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9장 – 지워진 기사, 사라진 증언

29장 – 지워진 기사, 사라진 증언


1. “기록되었습니다” – 그리고 몇 시간 후, “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청문회가 끝난 지
사흘째 되는 아침.

윤 서연의 휴대전화는
알림 소리로 쉴 새 없이 울렸다.

– “서 기자님, 이번 기사 진짜 좋았어요.”
– “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그 문장,
너무 세게 박혔습니다.”
– “링크 좀 다시 보내 주세요,
친구들 단톡에 뿌리게.”

그녀가 쓴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이름을 구조 옆에 쓴 날 –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고 말한 사람들〉

서두에는
청문회장의 세 문장을 배치해 두었다.

“저는 이 구조에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 김성훈

“제 이름도 그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합니다.” – 민도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그 옆에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합니다.” – 청문회장 발언

서연은
이 세 문장을
“오늘 한국의 공식 장부에 새로 쓰인 문장”이라고 불렀다.

기사는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SNS에서 공유 수가 올라가고,
댓글에선
찬반이 격하게 부딪혔다.

– “그래, 이게 진짜 구조 얘기지.”
– “자기들도 책임 있다며 퉁치려는 거 아님?”
– “그래도 최소한 ‘내 책임도 있다’고 말한 금융인, 처음 본다.”
– “기자들이 또 영웅 만들기 시작했다 ㅋㅋ”

정오 무렵,
포털 메인 한켠에
짧은 시간이나마
기사 링크가 걸렸다.

“청문회 현장 르포 –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고 말한 날”

서연은
잠깐 그 화면을 캡처해 두었다.

그래,
이 하루만이라도—

이 문장들이
사람들 눈앞에 떠 있는 날이 있자.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겼을 때,
지인이 보낸 메시지 하나가
화면 맨 위로 튀어 올랐다.

– “어? 기사 왜 안 떠요?”
– “아까 읽다 말았는데,
지금 누르면
‘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나와요.”

서연의 심장이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브라우저를 열고
자기가 쓴 기사 링크를 눌렀다.

푸른 로고가 뜨고,
로딩 바가 천천히 차오르더니—

흰 화면 위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주소를 다시 확인해 주세요.”

잠깐 동안,
그 문장은
“사라진 사람”의 부고처럼 보였다.


2. 편집국 – “서버 문제”라는 이름의, 말줄임표

신문사 7층 온라인 뉴스부.

모니터들 사이로
낮게 깔린 욕설과 한숨이
섞여 흘러다니고 있었다.

“아니,
왜 자꾸 404가 떠.”

“CMS에서 살아 있는데
포털 쪽에서만 에러 나?”

“서버팀에 전화 좀…”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기사
왜 내려갔어요?”

옆자리에서
한 지우가
화면을 뒤적이며 말했다.

“여기 내부 페이지에서는 떠.”

그는
모니터를 돌려 보여줬다.

CMS 편집 화면.
제목, 본문, 사진, 태그—
모두 그대로였다.

상단에는
녹색 글씨가 하나 서 있었다.

“상태: 비공개(Internal Only)”

지우가
마우스로 가리켰다.

“여기,
상태 값이 바뀌었어.”

“아침까지만 해도
‘공개’였는데.”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누가
바꿨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부장님 방에
전화 왔더니
그 뒤로 갑자기…”

말은 거기서
자연스럽게 끊겼다.

“서버 문제라던데?”

어설픈 변명은
늘 그렇듯
주어가 없었다.

온라인 부장
남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연 쪽으로 다가왔다.

“윤 기자.”

“잠깐
들어오지.”


3. 남기호 부장의 방 – “우리가 쓰는 건 진실이 아니라, 허용된 사실이야”

작은 부장실.
벽에는 예전 특종 기사들이
액자에 들어 걸려 있었다.

“정권의 심장부를 겨누다”
“검찰, 내부 비리 수사 착수”
“병원 구조조정의 그늘”

남기호는
한때
이 신문사의 간판 기자였다.

이제 그는
간판을 다는 사람이 아니라
간판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커피 믹스를 한 잔 건네며 말했다.

“일단
앉아.”

서연은
커피를 받지 않았다.

“제 기사
왜 내리셨습니까.”

