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2장 – 조용한 교실의 살인

2장 – 조용한 교실의 살인

1. 강가의 꽃다발

겨울로 넘어가는 강바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를 품고 있었다.
젖은 흙, 오래된 낙엽, 도시에서 흘러 내려온 기름기, 그리고…
한 번도 제대로 끝나지 못한 울음의 잔향.

한강 둔치의 자전거 도로 한쪽,
철제 난간 아래로 내려가는 콘크리트 계단 끝에 작은 제단이 하나 있었다.

낡은 곰 인형 하나,
바람에 색이 바랜 종이학 몇 개,
비닐 포장도 제대로 뜯지 못한 채 놓여 있는 편의점 꽃다발.

꽃다발 옆 사진틀 속에는,
교복을 입은 소년 하나가 웃고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모범생의 웃음처럼 반듯했고,
눈가에는 아직 어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의 맑음이 남아 있었다.

사진 밑에는 손글씨로 적힌 글이 있었다.

“민서야, 엄마는 아직도 네가 문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강바람이 종이 쪽지를 살짝 흔들었다.
글씨는 여러 번 눈물에 번졌다 다시 덧그려진 흔적이 있었다.

철제 난간 옆,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한 시온.

그는 강물을 보지 않고,
꽃다발과 사진, 그리고 사진 속 소년의 웃음을 보고 있었다.
눈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다만 무언가 오래된 것을 다시 꺼내 읽는 사람의 눈이었다.

잠시 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중년 여인이 비닐봉지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검은 패딩 점퍼와 낡은 운동화, 손에는 작은 국과 반찬이 든 도시락 용기.

그녀는 꽃다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왔다, 민서야…”

목소리는 강바람보다 더 떨렸다.
그녀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은 국그릇 뚜껑을 열었다.

“너 좋아하던 미역국 끓였다.
생일날은… 못 지켜줬지만,
오늘은 그냥… 네가 먹고 싶어 했을 것 같아서…”

그녀의 손이 국그릇 위에서 잠시 멈췄다.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얘기 좀 했어.
선생님이 또 그러더라.
‘어머님, 이제 그만 놓아 드리는 게…’
그만 놓으긴 뭘 그만 놓아.
네가 스스로 뛰어내린 게 아니잖아.”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죄다 쥐어짜듯 높였다가,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목울대를 쓸어내렸다.

“…미안해.
엄마가… 끝까지 못 싸워줘서…”

한 시온은 그 모습을 무언가를 확인하듯 끝까지 지켜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사건의 개요가 떠올라 있었다.

  • 피해자: 고등학생 박 민서, 투신 사망.

  • 장소: 이 강가 위 다리.

  • 공식 기록: “우울증과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극단적 선택.”

  • 실제 사인: 지속적인 학교 폭력, 강요된 자존감 붕괴, 집단 괴롭힘.

  • 가해자 측: 가해 학생 중 한 명의 아버지가 교육청 고위 간부, 지역 유지.

  • 수사 결과: “학교 폭력 정황 일부 있으나, 사망과 직접적 인과관계 입증 부족.”

교육청은 조사위원회를 열었다.
학교는 사과문을 냈다.
가해 학생 부모들은 몇 번 눈물을 보였고, 어떤 부모는 무릎까지 꿇는 연기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서류와 합의서, 그리고 **“재발 방지 약속”**이라는 말로 덮였다.

“가해 학생 ○○군, 자퇴 후 유학 예정.”
“소년이라는 점,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참작.”

도시의 분노는 잠시 치솟았다가,
몇 주 후 다른 뉴스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 강가의 계단 밑,
추운 날마다 도시락을 들고 내려오는 한 어머니의 미완의 질문.

“왜 아무도… ‘살인’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시온은 난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에,
누군가 울면서 남긴 말들이 낮게 소용돌이쳤다.

“애들이 장난으로 그랬을 뿐이래.”
“원래 좀 예민했대.”
“요즘 애들은 다 힘들다잖아.”

