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15장 – 말이 기록으로 바뀌는 시간

15장 – 말이 기록으로 바뀌는 시간

1. 목소리들이 같은 문장 안으로 들어오는 곳

○○지방법원 302호 대법정.

법정 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잡이를 잡아당길 때마다
쇠와 목재의 마찰음이
짧은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원고석과 피고석,
방청석과 증인석,
기자석과 경위석이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자의 위치에는
각자의 역할이 붙어 있었다.

  • 말할 수 있는 자리,

  • 말할 수 없는 자리,

  • 대신 말해 주는 자리,

  • 말이 기록으로 바뀌는 자리.

법정 벽에는
국기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 판사석 위에는
국장이 걸려 있었다.

시간은
아직 시작 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장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된 것처럼 뛰고 있었다.

피해자석 가까운 곳에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
재개발 구역에서 집을 잃은 노인,
군 가혹행위를 제보한 젊은 남자가
각자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 손에는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 진단서,

  • 사망진단서,

  • 민원 제기 기록,

  • 재개발 결정 통보서,

  • 인권상담 기록서.

그 서류들은
지금까지
수없이도 무시당했던 종이들이었다.

오늘만큼은
그 종이들이
이 법정 안에서만큼은
**“증거”**라는 이름으로
호명될 예정이었다.

한쪽,
피고인석 뒤에는
국회의원 노 영학
옅게 굽은 어깨로 앉아 있었다.

수트는 여전히 잘 맞았고,
타이는 제대로 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옷이
더 이상 ‘의원’의 옷이 아니라
‘피고인’의 옷이라는 점만
달라져 있었다.

그 앞에는 변호인석.
한 중견 변호사가
두꺼운 공판 준비서면을 정리하며
노 영학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
오늘은
최대한 짧게 말씀하시는 게 좋습니다.”

“입장 표명은
준비한 대로만.”

노 영학은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묶음을
슬쩍 내려다봤다.

겉장에는
볼펜 글씨로
작게 적혀 있었다.

“나의 변명과 고백 사이”

그는
그 종이를
잠시 손으로 덮었다.

오늘
저 종이의 문장 중
몇 개나
이 법정에서
살아남을까.

몇 개는
찢기고,
몇 개는
외면당하고,

몇 개는
언젠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다른 문장으로
다시 살아날까.

기자석 뒤쪽에서
윤 서연이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의 펜 끝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은
말이 먼저 기록되고,
그 다음에
기사가 쓰일 것이다.

나는
이미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판결문을 베끼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첫 문장이 쓰이는 걸
보고 옮겨 적는 사람이다.

법정 천장 위,
카메라로는 닿지 않는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난간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
두꺼운 책 한 권.

한 시온.

그는
법정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인간들이
자기 장부를 들고 들어오는 곳.

누군가는
법전을 들고,

누군가는
판례집을 들고,

누군가는
민원서류와 진단서를 들고,

누군가는
빈손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오늘 여기서 나온 말들은
내 장부에도
새 줄로 적히게 된다.

경위의 목소리가
법정 안에 울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2. 재판의 골격 – 이름과 사건번호, 그리고 ‘아닙니다’라는 단어

문이 열리고,
재판부가 입장했다.

재판장 백도훈 부장판사,
배석판사 둘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백도훈은
잠시 방청석과 피고인석을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피곤함은
습관처럼 깊이 묻어두고 있었다.

그에게
사건은
‘오늘 처음 접하는 비상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같이 올라오는
무수한 사건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이 사건이
다른 사건들보다
더 많은 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만이
이 날만의 차이점이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사건번호 ○○-○○,
피고인 노 영학 외 ○인에 대한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법정 서기가
피고인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피고인
노 영학.”

피고인석에서
노 영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성명,
주민등록번호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차분히 말했다.
여전히
정치인의 발음,
정치인의 억양으로.

서기가 확인한 뒤,
백도훈이 물었다.

“피고인,
기소된 내용에 대해
대체로
인정하십니까.”

짧은 정적.

변호인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 영학이
입을 열었다.

“…일부
사실관계는 인정합니다.”

“다만,
상당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의 해석과
제 의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변호인과 함께
공판 과정에서
밝히겠습니다.”

백도훈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검사는
공소사실 요지를
진술해 주십시오.”


3. 검사의 말 – 괴담보다 두꺼운 서류 묶음

주임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앞에 놓인
두꺼운 공소장 묶음을
한 번 가볍게 쳤다.

“검사 ○○○입니다.”

그가 말했다.

“본 사건의 공소사실은
네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피고인 노 영학은
수 차례에 걸쳐
정 모 회장 등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였습니다.”

