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11장 – 무대 위에 올라온 장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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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 무대 위에 올라온 장부들
1. 새벽 편집실, ‘틀어야 할 것’과 ‘틀고 싶지 않은 것’
새벽 네 시 반.
신문사 영상 편집실은
밤과 아침 사이의 희미한 틈에
꼈다.
형광등은 이미 오래전에 지쳤는지,
간혹 미세하게 깜빡였다.
모니터 세 대가 줄지어 서 있고,
각 화면에는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장면들이
멈춘 채 떠 있었다.
-
하나는
의원회관 복도에서 진행되는 압수수색 화면, -
하나는
정 회장 사무실 사진 위에 씌운
“정치자금 의혹” 자막, -
그리고 마지막 하나에는
파형이 오르내리는
음성 편집 프로그램 화면.
환하게 뜬 파형 위에
마우스 포인터가 멈춰 있었다.
“여기요.”
영상 팀장이
재생 지점을 찍었다.
스피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더 이상
제도에 기대지 않는 순간부터,
괴담은
스스로 걸어 다닙니다.”
노 영학의 음성이었다.
“우리는
괴담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다만
괴담이
누구를 물어뜯을지—
그 방향 정도는
조정할 수 있죠.”
마우스가 멈췄다.
팀장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거
그대로 나가면
진짜
뒤집어지겠는데.”
옆에 서 있던
시사 프로그램 PD가 말했다.
“…그래서
나가야죠.”
그가 답했다.
“이미
USB와 녹음 파일은
검찰 증거로 등록됐고,
한 지우 변호사 쪽이
‘일부 공개 가능’
의견도 줬어요.”
팀장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쳐도,
방송 윤리는…”
“우리가
이걸 숨기면—”
PD가 말했다.
“누군가는
‘언론도 한 패였다’고
장부에 적어 넣을 겁니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편집실 구석에서
커피를 들고 있던
윤 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틀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이건
괴담이 아니라
회의 녹음입니다.”
서연이 말했다.
“누군가의 상상이나
카더라가 아니라—
실제로
이 도시 위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속삭이던 사람들의
육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걸 안 틀면,
전령이 또 누군가를
잘라서 보여 줘야 할지도 몰라요.”
팀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기자들도
전령을 인용하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요.
다만 조건 하나.”
“어떤 조건이요?”
“이 녹음이
어떻게,
누가,
어떤 맥락에서
녹음됐고,
지금까지
어디서
잠자고 있었는지—”
팀장이 말했다.
“그걸
기사로
먼저
아주 정확하게 깔아 줘요.”
“우린
폭로 방송이 아니라
기록 방송이어야 하니까.”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가 말했다.
“〈도시의 장부 ⑦〉은
그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모니터 파형 위에
컷 포인트가 찍혔다.
칼로 종이를 자르듯
화면이 분할되었다.
이제
도시가
오랫동안 귀를 막고 싶어 했던 음성이
처음으로
공기 위에
날 것으로 흘러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생방송 토론, 무대 위에 올라온 사람들
그날 저녁,
지상파 시사 토론 프로그램
〈시선과 심판〉 생방송 스튜디오.
원형 테이블 위에
마이크가 다섯 개 놓였다.
-
사회자,
-
여당 측 패널,
-
야당 측 패널,
-
피해자 대표,
-
그리고
윤 서연.
스튜디오 바닥에는
카메라 세 대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원형 테이블을 노리고 있었다.
사회자가
대본을 넘기며 말했다.
“자,
오늘은
녹음 파일 일부
직접 들려 드리겠습니다.”
“정치자금 의혹,
여론 조작 의혹,
그리고
‘도시의 전령’ 괴담을
둘러싼
책임 공방—”
“모두
이 자리에서
정면으로 다루겠습니다.”
생방송 카운트다운이
귀에 익은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5, 4, 3…”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카메라 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회자의 목소리가
도시 곳곳의 거실과
식탁,
휴대폰 스피커로
동시에 전파됐다.