세상은 ‘아이들 일’이라 가볍게 말했고,
국가는 ‘학교 내부에서 해결’하라고 권했다.
교육청은 **“지도와 상담으로 마무리”**라는 말을 기록에 남겼다.

그래서—
이 사건은 국가의 장부에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장부에서는,
오히려 오늘 날짜가 심판 예정일로 새겨지고 있었다.

시온은 어머니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박 민서, 기록 열람.”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2. 장부 속, 교실의 풍경

어두운 방 안에 한 줄기 빛이 떨어지듯,
한 교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창가 자리, 뒷자리, 복도 쪽 자리.
책상 위에 무심코 올려진 교과서, 필통, 스마트폰.

2학년 5반.

칠판 한 켠에는,
‘중간고사 D-21’이라는 글씨가 붉은 분필로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머리를 염색한 아이들, 단정한 아이들, 피곤한 아이들,
그리고… 최대한 작아지려는 몸짓으로 의자를 붙잡고 있는 아이 하나.

그가 박 민서였다.

“야, 민서야.”

누군가,
너무 친근해서 오히려 혐오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제 카톡 씹은 거 뭐냐?”

민서의 옆자리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다가왔다.

그들 가운데,
가장 앞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장 윤수.

깔끔한 교복, 손목에 명품 시계,
웃고 있는데도 눈동자 어딘가가 비어 있는 듯한 표정.

“그, 그게… 늦게까지 학원에 있어서…”

민서가 말꼬리를 흐리자,
윤수는 허리를 숙여 그를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

“아, 그래? 학원에 있었어?
그럼, 우리가 보내준 사진도 못 봤겠네?”

그의 뒤에서 다른 아이가 키득거렸다.

휴대폰 화면에,
민서의 얼굴을 촬영한 사진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책상을 뒤집어 엎은 순간, 체육복을 빼앗긴 순간,
화장실에서 머리를 세면대에 처박힌 순간.

“야, 어제 올라온 그 짤 봤냐?”
“아 ㅋㅋ 물에 빠진 쥐 같던데?”
“댓글 개웃겼어. ‘학교 전설의 찌질이’ 그거 누가 쓴 거냐?”

교실 한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떤 아이는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대부분은 그저 웃거나, 침묵하거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까지 걸려들면 귀찮아진다.”
“쟤도 좀 왜 저렇게 사냐.”
“어차피 다 지나가겠지.”

윤수는 민서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리고, 친한 척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야, 민서야.
우리, 너 덕분에 요즘 심심하진 않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민서의 손이 떨렸다.
가늘게 잡고 있던 연필심이 부러졌다.

“…그만해 줘.”

그가 겨우 내뱉었을 때,
교실 뒤편에서 누군가 “우와—” 하고 놀리는 소리를 냈다.

“들었냐? ‘그만해 달래’ ㅋㅋㅋ”
“야, 민서야. 우리 때문에 힘들어?”

윤수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힘들면 말해.
그냥, 죽어버리면 되지.”

그 한 마디 뒤에,
순간적으로 교실 공기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말이 장난처럼 던져졌지만,
그 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담임교사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몇 번 목격하기도 했고, 다른 아이들 입을 통해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학폭위’가 열리면 학급 분위기가 더 나빠질 것을 걱정했고,
가해 학생 부모들의 재력을 알고 있었다.

“애들끼리 약간 심한 장난을 치는 것 같긴 한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요즘 애들, 별것도 아닌 걸로 상처 받았다고… 참…”

그는 상담 일지를 그렇게 적었다.

언젠가 민서의 어머니가 찾아와,
눈물로 호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제 아이가요… 집에서 매일 울어요.
학교 가기 싫다고, 너무 무섭다고…”

“어머님, 요즘 청소년들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잖아요.
또래 집단 안에서 생기는 일들은,
오히려 아이들끼리 스스로 해결하게 도와주는 게…”

그리고,
그 상담 일지는 교육청 보고용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우울 경향 있음, 학교 적응 스트레스.
학급 내 관계 갈등, 지속적인 관찰 필요.”