슬라이드에는
계좌 거래 내역과
현금 전달 정황 자료가
간단한 도식과 함께 표시되었다.

“둘째,
재개발 구역 지정 및 인허가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과 공모하여
특정 구역을 의도적으로 편입·배제함으로써
주민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화면에는
지도 위에
빨간 선과 파란 선이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빨간 선은
공식 발표된 재개발 구역,
파란 선은
처음 주민 설명회에서
약속되었던 구역.

“셋째,
이른바 ‘도시의 전령’ 괴담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피고인은
정 회장 등과 함께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회의
수 차례 주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령 괴담을
‘정치적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방안,
특정 병원의 사망 사건을
‘괴담 탓’으로 돌리는 방안,
군대 내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는
USB 녹취록의 일부를 읽었다.

– “전령이 있든 없든
중요한 건
누가 전령이라고 불리느냐입니다.”

– “우리가 물어뜯기지 않게만
방향만 바꾸면 됩니다.”

검사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본 검찰은
전령의 실존 여부나
괴담의 진위를
재판부에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피고인이
괴담을 이용해
권력과 돈을 지키려 했는지

여부입니다.”

방청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윤 서연은
그 문장을
굵은 글씨로 노트에 적었다.

“검찰:
‘전령의 실존 여부가 아니라,
전령을 이용한 권력과 돈의 움직임’.”

이 문장은
오늘 기사 제목의
한 축이 되겠지.

주임검사는
공소사실의 마지막 축으로 넘어갔다.

“넷째,
위와 같은 수사가 진행되던 중,
피고인 측 보좌진은
피고인과 공모하여
**‘가짜 전령 공격’**을
연출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여
특정 메시지가 적힌 협박 봉투를 전달케 하고,
이를
‘전령 극단 팬의 과격한 행위’로 포장해,
언론에 유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슬라이드에
메신저 대화 캡처가 떠올랐다.

– “메시지는
이대로 적어 주세요.”
– “ ‘너의 이름도 이미 여기 있다, 정치인.’ ”
– “전령이 분노했다는 식으로.”

검사가 덧붙였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장난이나
정치적 표현의 범위를 넘어서,
명백히
수사와 사법 절차를 왜곡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는
공소장을 덮었다.

“이상입니다.”


4. 변호인의 말 – 책임을 줄이고, 구조 뒤로 숨으려는 입장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미리 준비한 서면을 펼쳤다.

“피고인 측 변호인
○○○ 변호사입니다.”

그가 말했다.

“피고인 노 영학은
정치활동 과정에서
일부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음을
인정
하고 있습니다.”

잠깐
시선이 노 영학 쪽으로 쏠렸다.

변호인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다만,
검찰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모든 책임을 피고인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
합니다.”

“정치자금 수수 문제의 상당 부분은
당시
관행과 시스템의 문제였으며,
재개발 과정에서도
피고인은
‘정책 결정자’로서
다수 보고와 검토를 바탕으로
판단했을 뿐,
개별 주민에게
직접적인 악의를 가진 바는
없습니다.”

“이른바 ‘전령’ 관련 회의 또한,
당시 사회적 혼란 상황에서
공포심을 진정시키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취지
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특정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악의적 기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짜 전령 공격 연출 부분에 이르러
조금 더 신중한 어조를 택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가짜 전령 공격’ 혐의에 대해서는—”

“피고인은
보좌진이
**‘과도한 정치적 퍼포먼스’**를
준비했다는 사실까지는
보고받았으나,
구체적인 문구나 방식에 대해서는
직접 지시한 바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 부분은
향후 증인 신문과 증거 조사 과정을 통해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질 것입니다.”

그는
서면을 접으며 덧붙였다.

“피고인은
자신의 정치 인생 전반을 돌아보며
일부 잘못과 부족함에 대해
깊이 반성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한 사람을
‘도시의 모든 악을 뒤집어쓴 상징’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판부께서는
감정과 여론의 파도 속에서도
법과 증거에 따른
신중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그의 말은
매끄러웠다.

그러나
방청석 일부에서는
참을 수 없는 비웃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병원 피해자 아버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악의를 가진 바는 없다.’

그 한 줄이
내 아이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악의가 없으면
책임도 없는 건가.


5. 피해자의 목소리 – 한 줄짜리 진단서 뒤에 있던 시간들

증인석에
첫 증인이 들어왔다.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
이름 장민수.

맞은편 증인석에 서자,
경위가 성명과 주소를 확인했다.

판사가 물었다.

“증인은
피고인과
어떤 관계입니까.”

장민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답했다.

“없었습니다.”