인사 말,
간단한 사건 요약이 지나간 뒤
사회자가 말했다.
“먼저
문제가 된
회의 녹음 일부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스튜디오 천장 스피커에서
녹음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더 이상
제도에 기대지 않는 순간부터,
괴담은
스스로 걸어 다닙니다.”
“우리는
괴담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다만
괴담이
누구를 물어뜯을지—
그 방향 정도는
조정할 수 있죠.”
녹음 속
짧은 웃음.
“하하,
괴담이
우리 편을 물어뜯지만 않으면
다행이죠 뭐.”
“어느 정도
‘연출’은 필요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면
사람들은
관심을 안 줍니다.”
잠시 뒤,
조금 낮아진 목소리.
“…선만
분명히 합시다.”
“우리가 직접
칼을 쥐지는 말자고요.”
“칼을 쥘 사람들은
어차피
따로 생깁니다.”
녹음이 멈추자
스튜디오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사회자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지금 들으신 음성은
○○컨설팅과
정 모 이사,
그리고
노 영학 의원이 참석한
비공개 회의 녹음의 일부입니다.”
“법률 검토를 통해
수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일부를
시청자 여러분께
들려 드렸습니다.”
그는
좌우 패널을 번갈아 보았다.
“먼저
여당 측 입장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여당 측 패널,
중진 의원 출신 인사가
마이크를 켰다.
“우선
이 자리에
피해자 분들도 계신 만큼,
그분들께
마음 깊이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형식적인 문장.
바로 이어지는 방어.
“다만
방금 들으신 녹음은
여러 문맥 중
일부만
발췌된 것입니다.”
“정치인은
다양한 의견을 듣고,
때로는
과도한 발언도
듣게 됩니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무슨 결정을 했느냐이지,
누가
어떤 말을 꺼냈느냐가 아닙니다.”
야당 측 패널이
바로 받아쳤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하셨습니까.”
그가 물었다.
“괴담이
누구를 물어뜯을지는
조정 가능하다는 말에
의원이
제지했습니까,
동의했습니까.”
“녹음 어디에서도
‘그건 하지 말라’는
분명한 제지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당 패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법원이 판단할 내용을
우리가 여기서
먼저 결론 내리는 건—”
사회자가 말을 끊었다.
“그럼
피해자 측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카메라가
피해자 대표를 향했다.
남자의 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크 앞에 선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했다.
“…저는
법리적인 것은
잘 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겠습니다.”
“이분들은
우리가
겪은 일들을
‘연출’이라고 부르셨다는 것.”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우리 아이가
병원에서
죽을 때,
거기 계신 분들은
‘장애인이니까’,
‘원래 아팠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재개발 구역에서
내쫓길 때는
‘여기 사는 사람들 어차피 가난하다’고
말했고요.”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런데
그 뒤에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연출 재료’**로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야당 패널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당 패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해자 대표는
계속 말했다.
“저는
전령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우리 목숨을
숫자로 보고,
표로 보고,
여론 조정 재료로 보던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는 것.”
그는
손을 꽉 쥐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칼을 든 전설’을 믿어서가 아니라,
칼을 쥔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어서입니다.”
사회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이 사안을
가장 오래 취재해 온
윤 서연 기자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카메라가
서연을 비췄다.
얼굴엔 화장이 되어 있었지만,
눈 밑의 피로는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기자님,
의원 측에서는
기자님의 연재를
‘괴담 장사’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말했다.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잠시 침묵.
서연은
눈을 감았다 떴다.
“…저는
장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대신
장부를 써 왔습니다.”
사회자가
눈을 크게 떴다.
“장부요?”
“네.”
서연이 계속했다.
“병원 기록,
재개발 서류,
경찰 신고 내역,
법원 판결문…”
“그 사이사이에
빠져 있던 이름들,
구겨져 버려진 사연들을
하나씩
다시 적어 넣고 싶었습니다.”
