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8장 – 성벽 안쪽에서 일어난 첫 균열

8장 – 성벽 안쪽에서 일어난 첫 균열 1. 수사실, 버려진 하수인의 둘째 선택 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 창문 없는 조사실. 벽은 흰색이었지만, 오래된 형광등 불빛에 어딘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종이컵 두 개. 한쪽은 미지근한 물이 반쯤, 다른 쪽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 재문은 둘 다 마시지 않고 앞에 놓인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평생이 걸린 것도 아니고, 하루가 걸린 것도 아니지. 그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짚었다. 경찰 학교, 정보과, 퇴직, 컨설팅 회사, 의원실과의 계약, 그리고 문화센터 계단. 문이 열렸다. 수척한 얼굴의 검사가 서류철을 들고 들어왔다. 뒤에는 회사에서 선임했다는 변호사가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피의자 이 재문 씨.” 검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공식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합니다. 변호인 입회하에.”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하시기 전에 몇 가지 사항만 기억해 주십시오. 지금 단계에서 위쪽 이름을 먼저 꺼내는 것은 이 재문 씨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조언인 척했지만, 사실은 경고에 가까웠다. 검사가 서류를 펼쳤다. “우선 가방 안에서 나온 문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프린트물을 이 재문 앞으로 밀었다. “전령 팬덤 폭력 연출 매뉴얼, 이른바 ‘여론 관리 플랜’ 문서입니다.” 이 재문은 문서를 보지도 않은 듯 눈을 감았다. “당신 서명이 맨 아래에 있습니다.” 검사가 말했다. “문제는 그 위에 적힌 내용입니다.” 그는 한 줄을 짚었다. “목표: ‘도시의 전령’ 괴담 관련 과격 팬덤 이미지 형성, 향후 ‘괴담·가짜뉴스 방지법’ 추진의 사회적 명분 확보.” 검사는 시선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문서, 누가 만들라고 했습니까.” 변호사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금 단계에...

심판의 전령 - 5장 – 뒤틀린 그림자

5장 – 뒤틀린 그림자

1. 국회, 카메라 앞의 분노

국회 본청 2층, 기자회견장.

벽에는 국기와 당기가 나란히 서 있었고,
연단 앞에는 여러 방송국 마이크들이 꽃다발처럼 꽂혀 있었다.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고,
좌석마다 기자들이 노트북을 펼쳐 두고 대기하고 있었다.
방송사의 생중계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붉은 불이 켜졌다.

연단 위로
정장을 곧게 여민 남자가 걸어 나왔다.

노 영학.

눈가에는 피곤이 살짝 묻어 있었지만,
표정은 단단히 다져 놓은 돌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먼저,
최근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불행한 사건들로
상처받은 유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애도의 말씀을 드립니다.”

형식적인 인사말.
그러나, 오늘의 목적은
애도가 아니었다.

그는 준비해 온 문서를 펼쳤다.

“최근 일부 언론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매우 위험한 괴담음모론
확산되고 있습니다.”

스크린에는
어제까지 인터넷을 떠돌던 글들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 띄워졌다.

“병원장, 학교 학생, 재개발 시행사 대표의 죽음을
하나의 선으로 엮어
마치 보이지 않는 ‘심판자’가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식의
자극적인 기사와 게시물이
무책임하게 생산·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는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유가족에 대한 2차 가해이자,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극도로 비윤리적인 행위입니다.”

몇몇 기자들이 노트북에 빠르게 타이핑했다.

“저는 오늘
이런 무책임한 허위·과장 보도에 대해
강력한 법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그 말 뒤에는
이미 준비된 다음 문장이 따라왔다.

“아울러,
‘도시의 전령’ 운운하는
괴담을 퍼뜨리는 행위에 대해서도
가짜뉴스 방지법, 사이버 명예훼손 관련 법규를 적용해
강력히 처벌할 것을
관계 기관에 촉구합니다.”

손이 들렸다.

“노 의원님,
최근 연속 사망 사건 보도에서
의원님의 이름이 실명은 아니지만
‘회의 참석자’로 언급되었습니다.
이 보도와 오늘 기자회견이
관련이 있습니까?”

