해야 하는 장부일지도 모른다.


3. 교도소 안의 작은 구조 – 또 다른 성벽을 보는 눈

상담실.

철문 안쪽
작은 공간에
사회복지사와 수용자 하나가
마주 앉았다.

정 회장 앞에는
그가 작성한 노트가 펼쳐져 있었고,
사회복지사는
그 노트를 훑어보다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보통은
첫 페이지에
‘억울하다’는 말이
반쯤은 적혀 있습니다.”

“피고인께서는
비교적…
솔직하게 쓰신 편이네요.”

정 회장이
조용히 말했다.

“억울합니다.”

사회복지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까.”

“어디가
가장 억울하십니까.”

정 회장은
잠시 생각했다.

“이 도시의 모든 죄를
제가 혼자 뒤집어쓴 것 같아서.”

사회복지사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방금
말씀은—”

정 회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게 ‘형량이 과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저지른 일들만으로도
이 정도면
싸게 받은 거라고
요즘은 생각합니다.”

사회복지사가
잠시 말을 잃었다.

정 회장이
노트장을 가리켰다.

“억울하다는 것은
제 위에 더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아직 거기는
손도 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재벌,
정치인,
관료들…”

그는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가
그 위 사람들 등을 밟고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내려갈 때
먼저 떨어진다고
뭐라 할 말은 없겠지요.”

사회복지사는
노트장을 덮으며 말했다.

“교도소 안에도
작은 구조들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들,
작은 후회로 버티는 사람들,
반성하는 척하면서
나가서 뭘 할지만 계산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자기 장부를
다시 쓰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정 회장이
그를 바라봤다.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궁금합니까.”

“아니요.”

사회복지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평가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보입니다.”

“회장님은
감옥 안의 작은 구조를 보면서도—”

그가
조용히 말했다.

“여전히
‘이 안의 장부’를
먼저 계산하고 계신다는 것.”

“그 습관이
어디까지 바뀔지
저도 궁금합니다.”

정 회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쾌함과
묘한 동의가
같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이 안에서도
구조를 보고 있다.

누가 간수에게 잘 보이고,
누가 병약한 죄수를 괴롭히고,
누가 작업장에서
조금 더 따뜻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성벽’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성벽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처음으로
“감옥 안에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노트 한 페이지를
새로 열었다.


4. 감옥 밖의 회의실 – 새로운 설계자들이 펜을 든다

그 시각,
도시 한복판 고층 빌딩의 회의실.

정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에 대한
“관리·정상화 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한쪽에는
국가가 파견한 공무원 출신 관리인들,
다른 한쪽에는
외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재무·자산 운용 전문가들이
앉아 있었다.

회의실 맨 앞
스크린에는
이런 제목이 떠 있었다.

“정○○ 그룹
사후 구조 재편 방안
(초안)”

발표자는
젊은 금융전문가였다.

깔끔한 양복,
세련된 말투,
자신감 있는 눈빛.

“우리는
이번 사태를
‘부패한 1세대의 몰락’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구조를 교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첫째,
부실·비효율적인 복지·의료 계열사들을
정리하고—”

“둘째,
수익성이 높은 자산을 묶어
새로운 투자 상품으로 포장하여—”

“셋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을
전면에 내세워
글로벌 자본을 끌어오자.”

한 공무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ESG라면서
복지·의료 분야 인력 축소를
다시 검토하자는 겁니까.”

젊은 금융전문가가
잔잔히 웃었다.

“이전의 인력 축소는
너무 거칠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세련된 방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말했다.

“인력을 직접 줄이는 대신,
외주·용역 구조를 더 세분화하고,
책임 범위를 더 잘 나눠
‘관리 가능 리스크’를
퍼뜨리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느 한 지점에서
대규모 사고가 터져도—”

그는
프레젠테이션 화면 한 구석을 가리켰다.

“정○○처럼
‘중앙 설계자’ 한 명에게
모든 화살이 집중되는 구조는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회의실 안 공기가
싸늘해졌다.

국가에서 파견된 한 위원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모인 이유는—”

“다시는
그런 구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화살이 한 사람에게 가지 않게 하자’가 아니라,
‘사람이 화살을 맞지 않게 하자’가
목적입니다.”

젊은 금융전문가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시스템을 세분화하고,
리스크를 분산하고,
데이터 기반 관리 체계를 만드는 것.”

“그게
오늘날의
ESG이고,
구조 재편입니다.”

