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16장 – 장부를 쥔 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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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 장부를 쥔 자의 얼굴
1. ‘도시의 기둥’이라고 믿는 남자
정 회장이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새벽 다섯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침실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정리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벗어둔 셔츠는
이미 사라지고,
새로 다려진 셔츠와 넥타이가
옷장 안에 줄지어 서 있었다.
호텔 같은 집,
집 같은 호텔.
그는
바깥 풍경을 한 번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커튼을 열지 않았다.
대신
벽면 TV를 켰다.
음성은 끄고
자막만 켜 둔 채
뉴스 채널을 넘겼다.
-
“노 영학 1심 첫 공판, 피해자 증인 잇따라 출석”
-
“군 가혹행위·요양원 학대, 구조적 책임 어디까지?”
-
“괴담인가, 구조의 그림자인가 – ‘도시의 전령’ 논쟁”
제목 하나하나가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는 않았지만,
어떤 제목은
분명히
그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조적 책임 어디까지?”
정 회장은
미간을 한 번 주름 잡았다.
‘어디까지’라…
사람들은 늘
구조라는 말을
참 편하게도 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한 단어로 묶어놓고
그 안에
자기 책임까지 다 던져 넣으니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인생 대부분을
숫자와 표,
지도와 그래프로 살아온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정 회장에게
도시는
먼저
지도로 보였다.
-
재개발 구역 경계선,
-
병원과 요양원 네트워크,
-
도로망과 물류센터 위치,
-
인구 분포와 소비 패턴.
그 위에
마지막에 올라가는 것이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나는
이 도시의 기둥이다.
누군가 허름한 건물에서
떨어져 죽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는
오래된 골목을 부숴야 한다.
누군가 병원 침대에서
오래 버티게 하려면,
누군가는
의료비와 행정비를
냉정하게 잘라야 한다.
누군가는
숫자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는
언젠가
노 영학이 한 말이 떠올랐다.
– “회장님,
결국
장부를 쥔 사람이
진짜 권력입니다.”
그때 정 회장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 “장부를 쥔 사람은
진짜 권력이 아니라,
필요한 악일 뿐이야.”
– “왕은
얼굴을 내놓고 욕을 먹는다.”
– “우리는
숫자 뒤에 숨어서
욕을 대신 먹어주는 놈들이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정 회장은
오늘의 회의를 준비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 장의 표가 떠 있었다.
-
열(column): 재개발, 의료, 돌봄, 언론
-
행(row): 리스크, 비용, 방어 전략
그리고
마지막 한 줄.
-
“전령 괴담 – 활용 가능성 / 리스크”
2. 지도 위의 선들이 한 장의 그림으로
같은 시각,
도심의 한 허름한 빌딩 6층.
윤 서연과
변호사 한 지우,
그리고 몇몇 데이터 분석가들이
잠을 거의 못 잔 얼굴로
모니터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벽에는
프린트된 도표와 지도,
연결선이 얽힌 종이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
“재개발 구역 – 정 그룹 계열 건설사 수주 비율”
-
“요양원·병원 – 같은 펀드·법인 소속 기관 목록”
-
“지역 언론 – 정 그룹 광고·협찬 비중 정리”
-
“정치인 후원 내역 – 노 영학 및 여타 인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원으로 묶어 주는 이름.
“정○○ 회장.”
데이터 분석가 하나가
커서를 움직이며 말했다.
“지도형 인터랙티브 그래프,
거의 다 붙였습니다.”
“독자가
재개발 구역을 클릭하면
관련된 건설사,
병원,
요양원,
정치인 후원 내역까지
연쇄적으로 뜨게 했습니다.”
모니터 속 도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항공사진 위를 가로지르는
도로와 강,
고층 건물들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얽힌
법인 이름과
자금 흐름,
인허가 서류들이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한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으로
‘범죄 조직’이라고까지는
말 못 합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이 연결 구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특히
병원·요양원과
재개발 구역 사이에
공통 펀드와 법인이 있다는 부분.”
