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31장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1. “위에 더 큰 사람 있어요” – 익명의 댓글 하나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가
온라인에 올라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기사는
폭발적인 화제는 아니었지만,
오래,
묵직하게
읽히고 있었다.

포털 상단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뒤에도
댓글 창에는
늦게 기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국을 남겼다.

– “이 기사
세 번 읽었습니다.
저장도 했어요.”
– “예전에 제 기사도
하루 만에 내려갔는데,
그때 기분이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 “학교, 직장, 공사장…
결국 다 구조 문제네요.”

스크롤을 내리던 서연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 “기자님,
이 정도는
아직 ‘아랫선’입니다.”

닉네임은
숫자와 알파벳이 뒤섞인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조합이었다.

– “학교, 직장, 현장 기사 지우던 O.T는
‘손’에 불과해요.”

– “진짜는
면책 구조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 “그 사람은
기사에 이름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법에도,
속기록에도,
재판 기록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도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 “기자님이
‘이름과 구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마지막 줄.

– “언젠가
이름 없는 사람에 대해
쓰게 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읽는 동안
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한 줄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데,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

구조를 설계하고,
면책을 설계하고,
책임을 나눠 숨기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그녀는
댓글 작성자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기자 윤서연입니다.
방금 기사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 “혹시
말씀하신 그 ‘면책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수 분 뒤
짧은 답장이 왔다.

– “직접 만나긴 어렵습니다.”

– “대신
자료 몇 개를
익명으로 보내겠습니다.”

– “보내는 주소를
알려 주십시오.”


2. 갈색 봉투 –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이름

이틀 뒤.

신문사 1층 안내 데스크에
갈색 종이봉투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다.
손글씨로 적힌
짧은 문장 하나만 있었다.

“약속드린 자료입니다.”

봉투를 들고
서연은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갔다.

봉투 안에서는
종이 냄새와 함께
여러 장의 복사물이
쏟아졌다.

  • 오래된 공청회 자료 일부

  • 모 재단 이사회 명단

  • 모 교단 ‘사회정의위원회’ 회의록 발췌

  • 모 로펌 고문 명단

  • 모 대기업 ‘윤리위원회’ 외부 자문단 명단

서류 가장자리에
볼펜으로
작은 동그라미와 화살표가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하나의 이름이
반복해서
동그라미 안에 들어 있었다.

“강인섭”

서연은
그 이름을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한 번 읽었다.

강-인-섭.

희미하게
들어본 듯한 이름.
그러나
어디서였는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이름.

자료 곳곳에
익명 제보자가
간단한 메모를 달아 놨다.

“10년 전
학교폭력 대책 법안 자문.”

“8년 전
산재보험 제도 개정 공청회 패널.”

“5년 전
모 대기업 인권위원회 외부 자문.”

“3년 전
대형 교단 ‘사회정의선언문’
문안 자문.”

강인섭이라는 이름 옆에는
늘 비슷한 직함이 붙어 있었다.

“법학자.”
“선임 자문위원.”
“외부 공익위원.”
“재단 이사장(비상근).”

눈을 조금 좁히고 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학교폭력,
노동,
안전,
인권,
윤리.

언제나
“정의로운” 이름들이
앞에 붙어 있다.

그러나
자료의 메모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 장의 복사본 아래
익명 제보자가
짧게 적고 간 글이 있었다.

“학교폭력 피해자 보호법 초안 중
‘학교장 및 교육청 책임’ 조항 삭제에
결정적 역할.”

다른 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산재 관련 공청회에서
‘개인의 안전 의무’ 조항 강화 발언—
이후 법안에
‘근로자의 주의의무’ 조항 비중 커짐.”

또 다른 장.

“기업 인권위원회에서
‘내부 신고제도 활성화’를 강조하면서도
‘외부 언론공개 자제’를 강력하게 주장.”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책임’을 말했지만—”

“자신이 몸담은 구조의
최종 책임자 이름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재단 이사회 명단에는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사장: 강인섭
(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현 ○○교단 사회정의위원회 위원장,
모 대기업 윤리위원회 위원장)”

서연은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늘 ‘정의’의 얼굴로 등장한다.