회의실 구석에서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말은 좋은데…”

“결국
또 다른 모양의
장부를 만들겠다는 건가.”

슬라이드 마지막 페이지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 이후의 시대에는—”

“누구도
‘성벽의 얼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성벽 자체가
더 세심하고,
더 튼튼한 모양으로
다시 쌓일 것이다.”

그 문장은
때로는
멋진 약속처럼 들렸고,
때로는
섬뜩한 예고처럼 들렸다.


5. “도시의 장부 – 시즌 2” – 기록의 다음 페이지

저녁,
작은 편집 회의실.

윤 서연과
몇몇 기자들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화이트보드 상단에는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도시의 장부〉 이후,
우리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편집장이 말했다.

“1심 판결까지
우리는
충분히 잘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면—”

그는
칠판을 톡톡 쳤다.

“우리가
누구보다 비판했던
‘사건형 보도’와
다를 게 없게 됩니다.”

“다음 시즌을 고민합시다.”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감옥 안을
취재하는 건 어떻습니까.”

“정○○뿐 아니라,
그와 같이 들어간
중간 관리자들,
다른 수용자들,
교도소 구조 자체를—”

서연이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 ‘감옥 안의 장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작업 배치되고,
누구 목소리가
민원으로 올라가고,
누구는
끝까지 묻히는지.”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만
정○○ 인터뷰를
너무 크게 다루진 맙시다.”

“그를
또 다른 ‘주인공’으로 만들면—”

“우리가 비판했던
‘상징 처형’ 보도와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서연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보죠.”

그녀는
화이트보드에
새 제목을 적었다.

“〈성벽 안과 밖〉”

“1편 – 감옥 안에서 다시 쓰이는 장부”
“2편 – 감옥 밖에서 다시 쌓이는 성벽”
“3편 – 새로운 설계자들, 새로운 저항들”

서연이 설명했다.

“감옥 안에서는
정○○ 같은 ‘큰 이름’뿐 아니라—”

“소소한 사건으로 들어왔지만
구조의 희생양인 사람들,
반대로
이 안에서도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같이 보여주고.”

“감옥 밖에서는
오늘 회의실에서
성벽을 다시 설계하던
사람들 이야기를 다룹시다.”

한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그 회의 내용을 알아요?”

서연이
웃음을 지었다.

“오늘
그 회의실 문 앞에
‘관계자 출입 금지’라고 적혀 있었죠.”

“하지만—”

그녀는
녹음기와 노트를 들어 보였다.

“그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
도시의 장부 시즌 1을 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미
메일이 몇 통 와 있어요.”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도시는
계속 변장하면서
같은 성벽을 세울 겁니다.”

“우리는
그 변장을
계속 벗겨내는 일을
해야죠.”

서연은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시는
전령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최소한
서로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이름들을
다시 숫자로 집어넣으려는 손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기록할 수 있다.


6. 옥상, 철책, 그리고 보이지 않는 면회 – 전령이 본 감옥

늦은 밤.

교도소 건물 옥상,
철책 너머로
도시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시온이
철책 옆에 서 있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지만,
그는
감옥 안의
모든 작은 구조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작업장에서
    몸이 약한 동료 대신
    무거운 상자를 들어주는 죄수,

  • 반대로
    약한 사람 것을 빼앗는 죄수,

  • 묵묵히 편지 한 장씩을 쓰는 사람,

  •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끝내 적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한 독방 안.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쳐 둔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정○○의 뒷모습.

시온은
철책에 손을 댔다.

감옥이라는 곳은—

인간들이
자기 죄를
숫자로 바꾸어
보관해 두는 창고이자,

가끔은
자기 장부를
다시 쓰는 사람들을
배출하는 공장이기도 하지.

정 회장 방 안으로
시온의 시선이
스며들었다.

노트 위에는
이런 문장들이
새로 적혀 있었다.

“감옥 안의 인력 배치표를 보면서
나는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누가 어디에 서야
‘효율적’인지를
따지던 나를.”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아는 계산 능력을
약한 사람들 편에 쓰는 것뿐이다.”

책상 한 켠에는
다른 수용자가 부탁한
“진정서 초안”이 놓여 있었다.

  • 간수의 폭력,

  • 의료 처치 지연,

  • 작업장 안전 문제에 대한
    작은 글.

정 회장은
그 진정서를
법률 문장으로 다듬어주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속죄인가.”

그가
종이에 적었다.

“아니면
내가 여전히
장부를 쥔 사람인 척
하고 싶은
마지막 발악인가.”