남기호는
한숨부터 쉬었다.

“ ‘왜’라는 말 속에
이미 답이 있지.”

“전화가 왔어.”

“여기저기서.”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은 빗금을 그었다.

“광고주,
정치권,
금융권.”

“다들
같은 말은 아니었지만—”

“결론은
비슷했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건조해졌다.

“ ‘좋은 기사인데,
구조라는 말이
너무 넓게 쓰였다.’ ”

“ ‘개인의 양심을
구조 안에서 같이 칭찬하는 건 좋지만—’ ”

그는
어딘가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겼다.

“ ‘회사 전체를
마치 유죄 선고 받은 것처럼
묘사하는 건
과한 일반화 아니냐.’ ”

서연이 말했다.

“전
판결문 쓴 게 아닙니다.”

“어제
그 자리에서
실제로 나온 문장들을
그대로 썼을 뿐이에요.”

“김성훈은
‘완벽한 피해자는 아니다’라고 했고,
민도윤은
‘내 이름도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시킨 말도 아니었고,
대본도 아니었어요.”

“전 그냥—”

단어를 고르다
그녀는
단단하게 말했다.

“현장 기록을
남겼을 뿐입니다.”

남기호가
조용히 웃었다.

“윤 서연.”

“네가
아직
너무 젊은 기자라는 증거야.”

그는
책상 위의 펜을 들었다.

“우리가 쓰는 건
‘진실’이 아니라—”

펜 끝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 ‘허용된 사실’이야.”

잠시 정적.

“진실은
각자 가슴에 품고 있어.”

“회사,
정치인,
독자—”

“다들
자기 진실이 있지.”

“우리 일은
그 중에서
어디까지 꺼내 보여 줄지
정하는 거야.”

서연이
마주 쏘아봤다.

“그럼
어제
국회에서 남긴 기록은요.”

“속기록에
그대로 남을 문장들은요.”

“ ‘구조를 쓸 때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한다’는 말은요.”

남기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국회 기록은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린
신문사야.”

“국가 장부에
뭐라고 쓰이는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 지면과 사이트에
뭐가 올라가고 내려가는지는—”

그는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켰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지.”

“그게
내가 받는 월급의 이유고,
너희가
내 지시를 들어야 하는 이유야.”

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남기호는
서랍에서
프린트 한 장을 꺼냈다.

“온라인팀에서
수정안을 하나 뽑아 봤다.”

종이 위 제목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청문회, “책임 나눔” 선언…
ESG 개선 의지 밝힌 여야·금융권〉

서두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었다.

“청문회에서는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는 말과 함께,
각 주체들이
‘구조 개선을 위한 공동 책임’을 강조했다.”

개별 인물의
날선 문장들은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대신
익숙한 형용사들이
공간을 채웠다.

“우리 사회”,
“중요한 계기”,
“향후 과제”…

남기호가 말했다.

“이 버전으로
다시 올릴 거다.”

“이름과 구체적 문장들은
조금 덜어내고—”

“대신
‘구조 개선 의지’ 쪽으로
수위를 낮추자.”

서연이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

“반대하면요.”

남기호는
그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그러면
이 기사는
‘내부 참고용’으로만 남겠지.”

“네 이름도
어디에도
남지 않을 거고.”

“어제
청문회에서 들은 문장들은—”

그는
창밖을 한번 보았다.

“사흘쯤 지난 뒤
사람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질 거야.”

“우리 도움 없이도.”


4. 사라지는 링크들 – “기억이 지워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기분”

그날 저녁,
윤 서연은
혼자 편집국 구석 자리에 앉아
바뀐 기사의 초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두 개의 창이 떠 있었다.

왼쪽에는
자신이 쓴 원고.
이미 비공개 처리된 상태.

오른쪽에는
수정된 버전.
무난한 문장들로만 채워진 기사.

두 창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 하나가
가로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이쪽에는
내가 본 문장이 있고,

저쪽에는
이 집이 허용하는 문장이 있다.

둘 사이에
내 이름이 서 있다.

메신저 알림이
하나 떴다.

– 남부장:
“윤 기자, 수정안 검토했으면
‘승인’만 누르면 된다.”

“오늘 안에 처리가 안 되면,
그 기사 자체는
그냥 없었던 걸로 하겠다.”