윤 서연이
원고의 첫 문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도시의 장부 8편 –
이름 없는 성벽의 설계자〉”
“이 도시는
늘
눈에 잘 띄는 얼굴들만 욕해 왔다.”
“선거철 광고판에 걸린 정치인,
사건이 터지면 사과하는 병원장,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며 고개 숙이는 원장들.”
“그러나
우리가 조사한 장부 속에는,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지도 위에
아무 표식도 없는 곳에서,
도시 전체의 장부를 설계해 온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회계장’**이라 부른다.”
서연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이 기사 한 편으로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이 도시의 악이
어느 얼굴을 하고 있는지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보게 된다.
한 지우가 물었다.
“준비됐습니까.”
“이거
나가면
우리의 삶도
조금은 바뀔 겁니다.”
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시의 장부 8편〉,
9편까지
동시에 올려요.”
“8편은
구조 전체의 지도를,
9편은
실제 피해 사례들과
그 구조를 연결하는 기사로.”
한 지우가
게시 버튼 앞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업로드합니다.”
클릭.
잠시 후,
서버 로그 화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접속자 수,
-
공유 수,
-
댓글 알림 숫자가
살벌한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도시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장의 지도를
처음으로 함께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3. 성벽 안 회의 – 처음으로 이름이 가운데 온 날
정 회장의 비서실은
늘처럼
사전에 정해진 순서대로
자료를 올리고 있었다.
-
오전 9시 경제지 헤드라인,
-
주요 증시 동향,
-
재개발 현황 보고,
-
의료·돌봄 계열사 이슈.
그러나
오늘 보고서 첫 페이지는
원래와 달랐다.
“긴급 브리핑 –
〈도시의 장부〉 8·9편 보도 관련.”
비서실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회장님,
이건…
그냥 블로그 수준이 아닙니다.”
“대형 언론사에서
자체 프로젝트로 낸
장기 탐사 기획입니다.”
정 회장이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화면을 내리자
익숙한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다.
-
그가 옛날에 인수했던
한 중견 건설사의 이름. -
한 펀드를 통해 지배해 온
요양원 운영 법인의 다단 구조. -
직접 계열사로 삼지 않고
지분만 쥐고 있던 의료 네트워크.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을
한 번에 묶어주는 제목.
“이 도시에
진짜 성벽을 쌓아 온 사람은
누구인가.”
슬라이드를 넘기자
한 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 도시의 재개발,
의료, 돌봄, 언론 구조를
2년 간 추적한 끝에—”
“지도를 여러 번 겹쳐볼수록
한 이름에 도달했다.”
“정○○.”
정 회장의 이름은
언젠가부터
경제지와 재계 기사에서
늘 등장하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지도 가운데’**에 적힌 적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유력 재계 인사”라거나,
“정계·재계의 가교 역할” 정도로
흘려 쓰였다.
이번 기사는
그의 이름을
선명한 중심에 놓고 있었다.
“이 도시는
늘
‘왕’들의 얼굴만 보았다.”
“우리는
그 왕들 뒤에서
장부를 쥐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기록하려 한다.”
비서실이
침묵했다.
재개발 담당 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법적 대응을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명예훼손,
허위 사실 적시 가능성…”
정 회장이
손을 들었다.
“아니.”
그가 말했다.
“이건
무식하게
‘허위’라고만 밀어붙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그래프 몇 개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자료의 출처,
상당 부분이
공개된 장부야.”
“등기부,
공시자료,
정치자금 내역,
행정 문서.”
“우리가
정식으로 신고하고
공시했던 것들.”
비서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정 회장은
태블릿을 탁 내려놓았다.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의 조합일수록
더 위험하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아, 이게 다 합쳐지면
이런 그림이 되는구나’라고
이해하기 시작하니까.”
“그게
장부의 무서운 점이지.”
비서실장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킹메이커였다.”
“왕은
얼굴이 보이는 자리에서
욕을 먹고,
우리는
숫자를 맞추는 자리에서
욕을 대신 먹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
‘킹메이커가
진짜 왕’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거다.”
그는
조용히 웃었다.
“좋지 않군.”