노 영학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바라봤다.

“당연히 있습니다.”

“저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만드는 보도
단호히 맞설 것입니다.
저를 겨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방식의 보도가
앞으로 누구를 향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손이 들렸다.

“‘도시의 전령’ 괴담과 관련해,
의원님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잠시 멈춰섰다가,
천천히 답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정의를 보지 못할 때,
보이지 않는 정의를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이해합니다.”

순간, 기자들 몇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 상상이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위로도, 희망도 아닙니다.
그건…
또 다른 폭력일 뿐입니다.”

그 말은
언뜻 그럴듯했다.

“진짜 정의는
법과 제도 안에서
투명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저는
그런 정의를 위해
정치인이 된 사람입니다.”

말은 완벽했다.
문장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동안
이 남자가 실제로 무슨 결정을 내려왔는지 아는 사람에게는
그 문장 전체가
거꾸로 선 십자가처럼 보였다.

카메라가 꺼지고,
기자들이 삼삼오오 흩어진 뒤,
노 영학은 연단 뒤편 문으로 나갔다.

복도 끝,
작은 회의실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 호진.

그는 서류 가방을 옆에 두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의원님,
말씀 아주 잘 들었습니다.”

노 영학이 넥타이를 살짝 풀어 쥐며 말했다.

“이제
‘정의’를 두고 누가 누구를 욕하는지
구경할 일만 남았지.”

그는 창문 밖을 한 번 흘끗 봤다.

“사람들은
내가 저렇게 말해도 욕할 거고,
말 안 해도 욕할 거야.
그러니,
적어도 내가 고른 말로 욕먹는 게 낫지.”

장 호진이 웃었다.

“그래도,
여론이 꽤 돌아선 것 같더군요.
‘괴담을 퍼뜨리면 안 된다’는 말에
고개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턴
그 괴담이 또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겠지.”

노 영학이 말했다.

“이제 사람들은
진짜 ‘전령’이 있는지 따지기보단,
‘가짜 전령’이 누군지 찾으려고 들 거야.”

그의 입꼬리가
불길하게 올라갔다.

“우리는
그 ‘가짜’ 하나만
크게 때리면 된다.”


2. 편의점 강도, 그리고 첫 모방자

그날 밤.
도시 외곽의 조용한 주택가.

골목 모퉁이에 있는 조그만 편의점 하나가
푸른 불빛을 내고 있었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늦은 시각,
거의 유일한 고객은
근처 옥탑방에서 야근 후 내려오는 청년들이나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라면을 먹는 알바생들 뿐이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남자가 들어왔다.
모자는 깊게 눌렀고,
마스크가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알바생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봤다.
요즘 같은 때 밤에 저런 차림은 흔했으니까.

그러나,
그 남자가 진열대 앞을 서성이며
아무 것도 고르지 않는 동안에도
시선은 계속 계산대 쪽을 향해 있었다.

…싫은데.

알바생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이번엔
술 냄새가 진하게 배인 남자가 들어왔다.

골목 근처에서
자주 보이던 인물이었다.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행인에게 욕을 섞어 툭툭 던지던 사람.

주민 몇은
그가 밤마다 편의점 앞에서
알바생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야,
야, 알바.”

그가 손을 휘저었다.

“담배 하나,
제일 센 걸로 갖다 줘.
그리고 계산은…”

그는 뒤를 돌아봤다.

후드티 남자를 향해,
턱으로 위아래를 가리켰다.

“저 친구가 할 거야.
안 그러냐?”

후드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알바생은 이상한 걸 느꼈다.

저 눈에는
술 기운도,
흥도,
즉흥적 난동의 기색도 없었다.

대신—
어디선가 이미
너무 많이 무너져 본 사람
무감각한 눈빛이 있었다.

“…싫다.”

후드티 남자가 말했다.

술 취한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새끼.
아까는 잘만 같이 오더니.”

알바생이 놀라서
둘을 번갈아 봤다.

“…같이 오셨어요?”

그 질문은
공중에서 허공을 한 바퀴 맴돌았다.

후드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알바생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은
칼도, 총도 아니었다.

작은 종이 한 장.