그 말은

이런 의미였다.

“너의 기록을
어느 장부에 남길지
지금 결정해라.”

서연은
마우스 커서를
‘승인’ 버튼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가
또 내렸다.

‘진실’과
‘허용된 사실’ 사이에
서 있는 게 기자라면—

나는
어느 쪽으로
한 발 더 가까이 갈 것인가.

잠시 후,
그녀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원고 전체를 선택해
개인 메일 계정으로 보내는 창을 열었다.

수신인:
서연 자신의 이메일.

제목:
“청문회 기사 – 원본”

본문:
아무 말 없이
그냥 전체 텍스트를 붙여 넣었다.

그리고
전송.

누군가
이 기록을
지울 수는 있어도—

내가
내가 쓴 문장을
잊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다.

이메일 전송 완료 알림이 뜨자,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승인’ 버튼을 눌렀다.

CMS 화면 상단에
녹색 글씨가 바뀌었다.

“상태: 공개 (수정 버전)”

바뀐 기사는
위험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해했고,
바로 그 때문에
무기력했다.

SNS에는
이상한 빈자리가 생겼다.

– “아까까지 있던 기사 어디감?”
– “링크 눌러보니
내용이 좀 달라진 듯?”
– “아니 내가 봤던 문장이
없는데… 플래그 멘트였던 것 같은데…”
– “기억 조작되는 기분; 내가 헛것을 읽었나 ㅋㅋ”

누군가는
캡처해 둔 화면을 올렸고,
누군가는
새 버전과 비교해
빠진 문장들을 찾아냈다.

– “ ‘구조 옆에 이름을 쓰자’
이 문장 어디 갔냐?”
– “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그 대목 통째로 빠짐.”
– “삭제 아니고 수술이네, 수술.”

그러나
포털 메인에서는
이미 다른 기사들이
그 자리를 채워 버린 뒤였다.

도시는
오늘도
새로운 뉴스들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5. “보이지 않는 편집자” – 장부를 찢는 사람의 변명

같은 시각,
도심 한복판
유리 빌딩 15층.

대형 디지털 미디어 그룹의
콘텐츠 전략 본부.

유광 책상 위에
모니터 세 개가 나란히 서 있고,
각 화면에는
실시간 트래픽 그래프와
SNS 반응,
클릭률 수치가 떠 있었다.

오태석 상무.

이 그룹 산하
여러 언론사의
디지털 편집 전략을 총괄하는 사람.

그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여러 기사들을
휙휙 넘겼다.

“이 기사,
타이틀 톤 다운해.”

“이건
포털 제휴사 기준에
걸릴 수 있으니까
표현 좀 순하게 바꾸고.”

“이건
광고주 사안이니까
디폴트로 비노출.”

그의 업무는
간단했다.

“무슨 기사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위에
떠 있을 것인가.”

그 결정권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책상 한쪽,
메일함에는
새로운 메일이 하나 깜빡이고 있었다.

제목:

“[긴급] M사 및 관계사 관련 기사 노출 조정 요청”

발신인은
직접적으로
M사라고 쓰지 않았다.

대신
중간에 있는
광고 대행사 로고가
붙어 있었다.

“최근 귀사의 모 계열사 온라인 기사 중
금융투자 상품 및 구조에 대한 내용이
다소 과도하게 일반화되어
시장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특정 회사와 인물의 실명이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법률적 분쟁 가능성을 고려하여
노출 범위 조정 및
표현 완화를 검토해 주시기를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이메일 하단에는
짧은 한 줄이 추가로 적혀 있었다.

“추가 협의 필요 시
○○당 정책위원회 수석과도
논의 가능하니
편히 말씀 주십시오.”

오태석은
그 한 줄에서
이 요청의 무게를 가늠했다.

광고주
+
정치 라인.

이 둘이 동시에 움직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는
관련 링크를 클릭했다.

화면에는
윤 서연의 기사가 떴다.
물론
수정 전
원본 버전이었다.

그는
천천히
몇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고 말한 사람들.”

“그들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구조 옆에 세웠다.”

“국가 장부는
오늘
처음으로
구조와 이름을
같은 문장에 썼다.”

잠시 동안,
그는
기사에 잠겨 있었다.