그 어느 페이지에도,
장 윤수라는 이름은 제대로 적히지 않았다.

교실 밖,
담배 피우며 웃고 있는 어른들,
단톡방에서 조롱과 욕을 섞어 아이를 밀어붙이던 메시지들,
학부모들 사이에 오가는 **“우리 애 앞길 좀 막지 말아 달라”**는 압박.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해자는 ‘예민하고 불안정한 아이’,
가해자는 ‘한때 실수한 착한 아이’.”

조사는 그렇게 끝났고,
사건은 ‘안타까운 자살’로 기록되었다.

한 시온은,
장부 속 그 모든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고 나서야 책장을 덮었다.

“국가의 장부에서는 끝난 사건.
그러나… 아직 이 강가의 공기는 그것을 ‘살인’이라 부르고 있다.”

그는 계단 아래,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어머니의 등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좋다.
두 번째 심판은,
조용한 교실의 살인자에게 내리기로 하자.”


3. 기사, 세상에 던져지다

같은 날 오전,
〈도성일보〉 편집국의 공기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사무실 한쪽 벽에는 TV가 켜져 있었다.
뉴스 채널에서는 세광병원 이사장 민 도현의 장례 준비 소식이 짧게 다뤄지고 있었다.

“병원과 유가족 측은, 이사장의 죽음이 최근 제기된 각종 의혹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 음성이 배경으로 흐르는 가운데,
회의실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신문 지면 배치안을 들고 논쟁 중이었다.

책상 한쪽 끝,
윤 서연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방금까지 밤새 다듬은 기사 초안이 떠 있었다.

[단독] 세광병원 소아병동, 두 달 새 아동 3명 ‘새벽 사망’…
실험 약물·수술 결정 과정 미스터리

사회부 데스크인 김 팀장이 안경을 벗었다 쓰며 말했다.

“제목은 좀 세다.
‘미스터리’는 빼고,
‘의혹 제기’ 정도로 완화하자.”

“팀장님, 이미 의혹을 넘어선 정황이잖아요.
차트에 나온 약 이름, 처방 시점, 사망 시간대까지 다 겹치는데…”

서연이 맞섰다.

“그 정황으로도 병원 측은 ‘우연’이라고 우길 거야.
우린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고.”

“나도 알지.
근데 지금 이 병원,
우리 신문에 광고 한 달 치 예약해 놨다.”

회의실 공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서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광고를 포기하시죠.”

테이블 위의 종이들이 살짝 흔들렸다.
김 팀장은 웃지도, 바로 화내지도 않았다.

“윤 기자,
우리 회사가 럭셔리 양심 기업인 줄 알아?
인건비, 인쇄비, 송고비 다 어떻게 감당할 건데.”

“알아요.
근데… 적어도 한 번은,
‘광고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표식은 남겨야죠.”

서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어젯밤, 스스로 수십 번 되뇌어 본 문장이었다.

“게다가, 이 기사…
이사장 죽었을 때 내는 거잖아요.”

그녀가 화면을 가리켰다.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못 쓴 말들,
지금도 못 쓴다면…
그냥 영원히 못 쓰는 거라고 생각해요.”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옆에 앉아 있던 편집 차장이 입을 열었다.

“법무팀이랑은 얘기해 봤냐?”

“네.
실명 직접 거론 대신,
‘재단 고위 관계자’ 정도로 바꾸면 된다고 했습니다.
대신 기록과 증언은 다 확보해 둔 상태고요.”

김 팀장은 기사를 다시 읽었다.

아이 셋의 이름과 이니셜,
사망 시각,
모두 새벽 3시 전후.

실험 약물,
제약회사 이름은 직접 쓰지 않았지만,
누구나 유추할 수 있을 만큼의 힌트가 배치되어 있었다.

“…좋아.
제목은 약간만 손보자.”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 번은,
이런 식으로라도 찔러봐야지.”

