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8장 – 성벽 안쪽에서 일어난 첫 균열
8장 – 성벽 안쪽에서 일어난 첫 균열
1. 수사실, 버려진 하수인의 둘째 선택
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
창문 없는 조사실.
벽은 흰색이었지만,
오래된 형광등 불빛에
어딘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종이컵 두 개.
한쪽은 미지근한 물이 반쯤,
다른 쪽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 재문은
둘 다 마시지 않고
앞에 놓인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평생이 걸린 것도 아니고,
하루가 걸린 것도 아니지.
그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짚었다.
경찰 학교,
정보과,
퇴직,
컨설팅 회사,
의원실과의 계약,
그리고 문화센터 계단.
문이 열렸다.
수척한 얼굴의 검사가
서류철을 들고 들어왔다.
뒤에는
회사에서 선임했다는 변호사가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피의자 이 재문 씨.”
검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공식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합니다.
변호인 입회하에.”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하시기 전에
몇 가지 사항만 기억해 주십시오.
지금 단계에서
위쪽 이름을
먼저 꺼내는 것은
이 재문 씨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조언인 척했지만,
사실은
경고에 가까웠다.
검사가
서류를 펼쳤다.
“우선
가방 안에서 나온 문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프린트물을 이 재문 앞으로 밀었다.
“전령 팬덤 폭력 연출 매뉴얼,
이른바 ‘여론 관리 플랜’ 문서입니다.”
이 재문은
문서를 보지도 않은 듯
눈을 감았다.
“당신 서명이
맨 아래에 있습니다.”
검사가 말했다.
“문제는
그 위에 적힌 내용입니다.”
그는 한 줄을 짚었다.
“목표:
‘도시의 전령’ 괴담 관련
과격 팬덤 이미지 형성,
향후 ‘괴담·가짜뉴스 방지법’ 추진의
사회적 명분 확보.”
검사는 시선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문서,
누가 만들라고 했습니까.”
변호사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금 단계에서
피의자가 불리한 방향으로
단정되는 진술은
삼가 주시죠.”
검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 문서가
혼자서 나온 건
아니지요?”
조용한 공기.
이 재문은
종이컵을 한 번 건드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렇습니다.”
그가 첫 말을 뱉었다.
“의원 캠프 쪽에서
‘도시의 전령’ 괴담을
어떻게 관리할지
자문을 요청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로
이 초안이 나온 겁니다.”
변호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초안 수준이었고,
실제 실행에 들어갔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검사가
살며시 웃었다.
“문화센터 계단에
스프레이, 폭죽, 칼,
그리고 이 문서를
직접 들고 올라가려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이 재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제가
직접 실행까지 하려 했던 건
아닙니다.”
“하청을 쓰려 했죠.”
검사가 냉정하게 말했다.
“돈이 필요한 사람,
사정이 급한 사람,
제 발로
위험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그 말은
주사 바늘처럼
짧고 정확하게 꽂혔다.
이 재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늘 그런 식이었지.
검사가
서류철을 덮었다.
“이 재문 씨.”
그는 손을 깍지 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솔직히 말해서,
윗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신 한 명쯤
버리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검사님,
그건 협박으로 들릴 수—”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검사가 말을 잘랐다.
“당신도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조사실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그래서
선택지를 드리려 합니다.”
검사가 말했다.
“그냥
‘개인적 일탈’로
남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전체 그림을
함께 그린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재문이
눈을 들었다.
“어차피
위에 있는 사람들,
다 빠져나갑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저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압니다.”
“뭐라도 말한다고
그 사람들이
겨우 흔들리겠습니까.”
검사가 조용히 대답했다.
“흔들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에겐
장부가 필요하니까요.”
그 말에
이 재문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장부?”
“네.”
검사가 말했다.
“누가
괴담을 이용하려 했고,
누가
누군가의 분노와 절망을
‘연출용’으로 쓰려 했는지.”
“사람들이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도록
기록은 남아야 합니다.”
그 말은
어딘가에서
이미 들은 듯한 문장과
겹쳐졌다.
문화센터,
그 계단,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의 목소리.