잘 썼네.

이래서
귀찮은 거야.

기사가 이렇게
너무 잘 써져 있으면—

지우기도
힘들어져.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한 명이
기사 하나 지운다고
세상이 바뀌나.”

“어차피
사람들
며칠 뒤면
다 잊을 텐데.”

그러나
손은
정확히 움직이고 있었다.

  • 노출 범위: 전체 → 일부 제휴사 제한

  • 메인 노출: 해제

  • 추천 알고리즘 가중치: 하향 조정

  • 타이틀: 감정적 어휘 제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정 요청’ 칸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특정 회사·인물 실명 반복 부분
법률 리스크 우려.
구조 비판은 유지하되
표현 톤 다운 요망.”

“가능하면
‘구조 개선’ 프레임으로 전환.”

그는
저장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로그에는
이렇게 남았다.

“사용자: 오태석
17:42 – 기사 28471 노출 설정 변경
17:43 – 기사 28471 수정 요청 전송”

그가 내린 결정은
손가락 몇 번 움직인 것으로 끝났지만,
그 움직임은
도시 곳곳의 화면에서
한 문장씩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창으로 넘어가며
혼잣말로 덧붙였다.

“난
그냥
필터일 뿐이야.”

“세상을 검열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우리 회사 문을 잠그지 않게
조절하는 거지.”

“장부를 찢는 사람은
따로 있어.”

“나는
그 장부를
살려 두는 선에서
선만 그을 뿐이야.”

그는
믿으려 했다.

정말로
그렇다고.


6. 교도소 공중전화 – “링크가 사라졌다는 말은, 기록이 사라졌다는 말”

○○교도소,
하루에 한 번 허용되는
공중전화 시간.

정○○는
수화기를 귀에 댔다.

반대편에는
아들이 있었다.

“아빠,
지난번에 말한 기사—”

정○○가 물었다.

“그 기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윤…
서연?”

아들이 대답했다.

“응, 맞아.”

“아빠가
속기록이랑 같이 읽어 보고 싶다고 해서
즐겨찾기 해 놨는데—”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근데
링크가 사라졌어.”

“지금 누르면
404 떠.”

정○○의 손이
살짝 떨렸다.

“사라졌다고?”

“아예…?”

“수정도 아니고?”

아들이 말했다.

“다른 버전으로
새로 올라오긴 했는데—”

“아빠가 말한 그 문장들—”

수화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이름도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
‘구조 옆에 이름을 써야 한다’—”

“그런 건
새 기사에는 없네.”

“그냥
‘구조 개선 의지를 밝혔다’ 정도?”

정○○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국가 장부에는
기록이 남았는데—

신문 장부에서는
문장이 지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느 장부가
남게 될까.

그는
억지로 목소리를 다잡았다.

“그래도
그 기자 이름은
기억해 둬라.”

“언젠가
다시
그 이름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들이 웃었다.

“아빠가
요즘 이름에 집착하네.”

정○○는
따라 웃었다.

“응.”

“이제야
성과 이름이
숫자보다
더 무섭다는 걸
알아버려서.”

수화기를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정○○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교도소 담장 위로
보이는 하늘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도
어딘가
날아가는 점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저 위에서—

누군가는
이 모든
삭제와 수정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7. 전령의 상공 – “장부를 찢는 손을 찾았다”

밤.

한 시온은
도시의 불빛 위
어느 빌딩 옥상에
조용히 서 있었다.

오늘 그가 펼친 장부에는
숫자 대신
이상한 기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17:42 – 기사 28471 노출 설정 변경”
“17:43 – 기사 28471 수정 요청 전송”
“18:05 – 기사 28471 내부 비공개 전환”
“19:13 – 기사 28471 수정 버전 재공개”

그 옆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용자: 오태석”

시온은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천천히 짚었다.

“오태석.”

“직함:
콘텐츠 전략 총괄 상무.”

“권한:
기사 노출, 비노출,
삭제, 복구,
알고리즘 가중치 조정.”

그는
장부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몇 년 전
어느 지방 도시에서
학교 폭력 피해 학생의 증언 기사.

“게시 3시간 후
비공개 전환.”

메모.

“가해자 측 부모,
지역 유지 겸 학교 이사.”