법과 제도를 설계하고,
위원회를 만들고,
성명을 내고,
공청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말한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구조들에서는—

피해자의 책임이 늘
조금씩 더 커졌고,

‘기관’의 책임은
조금씩 더 흐려졌다.

익명 제보자는
마지막 장에
짧게 덧붙였다.

“기사에 이 이름을
직접 쓰기는
힘들 겁니다.”

“그러나
기자님이
‘이름 없는 구조 설계자’의 실체를
알고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면책의 구조
언젠가
써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무혐의’와 ‘참고인’의 패턴 – 정○○가 찾아낸 빈칸

같은 시각,
○○교도소 도서실.

정○○는
국회 속기록뿐 아니라
오래된 감사원 보고서,
법원 판결 요지 모음집,
입법조사처 보고서 등
갖가지 문서를
거의 병적으로
찾아 읽고 있었다.

오늘 펴 놓은 문서 묶음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었다.

“학교폭력 실태 및 제도 개선 방향 연구”
“산업재해 책임 구조에 관한 연구”
“언론 자유와 명예훼손 형사처벌의 개선 과제”

각각 다른 시기,
다른 기관에서 나온 자료였다.

그러나
정○○는
기묘한 패턴 하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사건 A –
학교폭력 은폐 의혹.”

“사건 B –
재개발 공사장 안전사고.”

“사건 C –
직장 내 괴롭힘 자살 사건.”

각각의 요약 끝에는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었다.

“관련 기관장은
감독 책임을 이유로
‘주의’ 조치에 그쳤다.”

“관계자 다수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일부 실무자만
징계 대상이 되었다.”

그는
여백에
작게 적었다.

“학교장은
‘주의’.”

“교육청과 교육부는
‘무혐의’.”

“재개발 조합장은
‘참고인’ 조사 후
사건에서 멀어짐.”

“시공사 임원은
사표 제출 후
다른 회사에서 재취업.”

“본사는
‘공지 미비’ 사과문으로 마무리.”

그리고
한 줄을 길게 그어
옆에 썼다.

“언제나
위쪽 두 단계의 책임은
기록에서 빠진다.”

그는
문서 하단의 각주를 보다가
어느 순간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이 보고서 작성에 귀중한 자문을 해 주신
○○법학전문대학원 강인섭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그 이름은
다른 보고서에도
비슷하게 등장했다.

“자문: 강인섭 교수(형사정책),
○○대 교수 ○○○(노동법), …”

정○○는
그 이름 아래에
작게 적었다.

“사건마다
책임의 선을
어디까지 그을지
결정하는 사람 중 하나.”

그리고
장난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서류에서
예산을 잘랐고—”

“이 사람은
서류에서
책임을 잘랐다.”

그는
한숨처럼 웃었다.

나는
숫자를 움직여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고,

이 사람은
단어를 움직여
책임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다.

둘 다
칼을 쓰지 않고
사람을 다치게 한 셈이다.

그는
노트 페이지 상단에
새 문장을 적었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책임자들이 있다.”

“보고서 말미 ‘자문위원’란에만
슬쩍 등장했다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그 사람들 중
하나의 이름이
자꾸 눈에 밟힌다.”

“강인섭.”


4. 높은 탑 위의 사람 – “나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

도심 한복판,
유리로 둘러싸인
높은 빌딩 꼭대기.

○○공익재단 이사장실.

넓지 않은 방이었다.
벽 한쪽에는
각종 상패와 감사패가
차곡차곡 걸려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책장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빽빽이 차 있었다.

“사회정의 실천상”
“인권헌장 제정 공로패”
“청소년 보호 기여상”
“노사 상생 자문위원장 공로패”

상패 하나하나에
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강인섭”

강인섭은
책상 위
도톰한 봉투 하나를
천천히 넘겨보고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법률 검토 의견’이라는
딱딱한 문구가 붙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학교폭력 관련
언론 보도 대응 방안.”

“직장 내 괴롭힘
‘개별 사안’으로 국한시키는
커뮤니케이션 전략.”

“현장 안전사고
‘예기치 못한 불행한 우연’으로
프레이밍하는 법적 논리.”