흰 종이 조각에 적힌
짧은 문장.

“도시의 전령 –
악인을 심판한다.”

술 취한 남자가
웃다 말고 종이를 노려봤다.

“…뭐야, 이 유치한 장난은.”

그가 종이를 잡아챘다.

“이딴 거 퍼뜨리는 놈들이
제일 재수 없더라.
남의 인생 망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드티 남자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

순간,
몸싸움이 벌어졌다.
진열대가 흔들렸고,
과자 봉지가 떨어졌다.

알바생이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제가 경찰—”

그 말과 동시에,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짧은 비명.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적.

경찰 기록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편의점 내에서 발생한 시비 도중
한 남성이 넘어져
머리를 진열대 모서리에 부딪힘.
병원 이송 후 사망.
가해자는 현장 이탈 후 자진 신고.”

그 사건은
처음엔 작은 사회면 기사 한 줄로 다뤄질 예정이었다.

[야간 편의점 시비 중 40대 남성 사망… 20대 남성 경찰에 자진 신고]

그러나
조금 뒤,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사진이 하나 올라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편의점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의 사진.

거기에는
볼펜으로 투박하게 적힌 문장이 있었다.

“도시의 전령 –
악인을 심판한다.”


3. 왜곡된 호명

다음 날 오전,
〈도성일보〉 사회부.

윤 서연은
컴퓨터 화면으로 쏟아지는 기사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도시의 전령’ 자처한 20대 남성, 편의점에서 사람 죽였다]
[“나쁜 놈인 줄 알았다”… 온라인 괴담 따라 한 모방범 등장]
[정의? 살인? ‘전령’ 놀이의 위험한 그림자]

각 포털 사이트 메인에는
비슷한 제목들이 줄지어 올라와 있었다.

사진에는
구치소로 호송되는 20대 청년의 뒷모습,
그리고 증거물로 압수된
작은 종이 쪽지의 클로즈업이 있었다.

“도시의 전령 –
악인을 심판한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서연은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내 기사 때문에?

병원장,
재개발 대표,
학교 학생.

그녀가 쓴 기사 속에서
**“연결된 죽음들”**이라는 단어 뒤에
사람들이 상상으로 덧칠한 이미지들.
검은 코트,
보이지 않는 심판자,
하늘의 대리인.

그 상상들이
어제 편의점 안에서
누군가의 손을 통해
실제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김 팀장이 뒤에서 다가왔다.

“봤겠지?”

“…네.”

서연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회부에서
우리도 한 꼭지 써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윤 기자,
이거…
네가 맡을래?”

그 질문은
배려 같기도,
시험 같기도 했다.

서연은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편의점 CCTV 캡처 화면,
알바생 인터뷰,
죽은 남자의 전과 기록(상습 폭행, 위협).

“저 사람이…
피해자이기도 했답니다.”

김 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맞고 자랐고,
학교에서도 왕따였고,
군대에서도 괴롭힘당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휴게소, 공사장, 편의점 알바 돌면서
늘 누군가에게 붙잡혀 살았대.”

그는 프린트를 한 장 내밀었다.

“경찰 조사에서
‘그냥 한 번이라도
내가 아닌 누가 대신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더라.”

서연은 종이를 받았다.

거기 적힌 진술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뉴스에서
나쁜 놈들만 골라 죽는다는 얘기 보고,
그런 사람이 진짜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현실에는 안 나타나니까
나라도 한 번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문장 끝에는
조그맣게 적힌 문장 하나가 있었다.

“제가 잘못한 건 압니다.
근데…
그 사람(사망자)은
원래 항상 사람 괴롭히던 사람이었어요.”

서연의 손이
조금 떨렸다.

“…받겠습니다.
제가 쓰죠.”

그녀가 말했다.

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만—”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제발
‘영웅 서사’로 만들지는 마라.
이건 명백한 살인이다.
동기도, 배경도,
다 취재해서 쓰되
심판자로 포장하면 안 된다.

서연은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건
누구 몫도 아니니까요.”


4. 심판과 모방, 두 개의 선

어딘가 작은 방.
한 시온은
장부를 펼쳐 놓은 채
편의점 사건 관련 기록을 읽고 있었다.

