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0장 – 사라진 증언, 다시 말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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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 사라진 증언, 다시 말을 찾는 사람들
1. “그 기사 이후로…” – 괴담처럼 떠도는 한 문장
오태석 상무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신문사 안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떠돌았다.
하나는
공식적이고,
합리적이며,
병원 진단서가 보증하는 이야기였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상태에서,
급성 심장마비가 온 것 같더라.”
또 하나는
복도와 흡연실에서만
조용히 오르내리는
다른 이야기였다.
“마지막에
무슨 기사 하나를
되살리고 있다가—”
“그 순간
그냥 탁 쓰러졌대.”
“그래서
그 기사에
뭐가 있긴 한 거 아냐?”
이야기 속
“그 기사”는
대부분 정확한 제목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어렴풋한 인상 정도만
돌아다녔다.
– “청문회 기사였대.”
– “구조랑 책임이랑
이름 얘기하는 거.”
– “지웠다가,
다시 살아난 글이라던데.”
윤 서연은
누가 이름을 대지 않아도
그 기사가
자기 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이상하긴 하다.”
“기사 하나 살렸다고
사람이 죽기까지 해?”
다른 사람이
낮게 대답했다.
“죽게 만든 건
그 기사 하나가 아니겠지.”
“여태까지
죽여 온 기사들이
그 사람 위에
쌓여 있었겠지.”
그 말이
서연 귀에
작게 꽂혔다.
죽여 온 기사들.
지워 온 증언들.
그 위에
마지막 한 문장이
얹혔을 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모두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 말의 무게를
끝까지 들고
뉴스부 문을 열고 들어갔다.
2. “기자님, 제 이야기도 지워졌어요” – 첫 번째 메일
메일함에
눈에 띄는 제목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독자제보] 예전에 기사 한 번 떴다가 사라진 사람입니다
발신인 주소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예전에 어렴풋이
어디선가 지나쳐 본 듯한 느낌이었다.
메일을 열자
첫 문장이
서연의 시선을 붙잡았다.
“기자님,
며칠 전 쓴 기사 잘 읽었습니다.”
“거기 나온 ‘구조’라는 말 때문에
용기 내서 메일을 씁니다.”
본문 아래에는
화면 캡처가 첨부되어 있었다.
포털 기사 페이지.
제목은 흐릿하게 잘려 있었지만,
URL 일부와
썸네일 사진은
어렴풋이 보였다.
그 아래
커다란 회색 글씨.
“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메일은
이렇게 이어졌다.
“2년 전,
제 아이 학교에서
왕따와 폭력이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담임선생님도,
학교도
제대로 나서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 아이를
‘문제 학생’ 취급했어요.”
“그때
어떤 기자님이
우리 이야기를 기사로 써 주셨습니다.”
“학교 이름은 안 나왔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잘 짚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근데
그 기사가
하루 이틀 지나니까
사라졌습니다.”
“링크를 누르면
똑같이
404가 떴어요.”
“그때는
그냥
기술적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며칠 전
기자님 기사 댓글에서
‘사라진 기사’ 얘기가 나오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캡처를 찾아봤습니다.”
마지막 단락이
서연의 심장을
천천히 조여 왔다.
“우리 아이는
지금도
학교에서
이름 없는 애처럼 지냅니다.”
“담임도,
교장도,
그때 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주는
‘기록’이
한 번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습니다.”
“기자님,
혹시
이런 일
다른 데서도
있었나요.”
“우리는
그냥
또 한 번
지워진 건가요.”
메일 끝에는
짧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엄마,
이정은 드림.”
서연은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따라 읽었다.
이정은.
그리고
이름 없는 아이.
지워진 기사,
사라진 증언.
이건
그냥 하나의 사례가
아닐지도 모른다.
3. 두 번째·세 번째 메일 –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들의 그림자
같은 날 오후.
첫 메일을 읽고
답장을 고민하던 찰나,
메일함에
비슷한 제목이
또 하나 들어왔다.
[제보] 직장 괴롭힘 기사, 하루 만에 내려갔던 사람입니다
발신인은
한 중년 여성.
“3년 전,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팀장님이
지속적으로
폭언과 모욕을 했습니다.”
“몇 번이나
인사팀에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원만히 해결해 보라’는 말뿐이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하다가
용기 내서
외부에 제보를 했습니다.”
“그때
어느 지역신문에서
익명으로
제 이야기를 실어 줬어요.”