“저는
피고인의 이름을
뉴스에서만 봤습니다.

“제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법정 안 공기가
한순간에
다른 밀도로 바뀌었다.

검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증인,
아이의 이름과,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민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제 아들 이름은
장하늘입니다.”

“일곱 살이었고,
평소에
감기 말고는
큰 병 한 번 없었습니다.”

“어느 날
고열과 구토가 있어
응급실에 갔습니다.”

그는
천장을 잠시 올려다봤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응급실에서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제 아내와 저는
몇 번이나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언제쯤
진료를 받을 수 있냐고.”

“그때마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법정 스크린에는
그날의 CCTV 일부가
음소거 상태로 재생됐다.

복도에 앉아 있는 부부,
아이가 점점 늘어지는 모습,
그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의료진들.

장민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이의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늘아,
하늘아.”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그런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 아이의 죽음을
완성한 건,
이 종이 위
한 줄짜리 진단서 문장이었습니다.”

화면에
사망진단서가 확대되어 떴다.

“직접 사인:
패혈성 쇼크.”

“사망의 종류:
질병사.”

그는
종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행정과 장부 속에서
제 아이는
그냥
‘질병으로 죽은 아이’가 되었습니다.”

“인력 부족,
병상 부족,
담당의 부재,
병원 경영진의 인력 감축—”

“이런 것들은
이 종이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증인은
이 사건 재판에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장민수가
피고인석 쪽을 바라봤다.

“저는
피고인이
악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도시에는
저보다 더 많은
악인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제 아이를 죽인 시스템을
숫자로만 보고,
비용으로만 보고,
여론 대응의 도구로 본 사람들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줄입니다.”

“제 아이의 이름이,
누군가의 장부 속에서
더 이상 숫자로만 남지 않게 해 주십시오.

법정은
조용했다.

판사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변호인이
야심차게 예정해 두었던
“사인과 정치 책임의 인과관계”를 묻는 질문은
차마
바로 꺼내지 못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증인,
피고인이 참석한 회의에서
증인 자녀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들으신 적은 있으십니까.”

장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들은 적은
없습니다.”

“제가 본 건
뉴스였습니다.”

“제 아이가 죽고
몇 달 뒤,
피고인과 관련된 회의 녹취 일부가
언론에 나왔습니다.”

검사가
화면에 녹취록 일부를 띄웠다.

– “병원 쪽은
‘시스템의 한계’라고 주장하게 하고,
우리 쪽에서는
‘괴담에 휘둘리지 말자’는 메시지로 받죠.”
– “애 하나 죽은 걸로
도시 전체가 흔들리는 건
막아야 합니다.”

장민수는
그 문장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말을 듣고,
저는
피고인의 얼굴과
제 아이의 얼굴을
같이 떠올렸습니다.”

“제 아이의 이름은
그 사람들에게
‘애 하나’였습니다.”

“이 재판이
그 표현을
다른 문장으로 바꾸게 만들 수 있다면,
저는
증인으로 나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판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6. 또 다른 증언 – 군대, 생활관, 그리고 작은 반항

두 번째 증인은
군 가혹행위를 제보했던
전 일병,
이름 박진우.

그는
군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증인석에 섰다.

검사가 물었다.

“증인,
군 복무 중
어떤 일을 겪으셨습니까.”

박진우는
두 손을 맞잡았다.

“처음에는
‘원래 군대란 그런 곳이다’
라는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선임이 시키면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맞아도
소리 내지 않는 게
강한 거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다
한 선임이
생활관에서
다른 후임을
심하게 밟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바닥에 엎드린 후임의 등을
발로 밟고,
손을 비틀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 선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야,
너 전령 믿냐.’ ”

“ ‘지금 너를 밟는 나는,
이 생활관의 전령이다.’ ”

방청석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박진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전령이라는 존재보다도,
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입에 올리는 사람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 ‘이 생활관의 전령’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령이 실제로 있든 없든,
이 생활관에서는
그 선임이
전령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 후,
증인은
인권 설문지에
체크를 하셨죠.”

“예.”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종이 한 장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인권상담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통화한 그날 밤,
선임은
야간 행군 중
사고를 당했습니다.”

법정이
잠깐 술렁였다.

변호인이
곧바로 일어났다.

“재판장님,
증인의 발언은
피고인의 책임과
직접 관련 없는
우연한 사고를
전령 괴담과 연관시키려는
인상을 줄 우려
가 있습니다.”

판사가
손을 들었다.

“검사는
질문을
적절히 조정해 주십시오.”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판장님.”

그가 말했다.

