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4장 – 흔들리는 성벽

4장 – 흔들리는 성벽

1. 국회의원실, 아침의 회의

국회의사당 별관, 6층.
두꺼운 방음문 안쪽, 회의실에는 벌써 커피 냄새와 피곤이 섞여 있었다.

벽걸이 TV에서는 아침 뉴스가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하단 자막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연결된 죽음들 – 병원, 학교, 재개발의 공통된 이름들”
“지역 유력 인사들, 잇따른 사망… 온라인선 ‘하늘의 심판’ 괴담 확산”

테이블 위에는 출력물이 널려 있었다.
어제 밤 윤 서연이 올린 기사,
각종 커뮤니티 캡처,
댓글들,
그리고 익명 게시판에 떠도는 괴담 모음.

회의실 한가운데 앉은 남자가
그 종이들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노 영학.

넥타이는 남색, 정장은 여전히 단정했지만,
눈가에는 피곤과 짜증이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도대체…
이걸 그냥 두고 보자는 거야, 뭐야.”

그가 종이를 책상 위에 던졌다.

‘병원 이사장 – 죽음’
‘학교 가해자 – 투신’
‘재개발 대표 – 추락사’

‘공통 회의 참석자: ○○의원 N 모 씨, ○○교육청 J 모 국장, 재개발 시행사, 의료재단…’

곁에 앉아 있던 보좌관이 안경을 고쳐 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원님,
아직 실명을 직접 쓰진 않았습니다.
직함과 이니셜만 쓰고,
‘의혹 제기’ 수준으로 톤을 맞춘 기사입니다.”

“그래서 고마워해야 된다는 거야, 지금?”

노 영학이 코웃음을 쳤다.

“‘의혹’이 제일 더러운 거야.
팩트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거.
읽는 사람 머릿속에는
**‘맞나 보다’**만 남는다고.”

그는 TV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봐라.
저기 저 그래픽.
네 사건을 선으로 이어놓고
가운데에 ‘같은 탁자에 앉았던 사람들’ 운운하는 거.
저거 한 번 박히면…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아도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보좌관 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법적으로 대응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가짜뉴스 규제법 적용 가능성도 있고요.”

노 영학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법은 당연히 써야지.
근데 요즘은,
법보다 댓글이 더 세거든.”

그는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온라인에서 캡처해온 댓글들.

“혹시 이거 진짜 복수하는 ‘사신’ 있는 거 아님?”
“병원, 학교, 건설사, 정치인까지 한 줄로 엮인 거 보니까
누군가 위에서 쓸어버리는 느낌인데.”
“도시의 전령 ㅋㅋㅋ
나도 우리 팀장 좀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네.”

노 영학이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문제야.
이 나라는 스스로 책임지는 걸 싫어하면서,
동시에 ‘대타 처벌자’를 찾아.
법원이든, 신이든, 귀신이든.”

회의실 뒤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장 호진.
교육청 생활지도국장.

지난 2장까지는 교실 뒤에서 사건을 덮는 조정자였다면,
이제는 자기 이름이 기사 속 이니셜로 등장하는 당사자였다.

“의원님,
기사에 나온 회의록은…
확실히 구청 기록보관소에서 가져온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불편함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언론 대응’ 논의한 건 사실이고,
‘우울증, 극단적 선택’ 프레임으로
정리하자는 얘기 한 것도 서류에 남아 있죠.
그게… 지금
**‘공모’**처럼 읽히는 겁니다.”

“공모 맞잖아.”

노 영학이 싱긋 웃었다.

“법적 의미의 공모야 아니겠지만,
정치적 의미에선 그 정도는 늘 하는 거지.
다만—”

그는 웃음을 거두고,
장 호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선
너무 길어졌다는 거야.”

그는 손가락으로 공중에 선을 그렸다.

“병원 이사장 죽음.”
“학교 가해자 죽음.”
“재개발 대표 죽음.”

세 점을 잇는 선.

“이 선 뒤에 귀신이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정치인, 교육청, 병원장은
다 ‘귀신의 먹이’가 된다.
현실의 책임이 아니라,
괴담의 소재로.”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괴담이면,
그냥 시간 지나면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노 영학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괴담이 아니라 신앙이 된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요즘 애들,
유튜브에서 ‘도시 괴담’ 같은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도시의 전령’
‘하늘의 심판자’
이런 식으로 이름 붙어서 퍼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진짜가 없어도 진짜가 된다.