“팀장이
특정되지 않도록
회사명과 지역을
다 가렸지만,
그래도
누군가
우리 회사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준 것 같아서
조금은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도
이틀 만에
사라졌습니다.”
첨부된 캡처 화면에는
또 다른 404 메시지가 떠 있었다.
“기자님 기사 보고
혹시나 싶어
예전에 저장해 둔
화면을 찾아봤습니다.”
“링크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퇴사했고—”
“그 팀장님은
아직도
그 회사에
잘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 역사에서
제가 겪은 일은
공식적으로는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걸
받아 적어 줬던 기록도
사라졌으니까요.”
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학교,
직장.
사라지는 기사들,
반복되는 404.
그리고
그날 밤,
한 통의 메일이 또 왔다.
[문의] 예전에 ‘현장 안전’ 문제로 취재 받았던 유가족입니다
“남편은
재개발 공사 현장에서
안전사고로 죽었습니다.”
“회사 측은
‘개인 부주의’라고 했고—”
“저는
현장 구조 문제와
무리한 공사 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기자님이
그 얘기를 듣고
기사를 내 주셨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기사 제목이 바뀌고,
마지막 부분이 잘려 나갔습니다.”
“이틀 뒤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 일을
‘지워버린’ 사람과
지금 기자님 기사에서 말하는
‘기록을 없애는 손’이
같은 건지—”
“이제 와서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메일이 쏟아지고 있었다.
삭제된 기사,
바뀐 제목,
사라진 증언.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비슷한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겪은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된 것 같습니다.”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책상 모서리를 꽉 쥐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록’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건—
그 사람들의 고통까지
같이 지워졌다는 말이다.
이 메일함은
지금
지워진 사람들의
대기실이다.
4. 로그를 뒤지는 손가락 – “사용자: O.T.”
그날 밤,
퇴근 시간 이후.
한 지우는
온라인 뉴스 시스템 서버에
접속해 있었다.
모니터에는
복잡한 로그 화면이 떠 있었다.
“진짜
이거
나까지 같이 짤리는 거 아니지?”
지우가
반쯤 장난,
반쯤 진심으로 물었다.
서연이 말했다.
“안 알려줄게.”
“오늘 이 화면 본 사람
너랑 나 말고는
없었다고 할게.”
지우가
웃으면서도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좋아,
그럼 나도
히어로 코스프레 한 번 해보지 뭐.”
그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사라진 기사들이
대략 어느 시기인지
범위 좀 줘 봐요.”
서연이
메일들에서 받은 날짜들을
종이에 적어 보여 주었다.
2년 전,
3년 전,
6개월 전.
학교 폭력,
직장 괴롭힘,
공사장 안전 사고.
지우는
기간 필터를 설정하고
“노출 상태 변경” 로그를
추렸다.
모니터 상단에
긴 목록이 떴다.
“여기, 봐요.”
“게시 후
24~48시간 이내에
‘공개 → 비공개’로 바뀐 기사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목에
‘학교’, ‘직장’, ‘현장’, ‘폭력’, ‘갑질’
이런 키워드 들어가는 것만.”
필터를 다시 걸자
목록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지우가
한 줄씩 내려 읽다가
멈췄다.
“여기.”
“사용자” 항목에
익숙한 이니셜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용자: O.T.”
“사용자: O.T.”
“사용자: O.T.”
지우가 말했다.
“이니셜로 로그 남기는 사람
우리 쪽에 한 명밖에 없죠.”
“오태석 상무.”
서연은
머릿속의 퍼즐이
서서히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그리고
다른 매체들에서—
로그에 남은
O.T라는 이니셜.
사라진 기사들,
지워진 증언들.
지우가
다른 화면을 불러냈다.
“이건
우리 쪽 말고
제휴 매체들의
노출 조정 로그.”
그 목록에도
같은 이니셜이
여러 번 박혀 있었다.
“교내 폭력 기사
메인 노출 해제.”
“직장 내 괴롭힘 기사
추천 알고리즘 가중치 하향.”
“현장 안전 사고 기사
최하위 섹션으로 이동 후
비노출.”
모든 행의 끝에는
같은 이름.
“담당자: O.T.”
지우가 낮게 말했다.
“…이 사람이
실질적으로
디지털 장부를
관리했던 거네요.”
“어떤 기사가
세상에 남고,
어떤 기사가
지워질지.”