“이 도시가
누구를 버렸는지,
누구를 잊었는지,
누구를
일부러 보지 않기로 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갈라지지 않았다.
“제가 쓴 건
괴담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 삶을
‘괴담’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있다면—”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분들은
이 도시 사람들의
장부에서
어떤 이름으로
기록될지
스스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잠시 얼어붙었다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진실을
다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각자의 장부가
어떤 얼굴을 향하고 있는지는
조금은
보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생방송 종료 카운트가
귀에 익은 목소리로 들려왔다.
“3, 2, 1…”
카메라의 빨간 불이 꺼졌다.
그러나
그날 스튜디오를 거쳐 간 말들은
오히려
그제야
진짜로 도시 속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3. 국면 전환 계획 – 또 다른 ‘연출’을 꿈꾸는 자들
같은 시각보다
조금 전,
어느 호텔 스위트룸.
커튼은 두꺼웠고,
카펫은 발 소리를 삼켰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잔과 문서,
노트북이 뒤섞여 있었다.
노 영학과
몇몇 핵심 참모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스크린에는
생방송 진행 상황이
음소거된 채
떠 있었다.
여당 전략가 하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두면
여론
정말로 뒤집힙니다.”
그가 말했다.
“녹음 틀고,
피해자 내보내고,
기자까지
눈물 섞인 정의감으로 무장하면—”
“최악입니다.”
다른 참모가
덧붙였다.
“이럴 때일수록
국면 전환 카드가 필요합니다.”
노 영학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남는
떫은 맛이
오늘따라 유난히 강했다.
“…어떤 카드 말인가.”
그가 물었다.
전략가가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열었다.
“전령입니다.”
스크린에는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화면들이 떠 있었다.
“요즘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전령은 사실 없다,
누군가 연출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돌고 있습니다.”
“그걸
역이용하는 겁니다.”
노 영학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의원님 사무실을 겨냥한
가짜 전령 공격을
한 번 겪으시는 겁니다.”
전략가가 말했다.
“낮은 수위로,
그러나
상징적인 방식으로.”
“온라인에선
이미
의원님을
‘전령과 한패’로 몰아가는 글도
일부 돌고 있습니다.”
“그걸
거꾸로 뒤집는 겁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의원님 사무실이나
지역구 사무실 앞에
누군가
‘심판장부’ 같은 걸 던지고 도망가는 장면,
또는
의원님을 향해
협박성 메시지를 쓰는 장면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 영상을
곧바로
공개하죠.”
“그러면
프레임이 바뀝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지금은
‘권력이 괴담을 이용했다’인데—”
“그때부턴
‘괴담에 미친 극단주의자들이
합법 정치인을 공격한다’로
바뀝니다.”
조용히 있던 참모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실제 폭력이 동반되면…”
전략가가
고개를 저었다.
“물리적 폭력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글자와 상징이면 충분합니다.”
“협조 가능한
하부 조직을 통해
‘분노한 시민’ 역할을 할 사람 몇을 섭외하고,
경찰에 미리
일부 정보를 흘려
‘침입 시도 미수 사건’ 정도로
마무리 짓게 하죠.”
“의원님은
언론 앞에서
‘전령 괴담이
이제
합법 정치인을 겨냥하고 있다’며
다시 한 번
‘괴담에 맞서는 정치인’ 이미지로
나가시면 됩니다.”
노 영학은
잠시 말을 잃었다.
또 다른 연출.
이번엔
나 자신이
무대 위에 올라가는 연출.
와인잔 속 액체가
기묘하게 흔들렸다.
“…너무
무리한 수는 아니겠나.”
그가 물었다.
전략가는
미소를 지었다.
“의원님.”
“우리는
이미
이 정도 수를
여러 번
써 왔습니다.”
그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다만
그때는
다른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놓았을 뿐이죠.”
“이번 한 번쯤은
의원님이
직접 서셔야 합니다.”
노 영학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의 속내를
조용히 더듬어 보았다.