그는
한 장을 집어 들고
작게 웃었다.

“사람들은
‘법’이
정의라고 믿지.”

“그게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우리인데 말이야.”

상대편 소파에는
대기업 윤리위원회 실무자가
겁먹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사장님,
이번 건은
여론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학교, 직장, 공사장…
예전에 묻혔던 사건들까지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무슨
‘사라진 증언들’ 기사도 나오고…”

강인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봤네.”

“문장이 좋더군.”

실무자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에… 네?”

“문장이,
좋다고요?”

강인섭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자가
자기 일을
잘한 거지.”

“증언이 사라지는 구조,
기사 하나가 사람에게 주는 위안,
그게 다시 지워질 때의 상처—”

그는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원래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데.”

실무자는
눈치를 봤다.

“그럼…
이번 건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강인섭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툭툭 정리했다.

“기사 자체는
놔두게.”

“지금
그걸 직접 건드리면—”

“우리 쪽이
‘사라진 증언’을
다시 지우려고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대신,
구조를 건드리면 된다.”

“학교는
‘학교폭력 근절 캠페인’을
하나 새로 만들 거고,
회사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를
하나 더 만들겠지.”

“우리는
거기에
‘외부 자문위원’으로
들어가주면 된다.”

“그렇게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면—”

그의 눈빛이
조용히 빛났다.

“사람들은
다시
안심한다.”

“분노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희석된다.”

“기사의 문장은
혼자
오래 남지 못한다.”

실무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사장님 성함이
기사에 나오는 건…?”

강인섭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기사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각주에만
나오는 사람이다.”

“보고서 말미,
‘귀중한 자문을 해 주신 분들’
명단 정도.”

“속기록에도,
판결문에도,
1면 기사에도—”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 말은
마치
꾸준히 쌓은 경력에 대한
자기만의 자부심처럼
들렸다.


5. 상공의 장부 – 끝까지 비어 있던 칸

그 시각,
도시 위.

한 시온은
희미한 빛으로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거대한 장부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줄들이
겹겹이 적혀 있었다.

“학교폭력 은폐 사건 –
피해자: ○○, 가해자: ○○ 외 다수.
실무 책임자: ○○교사, ○○생활지도부장.
행정 책임: ○○교장 (주의).
상급 기관: ○○교육청 (무혐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 –
가해자: 팀장 ○○.
회사: 징계 위원회 구성 후 ‘견책’ 조치.
경영진: 재발 방지 대책 발표.
모 회사: 관련 없음으로 종결.”

“현장 안전사고 –
하청업체 관리자: 과실치사로 기소.
원청: 벌금형.
재개발 조합장: 참고인 조사 후 무혐의.
상위 재단 및 정치 후원 네트워크: 기록 없음.”

각 줄 끝에는
이상한 표식이
여러 개 있었다.

희미한 별표,
슬래시,
그리고 빈칸.

시온은
한 줄을 짚었다.

“여기서
책임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이 위로
이름이 없다.”

장부 한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면책 구조 설계자 –
이름: (기록 없음).
직함: (기록 없음).
위치: (복수의 구조에 걸쳐 있음).”

시온의 눈동자가
조금 가늘어졌다.

이 도시에는
칼을 휘두르는 자도 많고,

칼을 시키는 자도 많고,

칼을 감추는 자도 많다.

하지만—

칼을 쥐지도 않고,
칼을 보지도 않고,
칼자루를 설계만 해 놓고
한 번도 책임을 지지 않는 자는—

아직
이름조차
적히지 않았다.

그때
장부 한쪽에서
새 빛이
조용히 떠올랐다.

“강인섭 –
다수의 사건 구조 자문.”

“학교폭력,
산재,
직장 괴롭힘,
언론 규제 논의에 반복 등장.”

“형식상 자문이지만
실질적으로
책임 범위와
면책 구조를 설계한 흔적 다수.”

이 이름은
국가 장부,
언론 기록,
시스템 로그,
사람들의 증언이
모여
겨우 만들어낸
실루엣이었다.