장 호진이 낮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간단해.”

노 영학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첫째,
언론에 선을 긋는다.
신문사 상대로 법적 대응,
광고 철회 압박,
편집국 간부 라인에 ‘경고’.”

“둘째,
‘가짜뉴스 방지’ 명목으로
국회에서 한 번 떠들어 준다.
‘근거 없는 음모론,
사회 불안 조장하는 괴담’
이런 표현으로.”

“셋째…”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가장 귀찮은 사람 한둘은
직접 만나든가,
알아서 조용해지게 만들면 된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한 톤 낮아졌다.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찮은 사람이라면…
기자입니까?”

“기자는…
우선 말로 해 보고.”

노 영학의 눈빛이 잠시 비꼬아졌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깨닫게 해 줘야지.”

그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장 국장.”

“…예.”

“당신 아들 일도
이제 더는 새로 나오면 안 돼.”

잠시 뜸.

“한 번 죽은 애는 됐고,
산 사람이라도 관리해야지.”

장 호진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조용히… 정리하겠습니다.”

노 영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벽이 무너질 수는 없어.
조금 금이 가더라도,
겉에 새 페인트칠 하고
균열은 안쪽에서만 막으면 돼.”

회의실 창밖,
도시의 강물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강 아래에는,
이미 세 번의 죽음이
하나의 흐름으로 엮이고 있었다.


2. 신문사, 편집국의 압력

같은 날 오후,
〈도성일보〉 편집국.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공기 자체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듯했다.

컴퓨터 모니터랑 전화기,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사람들의 어깨와 손가락은
조금 더 경직되어 있었다.

사회부 자리로
법무팀 직원 하나가 찾아왔다.

“윤 기자.
시간 좀 괜찮아요?”

윤 서연은 기사 초안을 고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법무팀 직원은
한숨을 먼저 내쉬었다.

“일단,
국회의원실에서 공식 문제제기 들어왔어요.
‘허위사실에 기반한 명예훼손 가능성 검토’.”

서연의 얼굴에는
크게 놀란 기색은 없었다.

“예상은 했어요.”

“교육청에서도
비슷한 내용 공문 들어왔고,
재개발 시행사 쪽은
바로 광고 집행 중단 통보했습니다.
한 3개월 치.”

멀찍이서 듣고 있던 김 팀장이
혀를 찼다.

“예상보다 빠른데.”

법무팀 직원이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회사 입장은…
당분간 ‘추가 기사 자제’입니다.
특히 어제 쓴 그 기사를 확대하는 방향은
지양해 달라는—”

김 팀장이 끼어들었다.

“회사 입장?
사장님 입장이지.”

법무팀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이런 거 전달하는 거
좋아서 하는 거 아닙니다.
근데 지금
신문사 재정 상황 아시잖아요.
병원 광고, 건설사 광고,
다 끊기면…”

김 팀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인쇄기 멈추겠지.
알지.”

서연은 조용히 서류를 바라봤다.

“이건…
보도 지침인가요?
아니면 ‘권고’인가요?”

법무팀 직원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문서로는
‘법적 리스크 최소화를 위한 내부 권고사항’입니다.
하지만…
위에서는
‘알아서 눈치껏 이해하라’는 분위기죠.”

김 팀장이 서연을 돌아봤다.

“한동안은
다른 기사 맡는 게 좋겠다,
이 말이야.”

잠시 침묵.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팀장님,
그럼 제가 쓴 기사에 나오는
피해자들 이야기는요?”

“…”

“병원에서 죽은 아이들,
박 민서 군,
화재로 가족 잃은 사람들…
그 사람들 이름은
이제 누구 기사에 나오죠?”

김 팀장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윤 기자—”

“잠깐 피해 있으라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근데,
‘더 쓰지 말라’는 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건
그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법무팀 직원이 눈을 피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기자님이 하는 말 이해합니다.
근데 저는
회사의 법적 리스크를 관리하는 사람이고…”

“알아요.”

서연이 말을 잘랐다.

“그래서…
회사가 부담되면,
인터넷에라도, 개인 블로그에라도 쓰고 싶을 정도예요.
그냥,
아무 데도 안 쓰는 것보다는—”

“탁.”