시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장부를 쥔 사람인 척해도 좋습니다.”

“다만—”

그는
철책을 스르르 지나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 회장 앞에
보이지 않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이번에는
장부의 방향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기를 바랍니다.”

정은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 하나가
그를 건드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

이번에는
수익표와 리스크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문장을 쓰는지.

시온은
장부를 펼쳐
정○○ 페이지 아래에
짧게 적었다.

“감옥 안에서의 행적 –
관찰 중.”

“작은 장부를
다시 쓰려는 시도
확인됨.”

“동기 –
혼재(속죄, 자기정당화, 습관적인 계산).”

“최종 평가는
아직 이르다.”


7. 마지막 장면 – 다시 쌓이는 성벽과, 그 앞에 선 사람들

며칠 뒤 밤.

도시 한가운데
큰 광장에서
소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 “정○○ 재판 이후
    구조 개혁 입법 촉구”

  • “돌봄·의료 인력 기준 법제화 요구”

  • “외주·용역 구조에서의 책임 회피 금지”

사람 수는
예전 공청회 때만큼 많지 않았다.

일부는
피곤했고,
일부는
“이제 좀 그만하자”는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 “재벌 하나 잡아 넣고
끝나는 거 아니잖아요!”
– “오늘 회의실에서는
벌써
새로운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구요!”
– “우리는
새로운 성벽이
어떻게 쌓이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연단 앞에서
윤 서연이
마이크를 잡았다.

“〈도시의 장부〉는
한 사람의 몰락을 그리기 위해
시작된 연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쓰고 싶었던 건—”

그녀는
광장을 둘러봤다.

“이 도시가
자기 구조에 대해
어떻게 말하기 시작하는지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정○○가 감옥에 들어갔다고 해서
구조가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후의 연재는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그녀는
준비해 온 종이를 펼쳤다.

“〈성벽 안과 밖〉 1화,
오늘 밤 온라인에 올라갈 제목은—”

“‘정○○ 이후,
더 세련된 성벽을 설계하는 사람들’입니다.”

광장 여기저기서
웃음과 탄식이 동시에 나왔다.

– “제목 쎄다…”
– “그래,
누군가는
그렇게 써야지.”

서연이
덧붙였다.

“이 시리즈는
누군가의 머리를
또다시 단두대에 올리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에 성벽을 쌓고 있는지,
누구를
성벽 밖으로 내몰고 있는지—”

“그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야—”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조금 더 크게 말했다.

“그래야
전령 말고도,
우리 스스로
누굴 심판해야 할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광장 뒤편
가로수 그늘 아래,
한 남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한 시온.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봤다.

  • 마스크를 쓴 채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

  • 피곤한 얼굴로 퇴근길에 들른 직장인,

  • 학교 과제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온 대학생들,

  • 요양원에서 퇴근해
    유니폼 그대로 나온 간병인.

내 칼날은
언젠가 또 필요하겠지.

하지만—

오늘 이 광장에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 순간은
조금 더 늦춰져도 된다.

시온은
자신의 장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맨 위에는
새로운 제목이 적혀 있었다.

“22장 – 이름 없는 설계자들,
이름 있는 저항들.”

그 아래
아직 비어 있는 줄들 사이로
희미하게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 오늘 회의실에서
    “세련된 ESG”를 외치던 금융전문가,

  • 교도소 안에서
    약한 동료를 괴롭히는 소규모 보스,

  • 동시에
    밤마다
    민원 편지를 쓰는 수용자,

  • 광장에서
    무대가 끝난 뒤
    쓰레기를 줍고 있는 젊은 자원봉사자.

시온은
짧게 적었다.

“성벽은
늘 다시 쌓인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성벽을 허무는 이들 역시
늘 다시 태어난다.”

장부를 덮으며
그는 속삭였다.

“내 역할은
그 둘 사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까지
지켜보는 것.”

“칼을 휘두를지,
장부만 넘길지—”

“그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것.”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집으로 돌아가
아이 숙제를 봐 줄 것이고,

어떤 이는
야간 근무지로 향할 것이고,

어떤 이는
내일 아침
교도소로
면회를 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오늘 밤 올라올
새 연재를 읽으며
생각할 것이다.

우리 도시의 성벽은
지금
어디에 쌓이고 있는가.

전령은
그 생각들이
이 도시 공기 곳곳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도시는
이제
심판을
오로지 전령에게만
맡기지 않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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