또 다른 페이지.

직장 내 괴롭힘 제보 기사.
총기 없는 군대에서 일어난
“보이지 않는 구타”에 대한 고발.

“메인 노출 0,
내부 ‘인기 기사’ 알고리즘에서 제외.”

메모.

“광고주,
해당 회사와 협력 관계.”

또 다른 페이지.

지역 토건 비리,
환경 파괴 문제를 다룬 기사.

“업데이트 명목으로
제목 완화,
마지막 세 문단 삭제.”

메모.

“재개발 추진 위원회,
여야 의원 후원 기반과 연결.”

모든 기록 옆에는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용자: 오태석”

시온은
장부 여백에
한 줄을 적었다.

“이름을 숫자로 바꾸는 자
– 장부를 찢는 손.”

그리고
또 한 줄.

“이름을 지운 자는
자기 이름도
지워질 준비를 해야 한다.”

칼집 안에 있던 검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지금까지
몇 장에 걸쳐
시온은
칼을 꺼내지 않고
기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
기록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어제
성벽 위에서
겨우 쓰인 문장들이—

오늘
누군가의 손가락 몇 번으로
지워졌다.

이것이
다시 반복되면—

결국
어느 날
성벽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는
장부를 덮었다.

그리고
칼집에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날이 밤공기를 마셨다.


8. 심야의 편집실 – “삭제” 버튼을 누르는 손의 마지막 장면

밤 11시 반.

대형 디지털 미디어 그룹 사무실.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한 뒤라
층 전체는
푸른 모니터 불빛과
에어컨 소음만 남아 있었다.

오태석은
마지막으로
큐레이션 보드를 확인하고 있었다.

뉴스 카드들이
타일처럼 늘어서 있고,
각 카드에는
“노출 중”, “비노출”, “추천 상단” 같은 표식이 붙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최종 승인자”였다.

책상 위에
전화기가 하나 있었다.
오늘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렸던 전화.

– “그 기사
조금만 톤 다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우리 회사 이름이
너무 자주 나와서요.”
– “법적 문제 생기면
서로 힘들어지잖아요.”

오태석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검열”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다른 단어를 골랐다.

“관리.”

“리스크 관리,
브랜드 관리,
관계 관리.”

그는
마지막으로
윤 서연의 기사를
다시 열어 보았다.

이제 화면에는
수정된 버전만 떠 있었다.

그는
옛 버전의 흔적을 찾으려
스크롤을 내려 보았다.

그러나
시스템 상에서
원본 텍스트는
이미 다시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에
저장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 정도면 충분해.

누가
과거 버전까지 찾아 읽겠어.

그 순간,
모니터가
한 번 깜빡였다.

로그오프도,
전원 문제도 아닌
이상한 깜빡임.

그리고
화면 한가운데에
낯익은 문장이
회색 박스로 떠올랐다.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그 밑에
다른 문장들도
하나둘씩 따라 붙었다.

“제 이름도
그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그 옆에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합니다.”

오태석이
눈을 찌푸렸다.

“뭐야, 이건.”

그는
시스템 버그라고 생각했다.

“캐시 문제인가…”

그가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회색 박스를 닫으려 할 때,
화면 오른쪽 아래에
로그 창이 하나 떠올랐다.

“시스템 메시지:
삭제된 버전 되살리기 – 진행 중.”

“사용자:
(미확인)”

키보드를 치지 않았는데도,
엔터 키가 눌린 것처럼
커서가 움직였다.

원본 기사 버전이
어디선가
불려 올라오고 있었다.

오태석이
당황해서
강제 종료 버튼을 클릭했다.

“종료,
종료,
꺼져…”

그러나
마우스 포인터는
그의 손과
무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되돌리기]

  • [원본 복구]

  • [공개]

세 개의 버튼 중
마지막 버튼 위에
커서가 멈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오태석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누르고 있었다.

“상태: 공개 (원본 버전)”

모니터 상단에
저장 완료 메시지가 떴다.

바로 그때,
사무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것처럼
조여들었다.

오태석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눈앞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실제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들렸다.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속삭였다.

“장부를 찢는 손이여.”

“너는
남의 이름을
지워 왔다.”

“이제
네 이름이
장부에서
지워질 차례다.”