“왕은
단두대에 올라가는 법이니까.”
회의실이
잠시 얼어붙었다.
정 회장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요양원, 병원, 재개발 피해자들의 인터뷰가
짧게 인용되어 있었다.
– “우리는
얼굴 없는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 “호명할 이름이 없었다면
분노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
– “이제야
우리의 분노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조금 보입니다.”
정 회장은
창밖을 처음으로 올려다봤다.
저 멀리
법원 건물이 보였다.
저기서는
아직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은
이미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하게도
분노보다
불편한 자각을 먼저 느꼈다.
이제
나는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 앞에 얼굴을 드러낸 사람이 된다.
장부를 쥔 손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순간이다.
4. 거리의 대화 – 처음으로 구조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
〈도시의 장부〉 8·9편은
게시된 지
몇 시간 만에
SNS와 포털 메인 화면을
점령했다.
카페,
지하철,
회사 휴게실,
학교 복도마다
비슷한 문장이 오갔다.
“야,
이거 봤어?”
“이 도시 재개발,
병원, 요양원, 언론까지
다 같은 계열이네.”
“정○○…
이름은 들어봤지?”
“뉴스에 맨날 나오는 사람 말고,
진짜 뒤에 있던 사람이었네.”
재개발 구역에서
밀려났던 노인이
문 앞 벤치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물었다.
“뭐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노인이 손짓했다.
“와서
이거 좀 봐.”
“우리가 살던 구역이
여기야.”
그는
지도 위
파란 선과 빨간 선을
가리켰다.
“우리가
처음 설명 들었던 선,
이 파란 선이었잖아.”
“근데
나중에 결정난 선은
이 빨간 선.”
“보지,
우리 블록만
쏙 빠졌지?”
아주머니가
눈을 좁혔다.
“어머…
진짜 그러네.”
노인이
화면을 넘겼다.
“여기 봐.”
“우리 구역 빼고
재개발 된 데에
들어간 건설사가
다
한 그룹이야.”
“병원도,
요양원도,
다 이어져 있대.”
아주머니가
숨을 들이켰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사람들 이름이
이제야
나온 거네요.”
“지금까지는
그냥
‘시청’이랑,
‘건설사’랑
싸운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야간 교대를 마치고 나온 간호사는
동료와 편의점 앞에 서 있었다.
동료가 말했다.
“봤어?”
“우리 병원 이름도
나왔더라.”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봐 버렸어.”
“우리가
감염관리 때문에
몇 번이나
‘인력 늘려 달라’고 했을 때—”
“병원장이
맨날 하던 말 기억나?”
“ ‘윗선에서
예산 안 나온다’고.”
동료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는 있었지.”
“윗선이라면서
구체적인 이름은
한 번도 안 말해 줬잖아.”
“오늘 기사 보고 나서야
그 윗선이
어느 그룹인지
알겠네.”
간호사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봤다.
“재개발,
요양원,
병원,
언론…”
“사람들이
죽고,
쫓겨나고,
방치되는 곳마다
같은 이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거잖아.”
“이제
환자 보호자들이
‘우릴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적어도
의사와 간호사 이름만
가리키지는 않아도 되겠네.”
군부대 인근 PC방,
휴가 나온 병사 둘이
같은 기사를 보고 있었다.
“봐라,
전령보다
더 무서운 놈들 있다니까.”
한 병사가 말했다.
“우리가
생활관에서
서로 밟고 있을 때—”
“먼 데서는
우리 생활관 전체를
숫자로 담은 장부 들고
웃고 있던 거지.”
다른 병사가
모니터를 노려봤다.
“전령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기사 보면
최소한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좀 보인다.”
도시는
처음으로
“나쁜 놈”을
막연한 괴담 속 전령이 아니라,
장부를 쥔 얼굴로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5. 밤의 사무실 – 전령과 회계장이 마주 앉은 시간
그날 밤,
정 회장은
평소보다 늦게
집무실 불을 껐다.
임원들은
이미 모두 돌아갔고,
야근하던 직원들도
하나둘 퇴근하고 있었다.