“편의점 알바생 A –
지난 3년간 상습적으로 발길질·폭언을 당함.”
“사망자 B –
동네 상습 폭력 가해자,
상해·협박 전과 존재.
그러나 대부분 합의 및 경미 처벌.”
“가해자 C –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 폭력 피해자.
신고와 호소 반복했으나,
‘증거 부족’, ‘가정 문제’로 치부하며
시스템은 개입하지 않음.”

장부의 글자는
담담하게,
그러나 잔인할 정도로
사실만을 적고 있었다.

“C는
‘도시의 전령’ 괴담을 보고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악인을 대신 벌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됨.”

그 믿음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직접 손을 썼다.

시온은 눈을 감았다.

“심판은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은
“분노한 피해자”의 대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들의 분노가
한 사람의 목에 몰려가
또 다른 부당한 죽음을 만드는 순간

그는 그곳에 개입해야 했다.

“C –
죄목: 살인.
그러나,
이 도시에 의해
여러 번 ‘버려진 자’이기도 함.”

그는 펜을 들어
이름 옆에 표시를 적었다.

“형량:
인간의 법정에 세운 뒤,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행위가
‘정의’가 아닌 ‘살인’이었음을
끝없이 마주하게 할 것.”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심판이 아니었다.

죽음은
때로 인간에게 너무 쉬운 탈출구였다.

그의 역할은
천칭 위에
무게를 올리는 것이지,
칼을 아무에게나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시온은
조용히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도시의 전령 – 모방 및 왜곡”
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짧은 메모가 이어졌다.

“인간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정의를
자기 식으로 흉내 내려 한다.
때로는
우상으로 만들고,
때로는
유행어로 소비한다.”

그는 펜으로 한 줄을 그었다.

“나는
‘전령’이 아니다.
다만,
버려진 자리에서만 일하는 서기(書記)에 가깝다.

그러나,
도시는 이미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5. 취재실, 악의의 기원

편의점 사건이 보도된 지 이틀 뒤,
윤 서연은
구치소 접견실에 앉아 있었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
수의를 입은 20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마른 체구,
어딘가 늘 주눅 들어 있던 사람 특유의 자세.
손가락에는 과거 상처의 흔적이
얇은 선으로 남아 있었다.

“녹음해도 괜찮을까요?”

서연이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 같은 건
욕먹을 거니까요.”

그는
자기 자신을 이미
‘버려진 카드’처럼 대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그 종이에 적힌 문장은
직접 쓰신 거죠?”

“네.”

그는 시선을 내렸다.

“뉴스에서 봤어요.
나쁜 사람들만 골라 죽는다는 얘기.
병원장,
동네 재개발 사장,
그런 사람들.”

“제가 쓴 기사 보셨나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기억은 잘 안 나요.
그냥…
댓글들 많이 읽었어요.”

“댓글이요?”

“네.
‘이제라도 하늘이 심판한다’
‘사필귀정이다’
그런 말들.”

그의 목소리가
아주 약간 떨렸다.

“처음엔
그냥 부러웠어요.
누군가 나 대신
나쁜 놈 혼내 주는 거.
그런 게 진짜 있을까
하루 종일 생각했어요.”

“근데…
아무 것도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저도
어릴 때부터 맞았거든요.
아버지한테,
형들한테,
선배들한테,
점장들한테…”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한 번도
아무도 안 도와줬어요.”

그 말은
감정이 거의 제거된 상태로 나왔다.
마치 너무 자주 되뇌어
더 이상 새 상처조차 남지 않는 문장처럼.

“…편의점에서
그 사람을 봤어요.
알바한테 욕하고,
물건 던지고,
웃으면서 밀치고…”

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저 사람은
**‘심판 대상’**일지도 모르겠다고요.”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게 쓰여 있었거든요.
댓글에.
‘악인은 반드시 벌받는다’고.”

잠시 정적.

“근데
아무 일도 안 생기니까…
그냥
제가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했다.

“죄책감은 없나요.”

서연의 질문에,
그는 오래 생각했다.

“…있습니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똑 떨어지는 감정이 어렸다.