“증인,
그 사고가
전령이라는 존재와
관련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박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저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제보를 하기 전과 후,
제 생활관은
달라졌습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전령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쓰고 있지만—”

그는
피고인석 쪽을 바라봤다.

“저를 이 자리에
증인으로 세운 사람들은,
전령이 아니라
이 도시의 제도입니다.”

“그 제도를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거나
죽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것을
오늘
이 법정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증인.”


7. 밖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연출, 그리고 꺾이는 문장

점심 휴정 시간.

법원 앞 계단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쪽에서는
시민단체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고,

“도시의 미해결 피해자들에게
정의를!”

다른 쪽에서는
소수의 지지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정치 보복 중단하라!”
“괴담 조작 수사 중단!”

카메라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좋은 장면을 찾고 있었다.

언론사 임원과
전에 카페에서
노 영학을 만났던
유명 칼럼니스트가
멀찍이서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럼니스트가 말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안 좋네요.”

언론사 임원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톤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여론은
언제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톱 기사에서
‘전령 미신에 휘둘린 재판’이라는
관점을 조금만 섞어 넣으면—”

그때,
기자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윤 서연이었다.

“선배님.”

그녀가
칼럼니스트를 불렀다.

“오늘
어떤 칼럼 쓰실 겁니까.”

칼럼니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재판이
‘괴담과 감정에 휘둘린 재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용 정도?”

“요즘
사람들,
너무
감정에 약하잖아요.”

윤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노트를 한 장 꺼냈다.

거기에는
그가 예전에 썼던 칼럼 일부가
프린트되어 붙어 있었다.

– “도시의 전령이라는 괴담은
결국
이 도시가
숨겨온 장부를
억지로 꺼내들게 만든다.”
– “괴담을 탓하기 전에,
누가
어떤 장부를
오래 숨겨왔는지
먼저 보아야 한다.”

칼럼니스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건
예전에
내가 쓴 글이네요.”

서연이 말했다.

“네, 선배님.”

“그때 선배님은
‘전령 괴담이
도시의 숨겨진 장부를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그 장부 중 일부가
지금
검찰과 법원,
그리고
저희 손에도 있습니다.”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성벽_내부_장부’라는 이름의
파일,
기억하시나요.”

칼럼니스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언론사 임원이
표정을 관리하느라
입술을 다물었다.

윤 서연이
조용히 덧붙였다.

“오늘 선배님이
어떤 칼럼을 쓰시든
그건 선배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 도시 사람들은
이제
칼럼 한 편으로
쉽게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장부의 일부를

기사와 보고서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누가
어느 날은
‘장부를 공개하라’고 쓰고,
어느 날은
‘괴담에 휘둘리지 말라’고 쓰는지—”

“사람들은
두 글을
함께 읽을 겁니다.”

칼럼니스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문장이
잠깐 싸우다가
흩어졌다.

‘괴담에 휘둘리지 말자’.

‘장부를 공개하라’.

‘정치 보복을 막아야 한다’.

‘도시의 전령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눈물이 흘렀다.’

그 중 어느 문장을
오늘의 문장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이름은
다른 장부에
다르게 적힐 것이었다.

언론사 임원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서연 씨,
오늘 기사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균형 잡힌 시각 부탁해요.”

윤 서연이
짧게 웃었다.

“네, 부장님.”

“저는
괴담도,
정치적 구호도 아니라—”

법정 안에서 나온 문장들과
장부 속 숫자들

중심에 두고 쓰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예의 바른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칼럼니스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지막 카드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카드는
이미
내 손을 베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8. 법정의 오후 – 피고인의 말, 그리고 판사의 눈

오후 재판이 재개되었다.

판사가 말했다.

“피고인 노 영학.”

“마지막으로,
피고인에게
진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변호인이
눈빛으로
‘준비한 말만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노 영학의 손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쓴 종이 묶음을 향했다.

나의 변명과 고백 사이.

그는
그 종이에서
몇 문장을 골라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도시에서
오래 정치했습니다.”

“처음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장부를 고치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잠시
방청석 일부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고,
계속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저는
사람을 위해 장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장부를 위해 사람을 고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죽은 아이의 이름을
‘사망 통계’의 숫자 하나로 보고,
군대에서 울부짖던 병사의 소리를
‘인력 관리의 실패’로만 보았습니다.”

“재개발 구역에서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을
‘정치적 부담’으로만
계산했습니다.”

판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변호인은
의자팔걸이를 꽉 잡았다.

“저는
악인이었습니다.”

노 영학이 말했다.

“그 점에 대해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에서
문장은
다른 방향으로 꺾였다.