시온은
장부 여백에
짧게 적었다.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이름이
기록에 없다는 사실 자체를
권력으로 만든 자.”

그리고
가느다란 선으로
그 이름을
여러 사건과
조용히 연결했다.

칼집 안의 검이
서서히
식은 숨을 뱉었다.


6. 언론사 편집회의 – “그 이름은 건드리기 힘들다”

몇 날 며칠을
자료와 사람들을 뒤진 끝에,
서연은
결국
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부장님,
시간 잠깐 괜찮으세요?”

남기호 부장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와.”

서연은
출력을 한 묶음과
핸드폰 사진 몇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이 이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강인섭.”

남기호는
자료를 힐끗 보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

“…강 이사장?”

“○○재단,
사회정의위원회 위원장,
뭐 그런 분 말하는 거야?”

“언론계에서도
모르는 사람 거의 없을 텐데.”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이
무슨 일을 해 오셨는지
아십니까?”

남기호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애매한 소리를 냈다.

“글쎄다.”

“겉으로만 말하자면—”

그는
손가락으로
공중에 이름들을 세어보았다.

“학교폭력 대책 자문,
청소년 보호 정책,
산업현장 안전,
언론 공정성 위원회…”

“이 나라에서
‘공익’이란 이름 붙은 자리에는
웬만하면
다 한 번씩 얼굴을 비추신 분이지.”

서연은
자기가 모아온 자료들을
한 장씩 넘겼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건들—”

왕따,
현장 사고,
직장 괴롭힘.

“문제를 다룬 보고서와
자문위원 명단에는
늘 이름이 나오는데—”

“정작
사건이 터질 때,
책임을 논하는 자리에는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남기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뭘 쓰고 싶은 건데.”

“강인섭이라는 이름을
직접 기사 제목에 올리겠다고?”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다만
면책 구조라는 것이
어떻게 설계되는지—”

“그 중심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그걸
구조적으로 한 번
짚어보고 싶습니다.”

남기호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윤 서연.”

“자네가
요즘
너무
위험한 길로 가는 것 같다는
생각,
안 해 봤나.”

그의 목소리는
나무처럼 건조했지만,
눈빛 안에는
희미한 긴장이 있었다.

“강인섭 같은 사람은—”

잠깐 말을 멈추고
단어를 골랐다.

“한두 명이
보호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치,
재계,
종교,
학계,
언론—”

“다 걸려 있어.”

“그 이름이
우리 기사에
‘나쁘게’ 등장하는 순간—”

그는
손가락으로
신문사 로고가 박힌 머그컵을
툭툭 쳤다.

“이 집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서연은
눈을 들었다.

“부장님은
그분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남기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늘
필요한 때
필요한 말만 한다.”

“법과 제도,
공익과 정의,
책임과 윤리.”

“근데
이상하게도—”

그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그 사람들이
참여한 구조에서
가장 큰 책임은

어디론가 사라지더라.”

“그게
우연이겠어?”

잠시 정적.

“나도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하지만—”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자네에게
‘쓰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건
안 된다.”

“구조 얘기는
계속 써도 좋다.”

“다만
그 구조 중앙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지금은
건드리지 마라.”

그 말은
망치가 아니라
묵직한 돌처럼
서연의 가슴 위에 얹혔다.

진실을
모두 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의 중심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끝까지 쓰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회의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서연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좋다.

이름을
직접 쓰지 못한다면—

그 이름이
쓰이지 못하는지,

그 구조부터
먼저 쓰겠다.


7. 응접실의 기도 –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설계자일 뿐입니다”

밤.

○○재단 건물
지하에 있는 작은 예배실.

십자가 하나와
낡은 피아노,
몇 개의 의자뿐인 공간이었다.

강인섭은
누구도 없는 예배실 맨 앞줄에
혼자 앉아 있었다.

벽에는
“정의와 자비를 행하라”라는
구절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정의와
자비라.”

“둘 다
내 평생
가장 많이 써 온 단어인데.”

그는
두 손을 모은 척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나는
칼을 쥔 적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를 때린 적도,
누구를 밀어 떨어뜨린 적도 없습니다.”

“나는
문장을 썼을 뿐입니다.”