내가
괴담을 이용했다는
장부에 이름이 올라간다면—
적어도
마지막 줄에는
‘스스로도
괴담에 공격받았다’고
적어 놓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준비하게.”
그가 말했다.
“다만
선은 넘지 마라.”
전략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선은
늘
조금씩
밀리는 법이죠.
4. 심판자의 시야, 카메라 위의 카메라
의원 지역구 사무실 인근,
늦은 밤 골목.
CCTV가
무심한 눈으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바로 위 건물 옥상,
철제 난간에
한 사람이
조용히 기대 서 있었다.
한 시온.
그의 시야에는
사무실 건물 앞
움직임 몇 개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검은 후드를 쓴 청년 둘,
마스크를 쓴 남자 하나.
손에는
스프레이 캔과
두꺼운 봉투,
작은 캠코더.
“…여기 맞다.
의원 사무실 앞.”
한 명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장부 던지고,
벽에 글 쓰고,
영상 찍고 튀는 거야.”
다른 한 명이 물었다.
“근데
진짜
전령 팬인 줄 알겠냐?”
“돈 받으면 됐지
뭐 어때.”
마스크 남자가
낄낄 웃었다.
“나중에
우리 잡히면?”
“안 잡힌대잖아.”
스프레이가
쉭쉭 소리를 내며
벽 위를 더럽혀 갔다.
“심판의 장부는
피로 쓰인다—”
서툰 글씨였다.
마스크 남자가
봉투를 사무실 현관 앞에
툭 던졌다.
봉투 위에는
빨간 잉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의 이름도
이미 여기 있다,
정치인.”
캠코더에
그 장면이 담겼다.
“오케이,
됐어.”
“철수!”
그들이 뒤돌아
골목 끝으로 뛰려고 할 때,
짧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찍어 보지 않겠습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
한 시온이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누, 누구세요?”
후드 청년 하나가 물었다.
시온은
한 걸음 다가섰다.
“지금 찍은 영상.”
그가 말했다.
“오늘 밤
누가 받을지
알고 있습니까.”
청년이
눈을 흘겼다.
“당연히
의원 쪽에서 받겠지.”
“그리고
괴담 빠진 미친놈들이
자신들을 노린다고
쇼할 거고.”
다른 한 명이
낄낄 웃었다.
“우린
그냥
돈이나 받으면 되지.”
시온의 눈빛이
얕은 안개처럼 차가워졌다.
“…당신들은
어느 장부에 올라가 있을까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전령의 장부입니까,
의원의 장부입니까,
아니면
본인 스스로의 장부입니까.”
마스크 남자가
씨익 웃었다.
“뭔 소리야, 이 미친놈아.”
“야,
빨리 가자.”
그들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사거리 건너편에서
짙은 파란빛이 번쩍였다.
“삐용—”
짧은 사이렌 소리.
골목 입구에서
순찰차 한 대가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청년들이
동시에 굳어섰다.
“야,
아직 우리 위치 몰라.
골목 안으로 숨어—”
그러나
순찰차는
정확히
그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경찰 둘이 내렸다.
“신고 들어왔습니다!”
한 명이 외쳤다.
“의원 사무실 주변
수상한 인물들 있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청년이
반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골목은
도망치기에 좋은 구조가 아니었다.
몇 걸음 뛰기도 전에
앞쪽에서 또 다른 순찰차가
막아섰다.
시온은
난간에 기대
그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조금 늦게 출동해 달라’고
경찰에 부탁했겠지.
그들이
장면을 다 찍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지만—
그의 손끝이
난간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조금 늦게’의 기준을
내가
바꿔 놓았다.
골목 안에서
짧은 소란이 일어났다.
“뭐 하는 놈들입니까!”
“그냥 놀다 가는 거예요!”
“그럼
그 스프레이는 뭐고,
이 봉투는 뭡니까?”
봉투 위
글자가
가로등 빛에
더 또렷이 드러났다.
“너의 이름도
이미 여기 있다,
정치인.”