도시 야경이
유리창에 비쳤다.
그는
홀로 남은 회의실에서
벽면 스크린을 켰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관리해 온
“통합 리스크 관리 시스템”.
재개발,
의료·돌봄,
언론,
정치 후원,
각종 로비 비용까지
숫자로 요약해 넣은 대시보드였다.
대시보드 한가운데,
오늘 처음으로 추가된 항목이 있었다.
“미디어 리스크:
〈도시의 장부〉 8·9편”
옅은 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사람들이
이제야
이걸 보기 시작했구나.”
“나는
이 그림을
삼십 년 동안
보고 있었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그래프를 넘겼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숫자로 바뀌어 있었다.
-
“재개발 구역 A –
세대 수 482,
평균 보상액,
이주 완료율,
자살·사망 등 특이사항.” -
“요양원 B –
수용 인원,
정부 지원금,
인력 충원 비율,
민원·사고 발생 건수.” -
“병원 C –
병상 수,
인력 대비 환자비율,
사망률,
소송 리스크 지수.”
정 회장은
화면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누군가는
이 숫자들 덕분에
도시가 돌아간다고 말할 거고,
누군가는
이 숫자들 때문에
도시가 썩었다고 말하겠지.”
“나는
그 둘 사이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 순간이었다.
모니터 화면이
갑자기
눈부시게 흰색으로 번쩍였다.
시스템 오류 알림도,
전원 문제 경고도 없이
그냥
하얀 바탕만 남았다.
정 회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장난이지.”
그가 중얼거리는 찰나,
흰 화면 위에
검은 글씨가
하나씩
쓰기 시작됐다.
“장부를 쥔 자에게.”
정 회장은
숨을 멈췄다.
컴퓨터 해킹이라고 치기엔
너무
단순하고
너무
조용한 글씨였다.
“누구냐.”
그가 낮게 물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직접 불러주는군요.”
정 회장이
천천히 돌아섰다.
회의실 끝,
어둠과 빛이 겹치는 문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
한 시온.
정 회장은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당신이…”
그가 말했다.
“…그 전령인가.”
시온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르더군요.”
“저는
그냥
장부를 정리하라고 파견된 사무원일 뿐인데.”
정 회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래서
이 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죽었나.”
“법도
제도도
증거도
못 찾는 죽음들.”
“당신이
다 했다는 거냐.”
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이
조금 다릅니다.”
“제가
‘사람들을 죽였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를
먼저 묻는 편이
순서 아닐까요.”
정 회장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나는
이 도시를
유지해 온 사람이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지 않게
경계선을 긋고,
돈이 돌게 만들고,
건물이 올라가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피와 눈물을 보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그래도
이 도시가
무너지지 않게
숫자를 맞춰야 했다.”
“나는
그 일을 했을 뿐이다.”
시온이
천천히 다가왔다.
“왕들은
늘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백성을 위해
피를 묻혔다’고.”
“그런데
당신은 왕이 아닙니다.”
“당신은
장부를 쥔 자입니다.”
정 회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
시온은
정 회장을
곧게 바라봤다.
“이 도시에선
왕들이 단두대에 오르는 시대는
이미 한 번 지나갔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몇 정치인이 잘려 나갔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장부를 새로 쥔 사람들은
한 번도
단두대에 오르지 않았죠.”
정 회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시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제
이 도시는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괴담을 욕하기 전에,
장부를 본다는 것.”
“왕의 얼굴 대신,
회계장의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
“오늘
당신 이름이
그 장부에
처음으로
가운데에 적혔습니다.”
정 회장은
웃었다.
“그래서
날 죽이러 왔다는 건가.”
“여기서
나를 쓰러뜨리면—”
“사람들은
‘전령이 또 한 건 했구나’라고
말하겠지.”
“그리고
세상은
또다시
괴담에만 매달릴 거야.”
“이번엔
내 이름이
그 괴담의 양념이 되겠지.”
시온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정 회장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뭐라고?”
“전령이라는 이름을 쥔 자가
이렇게 가까이 와서
날 살려 보내겠다고?”