“어떤 이름이
기록에 남고,
어떤 이름이
404가 될지.”
서연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직접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직접
공사장에 서 있지도 않았고—
직접
아이를 밀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삭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증언은
세상에서
한 번 더 죽었다.
그는
세상을
칼로 벤 게 아니라,
기록에서
지워 왔다.
5. 교도소 TV 옆의 메모 – “이름 없는 피해자들의 줄”
며칠 뒤,
○○교도소 도서실.
정○○는
TV 뉴스를 보다가
하단 자막에 뜬
짧은 속보 하나를 보았다.
“대형 디지털 미디어 그룹
오태석 상무,
사무실에서 쓰러져 사망.”
그는
볼륨을 조금 높였다.
뉴스 앵커가
형식적인 멘트로
그의 죽음을 전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그 옆 화면에는
흐릿하게 처리된
회사 전경 사진만
잠깐 비쳤다.
그 뉴스는
곧
다른 사건,
다른 사고,
다른 정치 일정에 밀려
사라졌다.
그러나
정○○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기억과
겹쳐졌다.
국회 속기록.
삭제된 기사들.
누군가의 손가락이
노출과 비노출을
결정하던 로그.
그는
노트를 꺼내
새 페이지를 펼쳤다.
상단에
제목을 적었다.
“이름 없는 피해자들의 줄”
그리고
그 아래에
점 하나를 찍었다.
“○○중학교 2학년 –
이름 없음,
왕따 피해자.”
또 하나.
“무명 사원 –
직장 괴롭힘 피해자,
기사 하루 만에 삭제.”
또 하나.
“○○ 재개발 현장 –
안전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이름은 기사에서
‘A씨’로만 표기되었다가
기사가 사라짐.”
그는
작게 썼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국가 장부에도,
회사 장부에도
제대로 쓰인 적이 없다.”
“한 번 쓰였다가
지워졌다면—”
“그건
아무도 보지 못한
낙서에 불과하다.”
그는
TV 화면을 다시 보았다.
오태석 상무의 이름은
정작
뉴스에서는
한 번도 호명되지 않았다.
그저
“모 미디어 그룹 임원 A씨”라고만
표기되었다.
정○○는
씁쓸하게 웃었다.
“…장부를 찢던 사람도
마지막엔
이 세대의 기록에서
‘A씨’가 되는구나.”
“제 이름도
결국
판결문 바깥에서는
누군가의 기억 속 ‘그 사람’일 뿐이겠지.”
그는
노트 끝에
짧게 덧붙였다.
“이름을 지우던 자가
자기 이름을 잃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지워온 사람들의 이름을
누군가는
다시 불러야 한다.”
6. 세 명의 증언자 – “우리 이야기를 합쳐 써 주실래요?”
며칠 동안
메일함을 지켜보며
서연은
세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왕따 피해 학생의 어머니,
직장 괴롭힘 피해자,
현장 사고 유가족.
각각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그들과 마주 앉았을 때,
첫 마디는
세 사람 모두
비슷했다.
“기자님,
제 이름은
기사에 안 써도 됩니다.”
“우리 아이 이름도,
제 이름도,
남편 이름도—”
“굳이
안 써도 돼요.”
그러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 말 뒤에 숨은
다른 뜻이
서서히 드러났다.
학교 폭력 피해 학생의 엄마,
이정은이 말했다.
“그때 기사 한 번 떴을 때—”
“아이 표정이
조금 밝아졌어요.”
“ ‘엄마,
나만 미친 게 아니었어.’ ”
“ ‘어딘가에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어른이
있다는 거잖아.’ ”
“근데
그 기사가
사라지고 나니까—”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아이 말이
다시
달라지더라고요.”
“ ‘역시
내가 잘못 본 거겠지.’ ”
“ ‘이 학교가
정상이고—’ ”
“ ‘나만
이상한 거겠지.’ ”
직장 괴롭힘 피해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름 필요 없어요.”
“어차피
회사는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그 팀장님도
아직 말단 직원들한테
욕하고 있을 거예요.”
“근데
한 가지는
꼭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팀장님이
매일같이 했던 말.”
“ ‘어차피
니가 말해 봤자
아무도 안 믿어.’ ”
“ ‘기사?
그런 거
나왔다가 다 내려.’ ”
“그 말이—”
그녀는
말끝을 삼켰다.
“사실이었더라고요.”
현장 사고 유가족은
조용히 말했다.