“나는
‘법적 책임은 이 선까지’라고
줄을 그었고,
‘제도적 책임은 여기까지’라고
설명했을 뿐입니다.”

“나는
누구를 악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악이
어디까지 책임을 지면 되는지
안내해 주었을 뿐입니다.”

기도처럼 시작된 말은
점점
자기 변명으로 바뀌어 갔다.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했습니다.”

“정치인들도,
기업도,
종교도,
시민단체도.”

“모두가
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 ‘이 정도면
괜찮습니까.’ ”

“ ‘어디까지 사과하면
되겠습니까.’ ”

“나는
숫자를 정해주었을 뿐입니다.”

“사과문의 문장 수,
보상액의 자리 수,
징계 위원회 인원의 수.”

“나는
칼을 씻었을 뿐입니다.”

“칼을 쥔 손에게
‘이 정도면
깨끗하다’고 말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예배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고,
십자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8. 전령의 방 – “네가 잘라낸 문장들을 보아라”

약간 뒤,
강인섭이
예배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가
복도 끝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누군가의 시선을
분명히 느꼈다.

머리가
갑자기
아득해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벽이
천천히 뒤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야…”

그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을 때,
공간이
조용히 바뀌었다.

예배실도,
복도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인지 모를
넓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신문 지면,
보고서,
속기록,
기자 브리핑문이
끝없이 붙어 있었다.

한 장씩,
한 줄씩.

그리고
그 문장들 중
여러 군데가
붉은 선으로
긋혀 있었다.

“삭제.”

“수정.”

“톤 다운.”

“법률 검토 결과,
과도한 표현으로 판단됨.”

강인섭은
익숙한 문장들을
여기저기 발견했다.

“학교의 관리 의무가
충분히 다하지 못한 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옆에는
자신이 달았던 코멘트가
그대로 떠 있었다.

“법률상
‘관리 의무’의 범위는
다소 모호하므로,
구체적 표현은
피할 것.”

다른 벽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현장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와
무리한 공사 일정이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된다.”

옆에
자신의 메모.

“ ‘근본적인’
‘무리한’과 같은
가치 판단 표현은
삭제 권고.”

또 다른 벽.

“직장 내 상사의
반복적인 모욕과 압박이—”

그 아래에는
그가 달았던
익숙한 글씨가 있었다.

“ ‘반복적인’이라는 말은
구체적 횟수 입증이 어렵기 때문에
빼는 편이 안전.”

강인섭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건…
그냥
법률적 검토였을 뿐이야.”

“나는
위험을 줄여 준 거야.”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위험을 줄였지.”

“누구에게?”

공간 한가운데에
흰 장부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장부 안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학교폭력 피해자 A –
‘학교 책임’ 문장 삭제 후
강제 전학.”

“현장 사고 유가족 B –
‘구조적 문제’ 문장 삭제 후
개인 합의 종용.”

“직장 괴롭힘 피해자 C –
‘반복적인 모욕’ 문장 삭제 후
‘사적 갈등’으로 축소.”

장부 위에
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법률 자문: 강인섭.”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너는
위험을 줄였다.”

“학교의 위험,
회사의 위험,
재단의 위험,
정치인의 위험.”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겨질 때마다
다른 문장이 따라왔다.

“피해자의 위험은
늘었다.”

“자신을 의심할 위험,
입을 닫을 위험,
잊혀질 위험.”

“네가 잘라낸 문장만큼
그들의 목소리는
잘려 나갔다.”

강인섭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설계자일 뿐이다.”

“나는
칼을 쥔 적이 없다.”

장부 옆에
검 하나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한 시온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단지
너무 오래
많은 것을 본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래.”

시온이 말했다.

“너는
칼을 쥔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검손잡이를
조용히 잡았다.

“지금
이 칼은
너를 위해 준비되었다.”


9. 이름을 쓰는 순간 – 감쪽같은 ‘자연사’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예배실에서 강인섭의 몸은
조용히 의자에 기대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눈은 살짝 감겨 있었고,
입가에는
묘한 표정이 떠 있었다.

공손한 기도 자세.
평온해 보이는 얼굴.