경찰관 하나가
무전을 쳤다.
“…의원님 쪽에서
이런 거
예고된 거 있었습니까?”
무전기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
그,
약한 협박편지 정도 올 수 있다고—”
“작업 중인데
조금 늦게 오셔도 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메라에 찍히도록 준비했던 장면은
예상보다
너무 이르게
경찰에게 발각됐다.
“연출된 희생자”가 되기 전에
“연출 시도자”가
현행범으로 붙잡힌 꼴이었다.
옥상 위에서
시온은
조용히 장부를 펼쳤다.
“노 영학 –
가짜 전령 공격 연출 시도,
실행 전에 노출.”
그 옆에
새 문장을 적었다.
“칼을 흉내 내는 입이
칼을 쥐기도 전에,
칼집이 열리는 순간
들킨 셈.”
그는
도시를 한 번 내려다보고
천천히 돌아섰다.
“이제
무대 위로
올라갈 사람은
더 이상
‘연출된 전령 팬’이 아니라
진짜 피해자들이어야 한다.”
5. 한 무대 위에 서는 이름들
그로부터 며칠 뒤,
국회 대회의실.
“도시의 전령과
미해결 피해자 문제
공청회”라는 길고 어색한 제목이
현수막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훨씬 선명했다.
“이 도시가
누구를 버렸는지
공개적으로 말해보는 자리.”
방청석에는
취재진,
시민단체,
피해자 가족들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발언석에는
한 줄로
여러 명이 앉았다.
-
병원에서 아이를 잃은 아버지,
-
재개발 구역에서 강제로 쫓겨난 노인,
-
직장 내 괴롭힘으로 동료를 잃은 노동자,
-
학교 폭력으로 아이를 전학 보낸 어머니,
-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옆에서 받아 적어 온
변호사 한 지우,
기자 윤 서연.
노 영학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당 대변인이
뒷줄에 앉아
메모를 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도시의 전령’이라는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묻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 도시에서
누가
어떻게
버려져 왔는지를
기록하는 자리입니다.”
첫 발언자는
병원 피해자 아버지였다.
그는
한 장의 서류를 들었다.
“이건
우리 아이
사망진단서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병원에 보냈던 민원 서류입니다.”
“여기에는
‘감염관리 부실’이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이건
그 민원이
‘내부적으로 처리되었다’는
병원의 답변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는
마지막으로
추모식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우리 아이
영정 사진입니다.”
대회의실 공기가
서서히 무거워졌다.
“전령이
우리 아이를 위해
누구를 심판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이 세 장의 종이 사이에
숨어 있던
이름들을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사회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발언자는
재개발 피해 노인이었다.
“내가
여기 살던 집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날,
이 도시는
내 나이를
숫자로만 봤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나이면
어디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냐
물어본 적 없습니다.”
“그냥
보상금 숫자 하나 놓고
‘이 정도면 됐지 않냐’고 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영수증 한 뭉치를 꺼냈다.
“이건
내가
새 방을 찾아다니며
택시 탄 영수증입니다.”
“이건
임대료 올려달라는 통보문이고요.”
“이건
새 집 계약했다가
사기당했다는 걸
나중에 알고
겨우 받아낸 환불 영수증입니다.”
그는
손에 쥔 종이들을
한 번에 모았다.
“이 종이들이
다 내 장부입니다.”
“도시의 전령이
있다면,
이 장부를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없다면—”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발언이 이어질수록
대회의실 공기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 도시는
너무 오랫동안
이런 장부들을
혼자 쓰게 내버려 두었다.
한 지우가
발언석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여기 모인 장부들,
다 종이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사망진단서,
민원서류,
영수증,
학교 기록,
상담일지…”
“그런데
이 종이들이
모이면
사법 정의의 장부가 됩니다.”
“검찰 수사 기록,
판결문,
시정명령서,
징계 결정문…”
그녀의 눈빛이
굳어졌다.