“하지만
저는
혼자 악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 위에도,
제 옆에도,
제 뒤에도—”

“같은 장부를 보며
같은 결정을 내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론석 쪽,
방청석 쪽,
어딘가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는
이 재판이
**‘노 영학이라는 한 악인을 처벌하는 자리’**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제 형량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앞으로
전령이 아니라
자기 장부를 보며
스스로를 심판하는 도시
가 되기 위해서는—”

“이 재판이
저 한 사람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변호인의 눈이
살짝 뒤집혔다.

이 말은
우리 전략에
전혀 없던 문장인데.

백도훈 판사는
피고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수많은 피고인의
‘반성문과 변명문’을
읽어온 판사였다.

그래서
지금 들리는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고,
어느 정도는
자기 보호이며,
어느 정도는
정치인의 언어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피고인의 진술
잘 들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재판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와,
그렇지 않은 범위에 대해서는—”

“법이 정해 놓은 한계 안에서
최대한
살펴보겠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판사로서의 자존심과
한계의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신이 아니다.

모든 구조를
이 법정 안에서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건의 장부를
가능한 한
멀리까지 펼쳐 보는 것만은
내 몫이다.

그의 속마음은
말로 나오지 않았지만,
법정 안 공기에는
어느 정도 전해지고 있었다.


9. 밤의 독서 – 판결문 초안과 전령의 장부

재판을 마친 뒤,
밤.

백도훈 판사는
집무실 책상 위에
오늘자 공판 기록과
증거 목록,
간략한 메모를 펼쳐놓았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
그는
짧게 메모를 적었다.

“피고인 진술 –
부분적 자기 책임 인정,
구조 문제 강조.”

“피해자 진술 –
장민수:
‘아이 이름이 숫자로만 남지 않게 해 달라.’”

“박진우:
‘전령이 아니라
제도가 나를 증인석에 세웠다.’”

그는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 사건의 ‘핵심’을
적어야 할까.

한 사람의 형량?

구조의 문제를 인정하는 문장?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까지
판결문에 담을 수 있을까.

창 밖에는
도시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어딘가 옥상 위,
한 시온이
그 집무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역시
자기 장부 위에
메모를 적고 있었다.

“○○지방법원 백도훈 –
오늘 공판에서
피해자·피고인 진술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태도.”

“재판부 –
사건을
‘노 영학 개인’으로 한정하지 않고,
구조적 맥락을 고민하는 기색 보임.”

그는
장부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노 영학 –
법정 진술에서
자신을 악인이라 칭하나,
여전히
구조 뒤에 숨으려는 마음
함께 드러남.”

“피해자들 –
이름이
처음으로
법정 기록에
정식으로 적힘.”

“도시 –
오늘 하루 동안,
전령보다
법정과 기사 제목을
더 많이 이야기함.”

그는
입가에
아주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심판의 언어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괴담의 언어에서,
장부의 언어로.”

“단죄의 언어에서,
기록의 언어로.”

그러나
그는
장부 한 구석에
또 다른 메모를 적었다.

“여당·재계·언론 내부 –
여전히
서로의 장부를
거래하며
최소 피해 전략 모색.”

“칼럼니스트 –
자신의 글과
자기 모순을 인지했으나,
아직
어느 쪽 문장을 선택할지
결심하지 못함.”

“정 회장 –
아직
본격적 심판의 무대에
오르지 않음.”

시온은
붉은 펜을 들었다.

“최종 심판 –
보류.”

그가 적었다.

“이유 –
인간들의 재판과 기록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한 번 더 지켜보기 위함.”

“오늘
법정에서 나온 말들이
실제 구조를 바꾸는 힘을
가지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연출로 끝날지.”

바람이
장부 페이지를 넘겼다.

어딘가에서는
작은 요양원의 행정실에서
새로운 양식의 기록표가
시험적으로 쓰이고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군부대 인권교육 시간에
박진우의 사례가
실명 대신 코드네임으로
읽히고 있었다.

어딘가 병원의 회의실에서는
“오늘 재판에서 언급된 병원”이라는 이유로
긴급 대책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도시는
조금씩,
그리고 여전히 불완전하게
자기 장부를 고쳐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시온은
장부를 덮었다.

“언젠가
이 도시가
내 장부가 아니라
자기 장부만으로도
악을 끊어낼 수 있는 날
이 올까.”

“그날이 온다면—”

그의 눈빛이
잠시 멀어졌다.

“아마
이 장부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겠지.”

그러나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붉은 펜을 쥐었다.

“다음 공판일 –
체크.”

“정 회장 –

별도의 장에서
불러낼 예정.”

도시는
또 다른 밤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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