다음 날 아침,
재단 직원이
예배실을 열었다가
그를 발견했다.

“이사장님…?”

어깨를 흔들어도
반응이 없자,

응급차와 경찰이
불려왔다.

의사와 경찰은
짧은 확인 뒤에
이렇게 말했다.

“급성 심장마비로 보입니다.”

“외상은 없고,
별다른 이상도 없습니다.”

“기저질환이 있었던 것 같고—”

“평소 과로도
상당하셨다고 하니.”

신문 사회면 구석에
작은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사회정의 실천에 앞장서 온
강인섭 ○○공익재단 이사장
별세.”

짧은 약력,
조문 일정,
“그의 삶은
공익과 정의의 실천이었다”는
유족과 지인들의 멘트.

어디에도
그가
어떤 문장들을 잘라냈는지,
어떤 책임의 선을 그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침묵 속으로 보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도시 위,
장부에는
딱 두 줄이 추가되었다.

“면책 구조 설계자 –
강인섭.”

“심판 방식 –
심장 기능 정지,
외상 없음,
‘자연사’로 기록.”

그리고
그 아래.

“그가 잘라낸 문장들 –
다시 기록될 준비 중.”


10. 익명의 봉투, 두 번째 – “이제 중앙이 비었습니다”

며칠 뒤,
윤 서연의 자리 위에
또 다른 갈색 봉투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이번에도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다.

안에는
짧은 메모와
몇 장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인섭 이사장의
사망 소식 들으셨지요.”

“이제
많은 구조의 ‘중앙’이
비었습니다.”

“그 자리를
누가 새로 차지하려 드는지—”

“그걸
지켜보는 것도
기자님의 일이겠지요.”

문서에는
재단 이사회 긴급회의 회의록 일부,
교단 사회정의위원회 차기 위원장 후보 명단,
대기업 윤리위원회 개편 논의 자료 등이
섞여 있었다.

여러 이름들 옆에
질문표가 붙어 있었다.

“이 사람은
어떤 문장들을
쓰고 지울 것인가.”

“이 사람은
책임의 선을
어디까지 그을 것인가.”

서연은
종이를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이
사라진 자리.

비어 있는 중앙.

그 자리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매혹적인 자리다.

권력을 쥘 수 있는 자리,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자리.

나는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 칸에
조심스럽게
한 줄을 적었다.

〈면책의 구조,
중앙이 비었을 때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한 단락을
먼저 써 내려갔다.

“한 사람이 죽었다.”

“그는
기사와 보고서의 각주에만
이름을 남기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책임의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할지
물을 때마다—”

“그는
조용히
선을 그어 주었다.”

“이제
그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선을 그으려는 손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들이
어떤 선을 그을지—”

“우리는
지켜봐야 한다.”


11. 상공의 결론 – 이름을 숨기는 자, 이름을 부르는 자

그날 밤,
한 시온은
칼을 닦으며
장부 마지막 줄을 읽고 있었다.

“오늘의 심판 –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자,
이름을 잃다.”

그 아래에
다른 줄이 있었다.

“오늘의 작은 승리 –
그가 지워 온 이름들 중
몇 개가
다시 불리기 시작했다.”

학교,
직장,
현장.

지워졌던 증언들이
조금씩
말을 되찾고 있었다.

서연의 기사,
정○○의 노트,
김성훈의 증언,
그리고
이름 모를 독자들의 댓글과 메일.

이 도시에는
여전히
이름을 숨기려는 자들이 있다.

누군가는
자기 이름 대신
직함과 기관과 위원회를 앞세운다.

누군가는
기록에서
아예 자기 이름을 빼버린다.

그러나—

시온은
칼을 칼집에 넣으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언젠가
모든 구조 옆에는
사람 이름이
함께 쓰이게 될 것이다.”

“선한 구조 옆에는
선한 이름이,
악한 구조 옆에는
심판받을 이름이.”

그리고
다음 장의 제목을
조용히 적었다.

“32장 –
칼이 다시 향하는 곳,
이름을 팔아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진 사람.”

칼은
잠시 쉬고 있었지만,
도시는
여전히
자기 이름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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