김 팀장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멋있을 것 같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개인 블로그에 진실 써 올리고,
익명으로 진실을 외치는 정의로운 고독한 기자.
영화에선 멋있어.”

그는 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근데 현실에선
그냥 소송 한 번에 끝나는 인생이야.”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서연이
조용히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김 팀장이 말했다.

“숨 쉬는 법부터 익혀야지.
오래 싸우려면.”

그는 법무팀 직원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서류는
일단 내게 두고 가세요.
윗선이랑은
내가 한 번 더 얘기해 볼 테니까.”

직원이 나가고 나서야,
김 팀장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윤 서연.”

“네.”

“당장은
한 박자 쉬어.
오늘 내일 기사에선
이 사람들 이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말고.”

서연이 입을 열려다,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대신…
구조 이야기를 해.
구체적 이름 없이도 쓸 수 있는 구조.
사람들이
‘아, 이게 그거구나’
하고 스스로 연결할 수 있게.”

그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우리가 쓰는 건
장부야.
한 번에 다 적는 게 아니라,
페이지를 넘기면서 쓰는 책.
오늘 다 못 쓰면
내일 쓰면 돼.
중요한 건—”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무도 안 쓰는 페이지가 생기지 않게
버티는 거다.”

서연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심해.”

김 팀장이 덧붙였다.

“이런 판에서
제일 먼저 다치는 건
‘유명인’이 아니야.
이름 없는 기자 하나,
이름 없는 제보자 하나.
이런 사람들이
가장 쉽게 지워져.”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경고였다.

서연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래도…
누군가는 써야 하니까요.”

그녀는 노트를 펼쳐
제목 하나를 적었다.

“도시의 뿌리 (연재 기획안)”

그 아래에,
조용히 부제를 덧붙였다.

“– 이름은 지워져도
구조는 남는다.”


3. 도시 괴담, 이름 없는 기도들

며칠 사이,
도시 곳곳에서 이상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 지하철 안.
검은 패딩을 입은 회사원 둘이
서로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야, 이거 봤냐?
‘도시의 전령 썰 모음 ㅋㅋ’”

“뭔데, 또.”

“누군가 정의구현 하고 다닌다는 거.
병원장, 학교 가해자, 재개발 사장…
다 같은 줄에 있던 인간들이라며.”

옆자리 학생 둘이
슬쩍 귀를 기울였다.

“진짜 있다고 생각해?”
“몰라. 근데 웃기잖아.
‘검은 코트 남자가 나타나면
나쁜 놈 하나 죽는다’ 뭐 이런 거.”

어느 고등학교 교실.
쉬는 시간,
아이들 몇이 모서리에서 몰래 떠들었다.

“야, 우리 학교에도
그런 사람 왔으면 좋겠다.”
“누구 먼저 데려갈 건데.”
“담임.”
“야 ㅋㅋ 미쳤냐.”

웃음 사이에
진심이 섞여 있었다.

어느 회사 탕비실.
과로한 직장인 둘이 커피를 타며 중얼거렸다.

“우리 부장도
좀 데려가 달라고 기도해볼까.”
“그래서 진짜 데려가면
그 다음 부장은 누구냐.”
“…아, 그게 문제네.”

동네 공원 벤치 위,
노인 둘이 체온을 나누며 앉아 있었다.

“요즘 뉴스 봤어?
나쁜 놈들만 골라 죽는다는 그 얘기.”
“옛날엔 그냥
‘업보’라 그랬지.
요즘은 뭐라고 부르냐?”
“몰라. ‘전령’인가 뭐래.”

그들의 대화 끝에는
짧은 한숨이 붙어 있었다.

“우리한테도
그런 거 한 번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는
실없는 농담처럼
이런 글들이 올라왔다.

“전령님,
우리 집 위층 층간소음 범도 좀—”
“전령님,
제 전남친도— (이하 생략)”
“야 그만 써라,
저승사자 업무 폭주한다.”

하지만 그 농담들 사이,
어디선가는 진짜 기도에 가까운 글들도 올라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맞고 자랐습니다.
지금도요.
경찰도, 이웃도, 친척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전령님이 있다면,
한 번만 우리 집에 와 주세요.”