“남편이 죽은 현장에
다시 가 봤어요.”
“사고 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요.”
“거기
아무 표시도 없더라고요.”
“사고 지점 표시도,
추모 글도,
아무것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자가 와서
사진 찍고
얘기 들어 주고
기사 한 번 썼을 때—”
“딱
그 이틀 동안만.”
“그 현장에
‘사람이 죽었다’는 표시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기사 내려간 뒤로는—”
그녀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제 남편이
이 나라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세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전혀 다른 사건,
전혀 다른 공간.
그러나
“사라졌다”는 감각만큼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서연이 물었다.
“세 분의 이야기를—”
“각각의 사건으로 쓰는 대신—”
“하나의 기사로
같이 묶어서 써도 될까요.”
“ ‘사라진 증언들’이라는 이름으로.”
이정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우리 이야기가
또
사라지지 않을까요.”
서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그녀는
손에 쥔 자료철을
한 번 꼭 잡았다.
“한 번 사라졌던 기록들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쓰겠습니다.”
“사건을 처음 알리는 기사가 아니라—”
“한 번 세상에 나왔다가
지워진 기록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다시 죽였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지우는 손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직장 괴롭힘 피해자가
물었다.
“그 사람 이름까지
쓰실 수 있어요?”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법적으로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방식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니셜 정도는
쓸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사람이 했던 일,
남긴 로그,
영향을 받은 기사들을
나열할 수는 있습니다.”
“한 사람이
칼을 들지 않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는지—”
“그 구조를
보여 줄 수는 있어요.”
현장 사고 유가족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써 주세요.”
“우리가
뭘 바라는지도
써 주세요.”
“우리는
지금 당장
누가 감옥 가는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이마를 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일이
이 나라에서 일어난 일로
기록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아니라.”
그 말은
이 소설의
첫 장에서부터
어딘가 기다리고 있던 문장처럼
서연의 가슴 안에
깊게 들어왔다.
7. 기사 한 편 –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자료를 모으고,
옛 기사를 뒤지고,
로그를 분석한 끝에
서연은
새 기사 한 편을 완성했다.
제목은
오랫동안 고민하다
이렇게 정했다.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 –
삭제된 기사들이 남긴 상처의 기록〉
리드 문단에는
이 문장으로 시작했다.
“기사는 한 번 올라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학교 폭력,
직장 괴롭힘,
현장 안전사고.”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인데도—”
“세상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겹겹이 엮여 들어 있었다.
왕따 피해 학생의 엄마,
직장 괴롭힘 피해자,
현장 사고 유가족.
실명은 쓰지 않았지만,
그들이 겪은
구체적 장면들,
지워진 기사들,
그리고 404 화면의 캡처들이
기사 한가운데
삽입되어 있었다.
중간 부분에는
이런 문장도 들어 있었다.
“이 기사들이 사라지는 순간,
피해자들은
두 번째 상처를 입었다.”
“처음 상처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공사장에서 받았다.”
“두 번째 상처는—”
“세상이
그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 때
생겨났다.”
그리고
한 단락에는
이니셜 세 글자가 있었다.
“디지털 노출 조정 로그에는
특정 사용자의 이니셜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사용자: O.T.”
“학교 폭력 기사,
직장 괴롭힘 기사,
현장 안전 기사—”
“이들 기사의
‘노출 해제’와 ‘삭제’ 옆에는
늘
같은 이니셜이 남아 있다.”
“그는
사라진 기사들의
이름 없는 편집자였고,
삭제된 증언들의
디지털 장부를
관리하던 사람이다.”
끝부분에는
이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기자는
진실을 모두 쓸 수 없다.”
“그가 쓸 수 있는 건
‘허용된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쓰였다가 지워진 사실들을—”
“다시 불러내
기록하는 일 역시
우리의 몫이다.”
“이번 기사 역시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이 문장을 읽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들이
이 나라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피해자들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원고를 다 쓰고 난 뒤,
서연은
한참 동안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또 사라질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의 손가락에 의해
비노출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도
적어도
한 번은—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시 말을 찾았다는 사실을
장부에 적어야 한다.
그녀는
마침내
전송 버튼을 눌렀다.
8. 상공의 전령 – 칼 대신 저울을 잡다
그 시각,
한 시온은
도시 위에서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다.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왕따 피해 학생 –
‘기사 한 번 떴다가 지워진 뒤,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고 말함.”