“장부라는 건 말이죠…”
이 재문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변호사가 말했다.
“검사님,
장부를 쓰자는 얘기는
신파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당신은
신파를 좋아합니까.”
검사가 차갑게 물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을
신파로 끝낼 수도 있습니다.”
“한 하수인이 버려지고,
위에 있는 자들은
슬프다고 한 번 입술을 떨다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그는
서류철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저는
최소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는
만들고 싶습니다.”
“‘이게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
누가 어디까지 했는지
여기 적혀 있다’고.”
이 재문은
눈을 감았다 떴다.
“…제가
말을 하면.”
그가 물었다.
“검사님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까.”
검사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그건
우리 몫입니다.”
“당신 몫은—”
그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더 이상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재문 씨,
이건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위까지 건드렸다가
형량이 줄기는커녕
더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이 재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변호사를 봤다.
“선생님은
이런 일
많이 보셨겠죠.”
그가 말했다.
“위에 있는 사람들
결국 무사히 지나가는 거.”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재문은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던 손을 펴
자신의 손금을 한 번 바라봤다.
어차피
나는 이미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그는
고개를 들었다.
“USB 하나
있습니다.”
검사의 눈빛이
번쩍했다.
변호사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재문 씨!”
“회사 서버랑
의원실 쪽에서 왔다 갔다 하던
일부 파일들입니다.”
이 재문이 말했다.
“계약서,
회의록,
결재 메일,
몇 개는
제가 미리
빼놓았습니다.”
검사가 물었다.
“왜
빼놓았습니까.”
이 재문은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언젠가
누군가
‘장부를 보여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는,
나중에
나라도
누군가를 붙잡고
‘나만 한 건 아니다’라고
울부짖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는
자기 말을 스스로 비웃었다.
“결국
그날이
오늘이군요.”
검사는
종이에 짧게 무언가를 적었다.
“그 USB는
어디에 있습니까.”
“제 집,
책상 서랍 안쪽
밑판 아래에
숨겨놨습니다.”
이 재문이 말했다.
“압수수색영장 나오면
찾아갈 수 있을 겁니다.”
변호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조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조사실 문이 닫힌 뒤에도,
이 재문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걸로
위에 있는 놈들이
무너질지 안 무너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내 아래에
누군가를 끌어당기지는 않는다.
그는
그 생각 하나에
조금 늦은
위로를 걸었다.
2. “시스템도 가끔은 사람 편을 든다”
같은 날 오후,
도시 한가운데
법원 별관.
행정법원 304호 법정에서
깊은 한숨과 기침이 뒤섞인
공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한 지우 변호사는
법정 뒤편 벤치에서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사건 명의는
길고 딱딱했다.
“괴담·가짜뉴스 방지 및 집단 심판 방지 특별법
국회 상정 및 의결 절차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
간단히 말해,
그 법안을
잠시 멈춰 세워 달라는 청구였다.
“이게
정말 받아들여질까요?”
옆에서
피해자 모임 대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국회 일은
국회가 알아서 하는 거 아니냐고
다들 그러던데…”
한 지우는
웃음 아닌 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대부분은
‘알아서’ 하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그녀는
법정 문을 바라봤다.
“재판부가
‘잠깐만’ 하고
손을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아주 가끔’을
한 번 써 보자는 겁니다.”
법정 안,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결정을 읽기 시작했다.
법정 밖 스피커로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기본권 침해의 가능성,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의 위험,
공공복리와의 비교 형량을 종합하여 볼 때—”
한 지우와
피해자 대표,
그리고
몇몇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숨을 삼켰다.
“본 특별법안의
국회 상정 및 의결 절차를
임시로 정지할 필요성이 인정된다.”
순간,
복도 공기가
달라졌다.
누군가
“됐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진짜야?” 하고
되물었다.
한 지우는
손에 쥔 서류를
꽉 쥐었다.
…된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스템이
항상 괴물 편만 드는 건 아니구나.
피해자 대표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
물었다.
“그럼…
이제
그 법은
못 만드는 겁니까?”
한 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은
‘잠깐 기다려’ 정도입니다.”