“집단 성폭행 피해자인데,
가해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아요.
저 하나만 망가졌습니다.
법은,
‘증거 부족’이라네요.
전령님,
진짜 있다면
그 인간들… 그냥 사라지게 해 주세요.”

“내 아들 죽인 사람들
아무도 처벌 안 받았습니다.
전령님이 진짜 있다면,
한 번만,
한 번만—”

그 글들은
금방 다른 글에 밀려 내려갔다.
추천 수 몇 개,
댓글 몇 줄 남기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글들의 문장은
어디론가 흘러 들어갔다.

마치,
어딘가 장부를 쓰는 사람을 향해
조용히 접수되는 민원처럼.


4. 전령의 방, 선택의 무게

창문이 작은 방.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회색빛이
커튼 틈사이로 스며들었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장부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한 시온
그 장부 앞에 앉아 있었다.

페이지마다 빼곡한 이름들.
어느 페이지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어느 페이지에는 작은 점만 찍혀 있었다.

그 점들은
‘보류’,
‘경고’,
‘관찰 중’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조용히 글자를 읽었다.

“가정 폭력 가해자,
수차례 신고 후도 처벌 없음.”
“성범죄 전과자,
합의와 증거 불충분으로 반복해서 빠져나감.”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
회사를 지키기 위해 피해자를 내보냄.”

그리고,
조금 다른 종류의 문장들도 적혀 있었다.

“초범,
진심으로 뉘우치고
끝까지 책임을 지려 함.”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거절당한 뒤에도
평생 보상하며 살겠다고 다짐함.”
“악의라기보다,
어리석음과 겁 때문이었던 선택.”

이름 옆에는
각기 다른 표시들이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굵은 줄이,
어떤 이에게는
가느다란 연필선이,
어떤 이에게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모든 죄가
같은 무게는 아니다.”

시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모든 죄인이
같은 얼굴도 아니다.”

최근 며칠 사이,
장부에는 이름이 부쩍 많이 올라왔다.

사람들이 댓글로, 글로, 입으로
“전령님 제발”을 외칠수록,
장부에 찍히는 점이 늘었다.

“전령님,
층간소음 좀 해결해 주세요.”
“학원 친구가 내 필통 몰래 훔쳐 갔어요.
벌 좀 주세요.”
“전남친… 전여친… 상사…
옆집… 시어머니….”

그는 그 장난스러운 기도들을
조용히 읽고,
조용히 넘겼다.

“복수와
심판은 다르다.”

그가 하는 일은
‘분노의 대행’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와 사회가 공식적으로 포기한 자리,
“더 이상 방법 없다”고 서류에 기록한 자리,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고개 돌린 자리
이후부터 일하는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장부 한 페이지가
유난히 눈에 자주 들어왔다.

맨 위에는
두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 영학”
“장 호진”

그 아래에는
아직 심판 완료 표시가 없었다.

대신,
굵고 얇은 선이 뒤엉킨 채
복잡한 도표처럼 이어져 있었다.

“병원 확장 예산 승인,
교육청 예산 배분 조정,
재개발 허가,
학교 통폐합,
언론 대응 조율…”

시온은 손가락으로
그 선들을 천천히 따라갔다.

“뿌리.”

그가 낮게 말했다.

“숱한 가지를 먹여 살리는 뿌리.
잘라야 할까,
아니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조금 더 지켜볼까.”

한 번의 심판으로
도시 전체가 무너지는 것,
그것은 그가 맡은 역할이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전체를 갈아엎는 혁명’이 아니라,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지점”에서의 개입이었다.

노 영학과 장 호진의 이름 옆,
그는 작은 표시 하나를 새로 그어 넣었다.

붉은 점 하나.

“조건부 보류.”

그는 그 점 옆에 한 줄을 적었다.

“직접적으로
무고한 진실 말하는 자를 해치려 들 경우,
심판 발동.”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윤 서연.

그녀는 아직
이 구조의 최상층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길게 보면,
반드시 도달하게 될 이름이었다.

“인간의 장부가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한 번 보고 싶다.”

시온은 장부를 덮었다.

“그 전에
그녀를 지워버리려 든다면—
그땐
내 순서다.”


5. 지하 주차장, 경고

비가 올 듯 말 듯,
허공에 수분이 가득한 밤이었다.