“문제는
지금까지
그 장부가
너무 한쪽 이름들만
적어 왔다는 것입니다.”
윤 서연이
마지막 발언자로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오늘
새로운 기사 대신,
이 자리 자체를 기사로 쓰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누가
어떤 얼굴로 이 자리에 앉았고,
어떤 종이를 꺼내 들었고,
어떤 목소리로
자기 장부를 읽었는지.”
“오늘 여기서 나온 이름들이
나중에
전령의 장부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하지만
적어도
이 도시에 남을
인간들의 장부에는—”
“오늘부터
조금 다른 글씨체로
적히기 시작할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대회의실 뒷줄,
당 대변인이
굳은 얼굴로
메모를 계속했다.
이 자리가
여론 전환의 무대가 될까,
아니면
더 큰 파문의 시작점이 될까.
둘 중 어느 쪽이든,
이미
멈추기엔 늦었다.
6. 옥상에서 내려다본 무대 – 처음으로 겹쳐진 선들
그날 밤,
국회의사당 근처
낡은 건물 옥상.
한 시온은
장부를 펼친 채
멀리서
대회의실 불빛이 완전히 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부 한 페이지에는
오늘 발언자들의 이름이
새로 적혀 있었다.
“○○ 병원 피해자 부친 –
장기 민원 및 제도적 방치,
오늘 공청회에서
첫 공식 증언.”
“△△ 재개발 피해 노인 –
강제 철거 및 주거권 침해,
공식 기록에
처음으로 얼굴과 이름 함께 남김.”
그 옆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한 지우 –
오늘,
여러 장부 사이의 연결고리로
서기 시작.”
“윤 서연 –
오늘,
기사 대신
무대를 기록하는 사람을 선택.”
그리고,
페이지 아래쪽 구석에는
이 이름도 있었다.
“노 영학 –
가짜 전령 공격 연출 시도,
실행 전 경찰 개입으로 노출.
공청회 불참.”
그 옆에
붉은 잉크가
조금 더 짙게 번져 있었다.
시온은
손가락으로
그 잉크 선을 한번 짚었다.
“드디어
인간들의 무대가
내 장부의 페이지와
같은 이름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
공청회 장면은
내 방식의 심판은 아니었다.”
“누구도
갑자기 심장이 멎지 않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았고,
파쇄기에 끌려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도시 불빛을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자기 장부를 들고
무대 위에 올랐다.”
장부의 다른 페이지를 넘기자
작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처음으로
도시의 장부와
나의 장부가
한 무대 위에서
서로를 바라봄.”
시온은
잠시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주 희미한 안도와
변하지 않는 냉정이
같이 섞여 있었다.
“좋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
그는
노 영학의 이름이 있는 페이지로
다시 돌아왔다.
붉은 점 옆에
새 문장을 적었다.
“최종 심판 시점 –
인간들의 장부가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확인한 뒤.”
“단,
도시와 제도가
끝내 마지막 줄을 쓰지 못할 경우—”
그는
펜끝을 잠시 멈췄다가
꾹 눌러 썼다.
“그때는
이 장부가
대신 마지막 줄을 쓸 것이다.”
바람이
페이지를 한 번 넘겼다가
다시 원래 페이지로 돌려놓았다.
도시는
여전히
부패했고,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선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스스로
심판을 시도해 보겠다.”
시온은
장부를 덮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다.”
“그렇다면
나는
잠시
한 발 물러나
지켜보겠다.”
“하지만
이 도시의 악들이—
끝내
스스로 쓰는 장부를
거부한다면—”
그의 눈빛이
한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여전히
나의 몫이다.”
밤하늘 위,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졌다.
도시 아래에서는
누군가가
TV 재방송을 보며
채널을 돌렸고,
누군가는
공청회 전체 영상 링크를
메신저로 건넸고,
누군가는
조용히 노트를 펼쳐
오늘 들은 이야기를
자기 말로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든 작은 움직임들이
한 시대의 성벽에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새 금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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