그가 결국 사인을 하자,
편집부 막내가 파일을 받아 들고 황급히 나갔다.

“온라인판은, 오늘 낮 12시에 올린다.
SNS용 카드뉴스도 준비해 놓고.”

서연은 노트북을 덮었다.
심장은 두근거렸지만,
생각보다 덜 두려웠다.

“윤 기자.”

김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알지?
이 기사 나가면, 병원 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

“예상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다.
네가 건드린 건,
병원 하나가 아니라 구조니까.”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경고에 가까웠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하고 싶어요.
병원, 학교, 회사, 어디든…
‘진짜 죽인 사람’이 누군지,
한 번쯤은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어요.”

그녀는 그때,
자신의 말 속에서 어디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다른 방향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

12시 정각,
〈도성일보〉 온라인판 메인 화면 상단에
서연의 기사가 걸렸다.

[기획취재] 세광병원 소아병동, 두 달 사이 아동 3명 새벽 사망
반복되는 ‘심정지’, 숨은 공통점은?

처음에는 클릭이 뜸했다.
그러나 병원 이름과 “아동 3명 새벽 사망”이라는 단어 조합은,
사람들의 눈길을 오래 붙들어 두기에 충분했다.

포털 메인에 기사 링크가 걸리고,
몇몇 커뮤니티에 링크가 공유되자,
댓글들이 하나둘 달리기 시작했다.

“또 병원이 장난친 거 아니냐”
“내 조카도 거기 다녔는데, 갑자기 무섭네…”
“애들 가지고 장난치면 인간도 아니다 진짜”

그 댓글들 사이에서,
한 댓글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 애가 자살했을 때도 그랬다.
학교는 ‘우울증’이라고 했고,
교육청은 ‘지도 강화하겠다’라고만 했다.
가해 애들은 잘만 유학 가고.
이 나라, 약한 사람은 그냥 버리는 거다.”

익명 아이디,
프로필 사진도 없는 계정.
하지만, 그 한 줄에서 풍기는 냄새는
강가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종류였다.

버려진 사건들의 냄새.


4. 가해자의 오후

같은 시각,
서울 서쪽에 있는 한 신축 아파트 단지의 34층.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창 앞에서,
한 소년이 게임 컨트롤러를 던졌다.

“씨발, 또 죽었네.”

17살,
장 윤수.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TV 화면에는 슈팅 게임 점수판이 떠 있었다.
닉네임 KINGY가 죽는 장면이 리플레이로 흘렀다.

“야, 윤수야. 말 좀 살살 해라.”

주방에서 아버지 장 호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는 교육청 고위 간부였고,
지역 언론에는 종종 “인성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교육자”로 등장했다.

“교육이란, 아이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실수한 아이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어른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 인터뷰 기사 아래에는,
현직 교사와 학부모들의 훈훈한 댓글이 달려 있었다.

윤수는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넓은 식탁 앞에 앉아, 태블릿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세광병원 관련 속보가 떠 있었다.

“‘아동 3명 새벽 사망’… 뭐야, 이건 또.”

장 호진이 코웃음을 쳤다.

“언론도 할 짓이 없어서…
죽은 애들 붙잡고 선동질이나 하고 앉았네.”

그는 화면을 대충 넘기다가,
어떤 문장에서 손을 멈췄다.

“최근 2개월 사이 세광병원 소아병동에서 사망한 아동 3명은
비슷한 시각대인 새벽 2~3시 사이,
모두 심정지와 상태 악화로 사망했다…”

그는 태블릿을 툭 덮었다.

“뭐든 세 개만 모이면 패턴이라고 지랄들이야.
세상 억울한 사람들 다 모으면,
지구 세 바퀴는 돌겠다.”

윤수가 물을 마시며 물었다.

“아빠,
저 병원… 아빠랑도 뭔가 관련 있어?”