그녀가 설명했다.
“재판부가
‘이 법안,
그냥 밀어붙이기에는
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첫 표시를 한 겁니다.”
“본안 소송은
이제 시작이에요.”
피해자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뭔가
처음으로
막힌 것 같네요.”
그의 말은
어색할 만큼 솔직했다.
“우리가
아무리 소리 질러도
늘 지나가던 것들이—
오늘은
한 번 멈췄네요.”
그때
윤 서연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결정 나왔어요?”
“응.”
한 지우가 웃었다.
“잠정 정지.
일단
멈췄어.”
“좋아요.”
전화기 너머로
서연의 숨이 빨라졌다.
“그럼
속보 바로 올릴게요.”
“제목은
기자님 마음대로.”
한 지우가 말했다.
“다만
하나만 부탁할게요.”
“뭔데요?”
“이게
우리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만
꼭 써 주세요.”
“알겠어요.”
서연이 대답했다.
“〈도시의 장부〉 ④,
첫 문장에다
박아 넣을게요.”
통화를 끊고,
서연은
노트북을 활짝 열었다.
새 제목 란에
짧게 적었다.
“괴담 방지법, 첫 제동…
‘도시의 전령’ 이용하려던 칼,
잠시 멈춰 서다”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문장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3. 성벽 안쪽, 금이 갈 때 나는 소리
당일 저녁,
여당 핵심 의원들 몇 명이 모이는
비공개 저녁 자리.
회색 양복,
은은한 와인,
식탁 위에는
소고기와 생선 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앙상블처럼
비슷한 정장들을 입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노 영학.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피로와
미세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법안이
생각보다 쉽게
막힌 것 같군요.”
당 대표격 인사가 말했다.
“사건 하나 터졌다고
여기까지 올 줄은…”
노 영학이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법원 결정문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가 물었다.
“우리도
길게 봐야 합니다.”
다른 중진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 여론은
‘전령 팬덤 연출’에
굉장히 민감해져 있소.”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국민들 눈에는
‘괴담을 막는 사람’이 아니라
‘괴담을 이용한 사람’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는 거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 대표가 말했다.
“영학 의원.”
“우리는
동료 의원을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에
테이블 위 긴장이
약간 풀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문제였다.
“단,
의원님께서도
‘끊을 선’은
정확히 그어 주셔야 합니다.”
노 영학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무슨 뜻이십니까.”
“컨설팅 회사,
하청—”
당 대표가 말했다.
“그쪽은
정리할 수 있겠지요.”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통보였다.
“이미
언론에는
‘민간 컨설턴트의 일탈’로
라인이 잡혀 있습니다.”
다른 의원이 덧붙였다.
“회사도
곧 정리될 겁니다.
대표 사퇴,
회사 구조조정,
‘유감 표명’ 패키지 정도면—”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은 박스를 그렸다.
“대부분
잊어 줍니다.”
노 영학은
잔을 돌렸다.
“그럼
제 보좌진은요.”
그가 물었다.
“메일이 오고 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 대표가 말을 잘랐다.
“그 부분은
의원님이
알아서 정리해 주십시오.”
“우리로서는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이야기를 하나쯤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말은
냉정했다.
“검찰이든,
감사원이든,
윤리위든,
어디선가
누군가 하나쯤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테이블 위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보좌관 한 명,
두 명—”
다른 의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노 영학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 도윤.
수년간 함께 일하며
선거도 치르고,
법안도 만들고,
위기 상황도 버텼던 사람.
장부에
네 이름을
같이 올릴지 말지
고민하던 그날…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장부에
제 이름까지 올라가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노 영학은
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정리할 건
정리하겠습니다.”
그 말은
겉으로는 순응이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들이
차가운 톱니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를
어디까지
버릴 것인가.
그리고
누가
나를 먼저 버리려 하는가.
그는
값비싼 와인을 마시면서도
입 안이 쓴 걸 느꼈다.
성벽 안쪽에
새 금이 가기 시작할 때 나는 소리는,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보다
훨씬 작고,
훨씬 깊었다.
4. 은밀한 봉투, 안쪽에서 바깥으로 새는 금
다음 날 오후,
한적한 골목 카페.