“근데
한 가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뭘요.”

“제가 한 게
‘살인’이냐,
아니면…
세상이 안 해 준 일을
제가 대신 한 거냐
하는 겁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판사는
당연히 살인이라고 하겠죠.
저도
형 받을 거고요.”

“근데…
그 사람(피해자)은
아무 일도 안 했잖아요.
지금까지도.”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어요.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은 돌처럼
그녀 앞에 놓였다.

기자로서의 답,
사람으로서의 답,
심판을 지켜보는 관찰자로서의 답이
각각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느 것도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
그가 그동안 했을 질문들을
떠올렸다.

“어릴 때
신고해 본 적 있나요?”

“있었죠.
‘집에서 맞는다’고
담임한테 말한 적도 있고…
파출소에도
두 번 갔어요.”

“근데요?”

“담임은
집에 전화해서
‘부모님이 좀 더 엄하게 지도하시나 보다’라고 하더라고요.”

“경찰은…
‘집안 문제는 웬만하면
집에서 해결하라’고요.”

그의 웃음은
비웃음도, 호소도 아니었다.
그냥,
이미 썩어버린 자리를 긁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서연은
녹음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서 뭐라고 말해도
지금 당장
당신한테 도움이 되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계속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그의 눈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당신이 겪은 일,
당신이 버려졌던 시간들,
아무도 안 도와준 현실—
그건
이 도시의 죄고,
우리가 써야 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
그건
이 도시가 대신 짊어질 수 없는
당신 자신의 죄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진술서처럼 정확했다.

“두 개는
섞이면 안 돼요.
섞이는 순간,
사람을 죽이는 일이
‘정의’가 되니까요.”

남자는
오랫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조금 더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상하게도
조금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
이 이야기를 써 준다니까…
그건
고맙네요.”

접견 시간이 끝나고,
문이 열렸다.

교도관이 다가와
남자를 데려갔다.

유리창 너머,
그의 뒷모습은
이 도시가 만들어낸
수많은 ‘파편’ 중 하나처럼 작아 보였다.


6. 옥상, 정의와 복수의 선

구치소를 나와
서연은 곧장 버스를 타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사건 이후
편의점은 잠시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문 앞에는
작은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사망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둔 듯했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골목 벽에는
매직으로 낙서가 적혀 있었다.

“전령님,
우리 동네도 청소 감사합니다 – ○○동 일동”

누군가 장난처럼 쓴 글씨.
하지만,
그 장난 안에
진심이 섞여 있는 것을
서연은 알 수 있었다.

…이게
우리가 만든 분위기구나.

그녀는
편의점 옆 계단을 올라갔다.

건물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도시의 불빛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옥상에는
물탱크와 실외기,
오래된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 중 하나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검은 코트.

한 시온.

그는
마치 여기가
자기 집 베란다라도 되는 듯
평온하게 앉아 있었고,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연은
놀랄 틈도 없이 말했다.

“여기…
자주 오세요?”

그는
눈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종종요.”

“사건이 있었던 곳이라서요?”

“네.
그리고,
누군가의
첫 실패한 심판 시도가 있었던 곳이라서요.”

그의 말투는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했다.

서연은 옥상 난간 쪽으로 걸어가
도시를 내려다봤다.

“뉴스에서
보셨겠네요.”

“네.
‘도시의 전령’을 자처한
모방범.”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흉내 내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서연이 물었다.

“그 사람,
어떻게 보세요?”

“살인자죠.”

대답은 단호했다.

“동시에
이 도시가 만든 피해자이기도 하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 둘을 섞어서
‘안타까운 정의 구현’이라고 부르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말은
서연이 아까 접견실에서
했던 말과 거의 비슷했다.

“…우리가
비슷한 문장을 쓰고 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장부와
내 장부가
같은 줄을 가리키고 있다고
예전에 말한 적 있죠.”

“근데
당신 장부는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리고,
제 장부는
그냥 글을 쓰는 거잖아요.”

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사람을 죽일 힘이 없어요.”

시온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다행입니다.”

그의 눈빛은
조금 진지해졌다.