“이놈이, 남의 집안 사정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장 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냥… 예전에 같이 모임 좀 했던 거지.
이사장이라는 사람도, 되게 깔끔하고 똑똑한 양반이었는데…
결국 저렇게 가는구만.
인생 알다가도 모르지.”

그의 말끝에는 ‘남의 일’이라는 가벼움이 묻어 있었다.

윤수의 머릿속에는,
‘학교 폭력 대책 회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자리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들끼리 다툼이 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민서)도 원래 좀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이 있었어요.
이걸 다 우리 애들 탓으로 돌리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죠.”

교육청의 회의실에서,
그는 동정과 우려, 합리적 어른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 회의가 끝난 후,
민서의 어머니는 회의실 밖 복도에서 휘청거리듯 걸어 나와,
벽에 기대 서서 울었다.

윤수는 그날,
복도 끝에서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적이 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참.”

그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는 다시 게임 생각을 했다.

“아빠, 나 다음 달에 뉴질랜드 어학연수 가는 거
그거 확정된 거야?”

“그래, 확정이지.
이번 겨울엔 좀 공기 좋은 데 가서 머리 식히고 와라.
여기저기 시끄러운 일도 많았고…
정신 좀 리셋하고 와야지.”

정신을 리셋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둘 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

윤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우리 아버지 최고.”

그는 아버지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거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아주 미세하게 깜박였다.

눈이 예민한 사람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변화.
그러나, 분명히 한 번 밝기가 흔들렸다.

윤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 눈부셔. 뭐야 전등.”

장 호진은 아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뉴스를 켰다.

그는 알지 못했다.
그 미세한 떨림이,
이 집을 향해 누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신호라는 것을.


5. 밤, 교실이 다시 열린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아파트 34층,
장 윤수의 방.

벽에는 유명 래퍼와 축구 선수 포스터가 뒤섞여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영어 단어장이 아니라,
각종 게임 캐릭터 피규어와 헤드셋이 널브러져 있었다.

윤수는 침대에 엎드린 채,
휴대폰으로 친구들과 단체 채팅을 하고 있었다.

“야, 다음 주 금요일에 ○○ 클럽 간다?”
“윤수 아버지가 차 빌려준다며 ㅋㅋ 존나 혜자”
“그때 그 찐따 새끼 죽은 데 근처도 지나가냐?”
“ㅋㅋㅋㅋ 그 얘기 꺼내면 분위기 ㅈㄴ 싸해짐 ㅅㅂ 무슨 추모 콘서트냐”

윤수는 키득거리며 메시지를 입력했다.

“야 그 새끼는 뭐…
원래 갈 데까지 가 있던 애였잖아.
우리가 그냥 밀어준 것뿐이지.”

그때였다.

방 안의 전등이,
이번에는 확실히 꺼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통째로 사라졌다.

컴퓨터 모니터도,
스탠드도,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던 불빛도.

윤수는 욕을 내뱉었다.

“씨발 뭐야, 차단기 떨어졌냐?”

그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만져 봤다.
스위치는 이미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서,
칠판 하나가 점점 윤곽을 드러냈다.

그의 방이 아니다.
학교 교실.

그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의자 표면의 차가운 플라스틱 감촉,
칠판 냄새,
창문 밖 운동장의 가로등 불빛.

“…뭐야 이거.”

윤수가 일어나려 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앉아 있어라.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다.”

낯선 목소리.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어른이면서도 어른 같지 않은 목소리.

윤수가 뒤를 돌아보자,
교탁 앞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시온.

윤수는 본능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뭐야 이 새끼.
몰카야?
방송이야 뭐야?”

시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교탁 위에 손을 올리고,
어디선가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낡은 출석부를 펼쳤다.

“2학년 5반,
출석을 부르겠다.”

그는 이름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강 ○○.”
“이 ○○.”
“최 ○○.”

이름을 부를 때마다,
교실 뒤쪽에는 희미한 그림자들이 하나씩 자리를 채워 갔다.