시온이 말했다.
“심판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장부가
어디까지
당신을 따라오는지
보겠습니다.”
“법정,
기사,
조사,
시민들의 입에서—”
“당신 이름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불리는지.”
정 회장이
비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은
금방 잊는다.”
“오늘은
내 이름을 욕하겠지.”
“그러나
집값이 오르고,
병원 대기 시간이 줄어들면—”
“내일은
또 다른 이름을 욕할 거다.”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 도시는
이제
괴담을 믿는 도시가 아니라,
기사를 스크랩하고
장부를 공유하는 도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적힌 이름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회의실 천장 조명이
살짝 흔들렸다.
모니터 화면에
다시 글씨가 떠올랐다.
“장부를 쥔 자에게 –
단두대는
인간이 먼저 세운다.”
정 회장이
천천히 그 문장을 읽었다.
“…그렇다면
너는?”
시온이
책을 들어 보였다.
“나는
그 단두대 위에
마지막 줄을 쓰는 사람입니다.”
“목이 떨어지기 전에
어느 장부가
어느 이름을 적었는지,
그 모든 과정을
기입하는 사람.”
정 회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날 죽이러 올 건가.”
시온이
담담히 답했다.
“아마도.”
“다만
그때가
오늘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
“오늘은
예고편입니다, 회장님.”
“이 도시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이 아니라
회계장이 단두대에 오르게 될
그 날의.”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창문이
가볍게 떨렸다.
정 회장이 다시 모니터를 보았을 때,
흰 화면 위 글씨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원래의 숫자와 그래프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숫자들은
평소처럼
차분하게 정렬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는
그 숫자들 사이에
자신의 이름 한 줄이
언제든 삽입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6. 옥상과 장부 – 단두대가 세워지는 소리
도시의 한 옥상.
한 시온은
바람을 맞으며
장부를 펼쳤다.
정 회장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가만히 펼쳐놓고
붉은 펜을 들었다.
“정○○ –
수십 년간
도시의 재개발, 의료, 돌봄, 언론 구조를
장부로 설계한 자.”
“숫자로
생과 사,
이주와 잔류,
치료와 방치를
결정해 온 자.”
그 옆에
새 줄이 추가됐다.
“202X년 X월 X일 –
〈도시의 장부〉 8·9편을 통해
도시의 장부 위에
처음으로 얼굴 전체가 적힌 날.”
그는
잠시 펜을 멈추고
도시를 내려다봤다.
어딘가에서는
시민 모임이
긴급 회의를 열고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젊은 변호사들이
정 회장을 상대로 한
집단 소송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었으며,
어딘가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학교 토론 시간에
처음으로
“구조적 폭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단두대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온이
중얼거렸다.
“도시의 입들이
조금씩
나무판자를 모으고,
도르래를 만들고,
줄을 매고—”
“그렇게
먼저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것.”
그는
장부 한 구석에
굵게 적었다.
“이 도시에선
드디어
왕이 아닌
회계장이
단두대에 오른다.”
“그 날이
언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오늘은
그 날을 가능하게 만드는
첫 번째 장이
사람들 손으로 쓰여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장부를 덮으며
그는 생각했다.
심판은
칼날로만 오지 않는다.
기사로도 오고,
판결문으로도 오고,
사람들 입의 습관으로도 온다.
어쩌면
내가 쓰는 이 장부는
언젠가
그 모든 기록 중
가장 하찮은 부록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이 도시에게는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 시온은
장부를 다시 열었다.
다음 페이지 맨 위에는
이미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 –
심판 예정.”
그 아래,
조그맣게
이렇게 써 넣었다.
“인간의 장부 –
경과 관찰 중.”
“전령의 장부 –
붉은 줄 준비 완료.”
도시는
또 한 번
밤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밤은
어제와 같은 듯 보였지만,
어느 한 곳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목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의 목을 받치게 될
단두대의 바닥을 이루기 위한 나무판들이.
그리고
그 첫 장에는
이미
도시 사람들의 손글씨로
이름 하나가 쓰여 있었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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