“사람을 죽일 힘이 있는 자가
항상 옳은 건 아니니까요.”

서연은
잠시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기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요?”

“저요?”

“당신은
항상 옳나요?”

질문은
가볍게 던진 것 같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시온은
조용히 도시를 내려다봤다.

“아니요.”

그는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움직입니다.
최대한 끝까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지켜보고요.”

“그리고,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그때만
나섭니다.”

서연이 물었다.

“근데,
당신이 나선 이후에도
이렇게 모방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요?”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도시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도시가요?”

“네.
당신처럼 쓰는 사람들,
그리고
읽은 뒤에
자기 삶을 돌아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름 없는 분노
막연한 영웅 숭배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연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니
당신이 더 중요합니다, 기자님.”

그 말은
칭찬도, 부담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어조였다.

서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중요하긴요.
오늘도
‘괴담 유포 공범’이라고 욕먹었는데요.”

“욕을 먹는다는 건,
적어도
사람들이 아직
‘이게 맞는지 틀린지’ 고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온이 말했다.

“진짜 무서운 건
아무도 욕하지 않을 때입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도시 불빛이
아래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야근이 끝나고,
어디선가는
야근이 시작되고,
어디선가는
오늘도 누군가가
울다 지쳐 잠들고 있었다.

“도시가
전령을 만든 걸까요,
전령이
도시를 바꾸고 있는 걸까요.”

서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온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 둘 다일 겁니다.”


7. 설계된 혼란

며칠 뒤,
새로운 뉴스가 떴다.

[‘전령’ 흉내 낸 10대 집단폭행 사건… “나쁜 친구 혼낸다며”]
[‘전령 놀이’ 확산?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 스스로를 심판자라 불러]

이번에는
전혀 다른 얼굴들이었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한 학생을 둘러싸고 발길질을 하던 아이들.
그들이 SNS에 올린 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 학교에도 전령이 나타났다 ㅋㅋ
왕따 가해자 심판 완료.”

하지만,
조사 결과
폭행당한 학생은
가해자가 아니라
원래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였다.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유행어가 뒤섞여
새로운 폭력을 만들고 있었다.

이 와중에,
국회 보건·교육 상임위에서는
‘괴담·가짜뉴스 방지 특별법’ 논의가 시작되었다.

TV 화면에는
노 영학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이 비쳤다.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도시의 전령’과 같은
위험한 괴담이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그의 말 옆으로
자막이 떴다.

“괴담·가짜뉴스 방지 특별법(안)”
– 특정 괴담·집단 심판 행위를
찬양·미화하는 표현물 규제
– 관련 보도 및 콘텐츠에 대한
강력한 처벌 조항 신설

국민들은
반반으로 갈렸다.

“맞는 말이다,
이 정도면 선 넘어도 한참 넘었다.”
“근데 애초에
저런 괴담이 왜 생겼는지는
하나도 안 다루네.”

어디선가,
한 시온은
작게 웃었다.

“성벽이
자기 균열을 막기 위해
성벽 밖의 그림자를 탓하는군.”

그리고,
그 성벽 안쪽에서
또 다른 계획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
노 영학은
몇몇 측근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모방범 사건들,
더 터뜨려도 됩니까?”

한 측근이 물었다.

“실제 범죄가 일어난다면
당연히 막아야겠지만…”

노 영학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우리가 막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는 많아.”

그의 눈빛이
어딘가 차갑게 빛났다.

“중요한 건
어떤 사건이 크게 보도되느냐야.”

그는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름 모를 피해자들이
자기 인생 망가지고도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사건은
묻히고—”

“전령 놀이,
괴담 따라 한 폭력,
위험한 모방범 사건들은
있는 대로 키워라.”

한 측근이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래야
진짜 불만이
엉뚱한 데로 튀어 가.”

그는 웃었다.

“사람들이
‘왜 전령이 나타났나’가 아니라
‘전령을 믿으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떠들게 만들면—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 동안,
도시는 더 많은 장부를 쌓을 것이다.
병원,
학교,
재개발,
법원,
언론.

그리고 그 장부의 여백에는
여전히 이름을 적지 못한 사람들이
한 줄씩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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