윤수가 기억하는 얼굴들.
항상 옆자리에 앉아서 웃던 친구,
단톡방에서 같이 욕을 섞던 아이들,
가끔 말렸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에 한 이름이 불렸다.

“박 민서.”

교실 맨 뒷자리,
창가 쪽에 앉아 있던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자기 자리로 걸어 들어왔다.

윤수의 숨이 멎었다.

“야…
너, 뭐야.”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려다,
목이 마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는 분명히 박 민서의 윤곽이 있었다.
얼굴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몸짓, 앉는 자세, 어깨를 구부리는 버릇까지 똑같았다.

시온이 출석부를 덮었다.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다.”

“씨발, 장난 그만하라고 했지?”

윤수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순간,
눈앞 풍경이 번쩍 뒤집혔다.

책상이 뒤집히고,
의자가 넘어지고,
누군가의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났다.

윤수는 자기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이 등 뒤로 꺾였고,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야, 윤수야.
힘들면 말해.
그냥, 죽어버리면 되지?”

그날 교실에서 자신이 던졌던 말이,
이번에는 자신의 귓가에 들려왔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아니라, 자존감이 아니라,
진짜로 가 눌렸다.

“그만, 그만해…!”

윤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송실 마이크에서 말하듯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들끼리 장난이 좀 심한 것 같긴 한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담임교사의 목소리였다.
교실 천장 스피커에서 들리는 듯,
위에서 내려왔다.

“요즘 애들은 다 힘들어.
네 친구들도, ⟪다⟫ 힘든 거야.”

윤수는 몸부림쳤다.
그러나 아무도 놓아주지 않았다.

칠판 쪽에서,
시온이 조용히 물었다.

“어떻느냐.
네가 만든 교실의 공기 맛은.”

윤수는 숨을 몰아쉬며 욕설을 내뱉었다.

“네가 뭔데…
이딴 짓을 해…”

“나는 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온이 말했다.

“국가가 ‘우울증’이라고 적어버린 한 사건,
학교가 ‘아이들끼리의 갈등’이라고 묻어버린 한 죽음,
교육청이 ‘지도 강화’라는 문장으로 덮어버린 한 살인.”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사건이 요구한 불만의 무게가,
오늘 너에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윤수의 귀에,
멀리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서의 어머니였다.

“선생님들, 제 아이는요…
그냥 좀 조용한 애였어요.
잘 웃고, 잘 도와주고…
그렇게 나쁜 애 아니었어요…”

어딘가에서,
장 호진의 목소리가 겹쳤다.

“어머님, 저희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이미 떠나고 난 뒤에
누구 탓만 하는 건…
고인을 위한 일이 아니죠.”

그 말 뒤에,
조용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붙어 있었다.

합의서, 진정서, 합의금, 재발 방지대책.

모든 것이 윤수 편이었다.

시온은 교탁 위 출석부를 다시 펼쳤다.

“장 윤수.”

그가 이름을 불렀다.

순간,
교실의 모든 그림자들이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
강가의 계단 아래.

꽃다발 앞에서 어머니가 울고 서 있는 그 밤.

윤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됐지?
그냥… 그냥 장난이었잖아…”

“장난으로 된 살인이 어디 있느냐.”

시온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네가 던진 말 하나,
채팅창에 남긴 조롱 하나,
단 한 번 머리를 돌려 외면한 순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추락하기 전 마지막 계단이 된다.”

그는 손을 들었다.

칠판 위에,
흰 분필로 쓰인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이건 자살이 아니다.”

윤수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발밑이 사라졌다.

“쿵—”

몸 전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
손을 뻗을 수도, 외마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어둠이,
온몸을 한꺼번에 덮쳤다.

그리고—
정적.


6. 다음 날, 두 개의 뉴스

다음 날 아침,
〈도성일보〉 온라인판 사회면 상단에는
여전히 세광병원 기사가 걸려 있었다.

밤새 댓글은 몇 배로 늘어났다.