“직장 괴롭힘 피해자 –
‘팀장이
“기사 나와도 금방 내려간다”고 했던 말이
사실로 증명되었다고 느꼈다고 진술.”
“현장 사고 유가족 –
‘남편이
이 나라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고 진술.”
그 옆에는
다른 항목.
“기자 윤 서연 –
삭제된 기사들의 메일을 모아
‘사라진 증언’ 기사 작성.”
“기사 제목 –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
그 아래에는
짧은 메모.
“이 기사가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신고’ 버튼과
‘삭제’ 요청의 대상이 될 것인지
주시할 것.”
시온은
검 대신
다른 것을 손에 들었다.
작은 저울.
한쪽에는
사라진 기사들,
지워진 증언들,
삭제 로그.
다른 쪽에는
다시 말을 찾은 기사,
다시 불린 이름들,
복원된 문장들.
저울이
천천히 흔들리다가
한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었다.
“오늘은—”
그는
중얼거렸다.
“칼을 쓰지 않겠다.”
“대신,
저울을 보겠다.”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더 무게를 싣는지.”
그는
서버실과 편집국,
법무팀과 광고 대행사,
정치인의 휴대전화와
포털의 알고리즘을
한꺼번에 내려다보았다.
어딘가에서는
불편한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 기사
표현이 조금 과한 것 같은데…”
“우리 회사 이름은
안 나왔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 알 것 같아요.”
“노출 조정
한 번 검토해 볼 수 있을까요.”
다른 어딘가에서는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 “이거
예전에 사라졌던 기사들 얘기네.”
– “나도
비슷한 일 겪었는데,
기사 하루 만에 내려갔었음.”
– “지워진 증언…
표현 미쳤다.”
– “이건
저장해 둬야겠다.”
또 다른 어딘가에서는
어느 젊은 편집자가
로그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제까지는
‘O.T.’가
이런 거 많이 했었는데…”
“이제
그 자리는
비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 버튼을
어느 쪽으로 눌러야 할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시온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장부를 찢을 수도 있고,
기록을 살릴 수도 있다.
내 칼은
그 중
가장 뻔뻔한 손에만
내려가면 된다.
오늘 밤,
그의 검은
칼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저울의 침이
조금씩 움직였다.
9. 교도소와 방 한 칸 – 기록이 말을 되찾는 날
저녁,
○○교도소 도서실.
정○○는
수감자용 신문에서
작은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종이의 한 구석.
그러나
흑백 활자 속에서도
문장은
선명했다.
“사라진 증언들,
다시 말을 찾다.”
그는
그 기사 전체를
그 자리에서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쳐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적어도
이 문장을 읽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들이
이 나라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피해자들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펜 끝을 멈추고
작게 웃었다.
“…그래,
이 문장만으로도
오늘은
기록이
이긴 날이다.”
정준호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형님,
오늘은
뭐라고 쓸 거예요?”
정○○는
새 제목을 적었다.
“오늘의 기록 –
사라진 증언들이
말을 되찾은 날.”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언젠가
이 감방 문이 열릴 때—”
“나는
내 장부와
국가 장부,
그리고 이런 기사들을
한꺼번에 펴 놓고
누군가와
같이 보고 싶다.”
“그때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당신들이 지우려 했던 것들 중
어떤 것들은
끝까지 남았습니다.’ ”
10. 작은 결론 – 칼과 이름과 기록 사이
밤.
도시 위,
한 시온은
장부를 덮고
검을 칼집에 넣었다.
오늘 장부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의 결론 –
사라진 증언들이
말을 되찾았다.”
“칼이 쓰이지 않은 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판이 없었던 날은 아니다.”
“기록을 지우던 자가
자기 이름을 잃었고,
기록에서 사라진 자들이
다시
이름 없는 존재에서
‘피해자’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칼을 들고 내려갈 수도 있고,
장부만 들고 내려다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땅에서
누가 자기 손으로
자기 기록을 쓰려 하느냐이다.
오늘,
세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다시 말했고,
한 기자는
그 이야기를
다시 적었으며,
한 도시의 눈 몇 쌍은
그 문장을
끝까지 읽었다.
그 정도면,
이 긴 이야기의 한 챕터로서는
충분했다.
다음 장의 제목이
천천히 떠올랐다.
“31장 –
칼이 다시 쓰이는 날,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 한 사람.”
그리고
그 이름은
아직
장부 어딘가
빈 칸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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