점심 시간은 지나서
손님은 많지 않았다.
창가 자리 하나에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한 지우가
검은 코트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실제로
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 지우가 말했다.
“메일만 보내고
잠수 타는 제보자들이
워낙 많아서요.”
남자는
머리를 깊게 숙였다.
“오래 앉아 있을 순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필요한 건
최대한
봉투 안에 넣어 왔습니다.”
남자는
서류봉투 하나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봉투는
많이 만져본 듯
가장자리에 조금 닳은 흔적이 있었다.
한 지우는
봉투를 열고
안의 문서들을 훑어봤다.
회의록,
내부 메신저 대화 캡처,
컨설팅 회사와의 계약서,
“여론 관리 플랜” 수정판,
그리고
어느 날 회의의 녹취록 요약.
그 중 한 장의 상단에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의원님 코멘트:
‘선 넘지 않는 선에서
검토해 보시지요.’”
하단에는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C.D.
“…최 도윤 보좌관님이시죠.”
한 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모자를 조금 내려
눈을 가렸다.
“…이름은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말했다.
“그냥
‘안쪽에서
조금씩 금이 나는 중’이라고
적어 주시면 됩니다.”
그의 말은
어딘가
자기 자신을 향한 냉소 같았다.
한 지우가 물었다.
“왜
지금입니까.”
남자는
잠시 말을 찾았다.
“…문화센터 계단에서
사람이 떨어졌다는 뉴스,
보셨죠.”
“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우리가
회의실에서
‘연출’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결국은
누군가의 피와 뼈를
재료로 삼을 수 있겠구나.”
그의 손이
테이블 밑에서
살짝 떨렸다.
“지금
의원님은
저를 지키는 척
하지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든지
제 이름을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증거로
내놓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 지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돌 안쪽에서
금이 가는 중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성벽을
밖에서 때리기만 해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안쪽에서
금이 나야
비로소
균열이 납니다.”
남자가
잠시 웃었다.
“변호사님은
말을
참 무섭게 하시네요.”
한 지우가
시선을 단단히 했다.
“이 봉투 안에 있는 것들,
다 쓰셔도 됩니다.”
남자가 말했다.
“다만
단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이 모든 일에서
저는…”
그의 입술이 떨렸다.
“…완전히
피해자는 아니라는 것.”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제 이름이
장부 어디에 올라가든,
그 옆에는
‘알고도 참여했다’는 문장이
따라붙어야 합니다.”
한 지우는
그의 말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새겼다.
“그 문장을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대신
다른 문장도
같이 적겠습니다.”
“어떤 문장입니까.”
“‘돌 안쪽에서
첫 금을 낸 사람’이라고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좋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언제든
다시 연락 주셔도 됩니다.”
한 지우가 말했다.
“익명으로든,
실명으로든.”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언젠가
제 이름으로
다시 오겠습니다.”
“제가
장부에
어디에 서 있는지
직접 확인하러요.”
그가 카페 문을 나가자,
거울에 비친
그의 뒷모습이
잠시 한 사람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검은 코트,
조용한 발걸음.
그러나
이번에는
그 누구도
누구를 따라가지 않았다.
5. 심판, 다시 한 번 칼을 뽑다
도시 외곽,
재개발이 진행 중인 오래된 구역.
밤은 깊었지만,
한 건물의 사무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서류 더미와 도면들이 보였다.
벽에는
새 아파트 조감도와 홍보 문구가
크게 붙어 있었다.
“도성 라이프타운 –
당신의 내일을 바꾸는 선택.”
사무실 안,
비싼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문서를 급히 훑고 있었다.
정 회장.
공식 직함은
대형 건설사의 이사였지만,
현장에서 사람들은
그를 그냥 “정 회장”이라 불렀다.
서랍 안에는
현금 봉투와 USB가 섞여 있었고,
옆 책상에는
파쇄기 한 대가
삐걱거리며 서 있었다.
“이 정도면
발뺌할 수 있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원래
사업이라는 건
리스크가 있는 거야.”