“이거 제대로 파헤쳐야 한다.”
“애들 죽음 가지고 돈 벌던 인간들 다 감옥 갔으면.”
“기자님, 끝까지 써 주세요. 후속 기다립니다.”

그 댓글들 사이에,
어떤 링크 하나가 조용히 올라왔다.

“관련 있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동네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링크를 따라가면,
지역신문의 오래된 기사 하나가 떴다.

[2년 전 기사] 고등학생 투신 사망…
경찰 ‘극심한 우울로 인한 극단적 선택’

사진에는,
어제 강가 제단에 놓인 것과 같은 얼굴이 찍혀 있었다.
박 민서.

윤 서연은 그 기사를 유심히 읽었다.
그리고 메모장에 사건 이름을 적어 넣었다.

“2년 전, 고등학생 투신 사망 사건 – 자살로 종결.
학교 폭력 의혹 있었으나 불기소.”

그때,
옆자리 박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야, 윤 서연.
너 기사 봤냐?”

“제 기사요?”

“그것도 있고…
이거.”

그가 모니터를 돌려 보여줬다.

[속보] 교육청 고위 간부 아들, 아파트에서 추락사…
경찰 ‘자살 가능성 높아’

이름은 가려져 있었지만,
맨 밑 기사 구석에 한 줄이 있었다.

“고인은 2년 전 같은 학교 학생의 투신 사망 사건 당시
학교 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바 있으나,
조사 결과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서연은 그 한 줄을 천천히 읽었다.

“2년 전…
같은 학교 학생…”

그림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제 읽었던 지역신문 기사,
방금 본 속보.

“설마…”

기훈이 말을 이었다.

“조용하던 사건이,
갑자기 세다랗게 복수라도 한 것 같지 않냐?
인터넷에선 벌써 ‘인과응보’ 드립 치고 난리났더라.”

실제로,
속보 기사 아래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달려 있었다.

“가해자면 그냥 벌받은 거네. 깔끔.”
“세상에 공짜 악은 없다.”
“법이 못하면 하늘이 한다.”

윤 서연은 그 댓글들을 읽다가,
어딘가 불편한 감각을 느꼈다.

“하늘이… 한다.”

그녀는 속으로 반복했다.

“하늘이 누군데.”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은 “비공개 번호”.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윤 서연 기자입니다.”

잠시 침묵.
이윽고 쉰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박 민서…
기억하시나요?”

여인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오랫동안 울다 지친 사람 특유의 허기 섞인 기운이 묻어 있었다.

“네.
지금… 방금 그 사건 기사 보고 있었습니다.”

“기자님 기사…
어제 읽었어요.
병원 얘기.
아이들 죽음이,
그냥 ‘우연’이 아니라는 말…”

그녀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

“혹시…
우리 애 얘기도…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 한 문장은,
서연에게는 또 하나의 장부가 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네.
들려주세요.
끝까지요.”

그녀는 노트를 펼쳤다.
펜을 쥔 손이 약간 떨렸지만,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같은 시간,
어딘가 낡은 원룸 방 안에서
한 시온이 장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늘 날짜 아래에,
새로운 이름을 적었다.

장 윤수 – 심판 완료.
죄목: 집단 괴롭힘과 말로 이끈 살인을, 장난이라 부르며 책임을 회피함.
국가와 교육 시스템이 외면한 교실 속 살인을, 끝까지 부정함.
형량: 피해자가 느꼈던 고립과 절망을, 끝없이 반복해서 체험함.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장부 한 페이지에는,
어디선가 누군가 남긴 댓글 한 줄처럼
짧은 문장이 하나 더 적혔다.

“법이 못하면,
하늘이 한다.”

시온은 그 문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어제 병원 앞 벤치에서 마주쳤던 윤 서연의 눈을 떠올렸다.

국가의 장부 밖에서 움직이는 전령과,
국가의 장부 안을 끝까지 파고드는 기자.

둘은 아직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서서히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2장의 막은,
그렇게 조용히 내려갔다.

그러나 이 도시의 공기는,
점점 더 많은 장부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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