오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다리는
자기 것이 아니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튀었다.

그러나
피는 튀지 않았다.
뼈도 부러지지 않았다.
어디에도
외상이 남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라는 기관이
자신의 일을
갑자기 그만둔 것뿐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모니터를 보았다.

그의 화면에는
윤 서연의 기사
원본 버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제목,
세 문장,
이름들.

그는
입술을 떨며
마지막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필터였을 뿐인데.

어딘가 위에서
짧은 대답이 내려왔다.

그래서—

너는
가장 중요한 것을
걸러냈다.

불빛이 꺼졌다.
그의 이름은
심장 박동에서
떼어져 나갔다.

그러나
시스템 로그에는
또 다른 기록이 남았다.

“23:17 – 기사 28471 원본 버전 복구
23:18 – 기사 28471 전체 공개 전환”

사용자란 칸에는
이상한 문구가 떠 있었다.

“사용자:
(기록되지 않음)”


9. 다음 날 아침 – “누가 이 기사를 살렸지?”

다음 날 아침.

온라인 뉴스부에서
첫 출근한 에디터가
모니터를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기사—”

어제 비공개로 돌렸던
윤 서연의 기사
원본 버전이
다시 공개 상태로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포털 메인 하단에도
자동 추천 알고리즘을 타고
조용히 올라가고 있었다.

남기호 부장이
급히 달려와
화면을 확인했다.

“누가
다시 올렸어?”

에디터가
로그를 열어 보았다.

“어제 밤
11시 17분에
복구된 걸로 나오는데…”

“사용자명이
비어 있습니다.”

“시스템 오류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오 상무님이
밤늦게
뭐 작업하다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직원이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그…
들으셨어요?”

“어제 밤에
오 상무님…”

공기 중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사무실에서
쓰러져서
발견됐대요.”

“병원 가는 길에
심장이…”

다음 단어는
입술 사이에서
조용히 부서졌다.

서연은
누가 알려 주기도 전에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어젯밤
누군가의 심장이
멈추는 동안—

지워진 문장이
다시 살아났다.

누군가의 이름이
장부에서 사라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 위로 돌아왔다.

남기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당장은
기사 손대지 마.”

“어제 밤 이후 로그가
어떻게 남았는지,
서버팀이랑 같이 확인해 봐야겠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이 일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

“ ‘기사 살리다 죽은 편집자’ 같은
괴담 기사라도 나오면—”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미
기사 하나는
살아났는데요.”

서연은
자기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켰다.

거기에는
자신이 처음 썼던
그 문장들이 그대로 있었다.

“저는 이 구조에서
완벽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제 이름도 그 구조와 함께
비판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조를 쓸 때,
그 옆에 사람 이름까지
함께 써야 합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나 대신
이 문장을
지켜 줬다.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내 손으로도
이 기록을
지켜야 한다.

그녀는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 칸에
이렇게 적었다.

〈지워질 뻔한 문장,
다시 돌아온 이름들〉

그 기사는
아직
세상 어디에도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과 손끝에는
이미 쓰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10. 상공 – 칼이 한 번 쓰였고, 기록이 한 줄 지켜졌다

저녁.

한 시온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검을 닦고 있었다.

오늘 칼날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칼은
분명
누군가의 생명을
끊어냈다.

“오태석.”

그는
장부에서
그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붉은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장부를 찢는 손 –
심장 기능 정지.”

그 아래에는
다른 기록이 적혀 있었다.

“기사 28471 –
원본 버전 복구,
전면 공개.”

“지워진 문장 –
다시 기록됨.”

시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
칼은
한 사람의 생명을 끊는 대신—”

“수많은 이름들을
기록에서
다시 살려냈다.”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심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가까스로 얻은
작은 구원이었다.”

그는
도시 아래
편집국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한 구석에서
윤 서연이
새 원고를 쓰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모른다.

그래서
좋다.

누군가가
자기 손으로
기록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마다—

내 칼이
조금은 덜 잔혹해질 수 있으니까.

장부 마지막 줄에
그는
짧게 적었다.

“오늘의 결론 –
기록을 지우는 자와
기록을 지키는 자 사이의 싸움에서—”

“한 번쯤은
기록이 이겼다.”

그리고
다음 장의 제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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