그가 손에 쥔 문서의 제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전진단 보고서(수정본)”
원본에는
“해당 구조는 화재 및 붕괴 위험이 높음”이라는 문장이
진하게 표시되어 있었지만,
수정본에는
그 문장이
온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의 서랍 속에는
몇 년 전
한 상가 건물 화재 기사 스크랩이 있었다.
“도심 상가 화재로 23명 사망…
원인 조사 중”
언론은
부주의,
노후 전선,
스프링쿨러 오작동,
여러 원인을 나열했지만,
그 기사 어디에도
“안전 보고서를 묵살한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정 회장은
파쇄기 전원을 켰다.
“위잉—”
서류가
날카로운 칼날 사이로 빨려 들어가며
가늘게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누구야!”
그가 소리쳤다.
문 앞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한 코트,
손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은 듯했지만,
어딘가 공기를 가르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한 시온.
“퇴근이
늦으시네요.”
시온이 말했다.
정 회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직접 찾아온 걸 보면
기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가 비웃었다.
“요즘은
검찰도
이렇게 야근을 열심히 하지는 않던데.”
시온이
사무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당신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누구였는지입니다.”
정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누구였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알고 있습니다.”
시온이 말했다.
“화재 이전부터
안전 보고서에
계속 서명을 거부했던 사람.”
“보고서를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람.”
“재개발 이익을
정가, 비정가 할 것 없이
여러 곳에 나눠 보낸 사람.”
정 회장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그런 소리를
아무 데서나 하지 말게.”
그는 책상을 툭툭 쳤다.
“세상에
사업 안 하면서
깨끗한 척하는 사람들 많지.”
“여기 앉아서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뒷주머니에는 다
무언가 하나쯤 숨겨 놓고 사는 거야.”
시온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숨기죠.”
“단지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손에 묻은 피를
‘리스크’라고 부를 뿐입니다.”
정 회장이 비웃었다.
“그래서
뭐,
당신이 대신 심판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제 역할은
그저
장부를 읽고
마지막 줄을 쓰는 겁니다.”
시온이 말했다.
“당신 이름 옆에는
오래 전부터
여러 줄이 쌓여 있었죠.”
그의 눈빛이
문서 더미와 파쇄기를 훑었다.
“불이 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죽기 전부터,
당신은
수많은 서류에
서명을 해 왔습니다.”
“그 서명이
오늘
자신의 목을 끊으러 오는 줄
상상이나 했습니까.”
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안요원!”
그가 소리쳤다.
“경비실!
어디 갔어!”
아무 대답도 없었다.
빌딩 전체의
복도 조명은 켜져 있었지만,
어딘가
소리가 유난히 흡수되는 밤이었다.
시온이 말했다.
“오늘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무실을 채웠다.
“다만
한 가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마지막 줄을 맞이할지.”
정 회장은
손에 쥔 서류를
파쇄기에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웃기지 마.”
그가 으르렁거렸다.
“세상은
꽤 오래 동안
나를 필요로 했어.”
“비겁하게
나 혼자만 악당으로 만들지 마.”
시온이 말했다.
“당신이
혼자 악당이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악당의 가장 앞줄에 서 있었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 순간,
파쇄기가 갑자기 멈췄다.
“끼익—”
모터가 떨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정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게…”
칼날 사이에 걸려 있던
마지막 문서 조각 하나가
반쯤 찢어진 채
입구에 걸려 있었다.
그 조각에는
이런 문장이 보였다.
“정 모 이사 –
○○아파트 재개발 관련
정치후원회 특별 후원금 지급 내역 첨부.”
“정 모 이사” 옆에는
짧은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노 영학”
정 회장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조각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땅이 가볍게 흔들리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몸을 덮쳤다.
심장이
가슴 안에서
두 번 크게 뛰었다.
…뭐야, 이거.
세 번째 박동은
오지 않았다.
정 회장은
아무도 밀지 않았는데도
뒤로 휘청거리며
의자에 부딪혔다.
손가락이
파쇄기 입구를 한 번 긁고,
바닥에 떨어졌다.
눈앞에서
형광등 불빛이
하나 둘씩 꺼지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파쇄기 입구에 걸려 있던
조각난 문서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 위에
엎드려 누운 자신의 얼굴 옆으로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6. 칼이 만든 길 위에, 장부가 서다
다음 날 아침,
도시 뉴스 속보.
“어젯밤,
○○건설 정 모 이사가
사무실에서
심정지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뉴스 앵커가 말했다.
“현장에서는
파쇄기 고장으로 보이는 흔적과 함께
일부 문서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문서 조각 중 하나가
화면에
모자이크 처리된 채 비쳤다.
자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 모 이사 –
정치후원회 특별 후원금 지급 내역…”
검찰 기자가
뒤를 이어 설명했다.
“현재 검찰은
해당 문서가
특정 국회의원의
후원회와 관련된
불법 정치자금 내역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정 국회의원”이라는 말이
돌고 도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 머릿속에서
비슷한 이름 몇 개를 떠올렸다.
그중
가장 자주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는
당연히
노 영학이었다.
윤 서연은
기자실 모니터 앞에서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이 타이밍에
정 회장이 죽는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전령 괴담을 이용한 여론 관리 플랜”의
한 축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정치자금 의혹”이라는 또 다른 칼날을
끌고 나타난 셈이었다.
그녀 곁에서
다른 기자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라
연쇄 같지 않냐.”
또 다른 기자가 말했다.
“그래도
이번 건은
괴담이 아니라
문서가 있잖아.”
“가방,
USB,
그리고
파쇄기에서 나온 조각까지…”
누군가가 툭 덧붙였다.
“도시가
스스로
장부를 꺼내는 느낌이네.”
서연은
노트북을 켰다.
전령이
한 일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이번엔
칼이 지나간 자리에
종이가 남았다.
그녀는
새 문서의 제목에
이렇게 적었다.
“도시의 장부 ④ –
칼이 지나간 자리에
종이가 남을 때”
7. 장부, 처음으로 칼과 손을 맞잡다
오래된 건물 옥상.
한 시온이
장부를 펼쳐 들고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점이 찍힌 이름 옆에
새 줄이 늘어나 있었다.
“정 회장 –
화재 참사 관련
안전 보고서 묵살 및 재개발 이익 편취.
심판 완료.”
그 바로 아래,
또 다른 문장이 있었다.
“현장에 남긴 문서 조각 –
노 영학 정치후원회와의 연결고리 일부 노출.”
시온은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한 번 짚었다.
“원칙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조금 더 잘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가 혼잣말을 했다.
“오늘
파쇄기가 멈추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오래 써서 닳은 칼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 옆에 서 있기로
선택했을 뿐.”
그는
장부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이 재문 –
USB 위치 진술,
조직적 연출의 일부 고백.
자기 몫의 죄를 인정하려는
늦은 시도.”
“최 도윤 –
내부 자료 봉투 전달,
‘알고도 참여했다’는 문장 요구.
돌 안쪽에서 시작된 균열.”
그리고,
다시
노 영학의 페이지로 돌아왔다.
“노 영학 –
여론 관리 플랜 승인,
문화센터 사건 이후
최소한의 선도 지키지 못함.”
붉은 점 옆에
새 표시가 하나 찍혔다.
“정 회장의 장부와
노 영학의 장부가
처음으로 한 줄에서 만남.”
“인간의 장부가
내 칼날을 따라오기 시작함.”
시온은
도시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이제
선택의 시간은
더 길지 않겠지.”
그가 말했다.
“성벽 안쪽에서
금이 나기 시작했고,
성벽 바깥에서는
칼이 이미
몇 번 스쳐 지나갔다.”
“다음 칼날이 닿을 곳은—”
그는
노 영학의 이름 위에
펜을 살짝 얹었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아직
그들이 먼저
써 볼 기회가
조금 남아 있다.”
장부를 덮으며
시온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칼이 길을 열고,
종이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내일은—”
“어쩌면
종이가 먼저 길을 열고,
내 칼이
마지막 줄만 쓰게 될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었다.
도시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부패했고,
여전히 분노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성벽 안쪽에서부터
작은 돌 가루가
바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