〈도성일보〉 건물 지하 주차장.

형광등이 간헐적으로 깜빡였고,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윤 서연은
야근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깨에 걸친 가방은
하루 종일 들고 다닌 노트와 녹취록, 서류들로 묵직했다.

“오늘은 택시 탈까…”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지갑 속 카드 내역이 떠올랐다.

“아니,
버스 타자. 버스.”

그녀가 차들 사이를 지나
출구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하나 더 붙었다.

서연은 처음엔
다른 직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그 발소리가
자기 속도에 맞춰 조심스레 따라오는 걸 느꼈다.

또박, 또박.

그녀는 걸음을 살짝 늦춰 봤다.

뒤의 발자국도
미세하게 속도를 줄였다.

…기분 나쁘네.

서연은
핸드폰을 꺼내는 척하며
뒤를 힐끗 돌아봤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 둘.
같이 내린 사람 같지는 않았다.
시선이 너무…
의도적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방끈을 더 꽉 쥐었다.

“죄, 죄송한데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온 분들이세요?”

남자 하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네.
저희…
경비 쪽에서 나왔어요.
요즘 야근 많은 기자님들 안전 때문에…
같이 나가 드리려고.”

말투는 공손했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꺾이는 억양이었다.

서연의 등골을
차가운 느낌이 훑고 지나갔다.

“그럼…
직원증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그녀가 묻자,
앞에 있던 남자 하나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이러면 좀 곤란한데.”

그 순간,
형광등이 한 번 크게 깜빡였다.

“지지직—”

빛이 두세 번 요동치더니,
주차장 일부가 잠시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겨우 켜졌다.

짧은 어둠 사이,
남자 하나가
한 발 더 다가왔다.

“윤 기자님,
그냥…
기사만 조금 덜 쓰시면 되는 거예요.
세상이 더 편해져요.”

그 말투에는
적대감보다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람의
피곤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린 뭐,
큰 거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위에서 그러라고 하니까—”

서연의 심장이
쾅, 하고 한 번 크게 박동했다.

“…위가 어디죠?”

그녀가 물었다.

“의원실입니까,
교육청입니까,
건설사입니까?”

남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기자님이
그걸 꼭 알아야 됩니까?”

그때였다.

주차장 저편,
출구 방향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단 한 사람의 발소리.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주차장 전체에 고르게 퍼지는 듯했다.

한 시온.

그는
계단에서 내려와
조용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 새끼는.”

순간,
형광등이 또 껌벅였다.

이번에는
빛의 강도가 확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 짧은 어둠 사이,
남자 둘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한 사람.
그 뒤에—
얼굴이 흐릿한 사람들의
줄지어진 그림자.

병원 복도를 떠돌던 아이들,
교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학생들,
그을린 건물 안에서 기침을 하던 노인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야,
봤냐?”

“뭘.”

“뒤에…
사람들—”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온은 이미
세 사람 가까이로 다가와 있었다.

“늦었군요.”

그가 말했다.

서연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쪽이네요.”

그녀는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을
금방 알아봤다.

공사장 앞,
병원 앞,
언제나 ‘사건’ 주변을 맴돌던 얼굴.

남자 둘이 경계하듯 물었다.

“당신 뭐야.
여기 직원이야?”

“직원은 아니지만,
민원 처리 담당이라고 할 수는 있죠.”

시온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는 서연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남자 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윤 기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습니까.”

남자 하나가 비웃었다.

“아, 뭐
기자님한테
세상 사는 법 좀 알려 드리려던 거죠.”

“세상 사는 법이라…”

시온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예를 들면?”

“괜히 윗사람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월급 받으면서 살아라—
뭐, 그런 얘기?”

그 말이 끝난 순간,
주차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물 떨어지는 소리도,
차량 냉각 팬 소리도,
어딘가에서 돌아가던 환풍기 소리도
모두 멎은 듯했다.

시온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들은,
아직
장부의 가장 윗줄에 적힐 정도는 아닙니다.”

남자 둘이
서로를 쳐다봤다.

“…뭐래, 이 미친놈은.”

“다만—”

시온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지금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그때부터는
당신들 이름도 올라갈 것입니다.”

남자 하나가
이를 갈듯 말했다.

“협박이냐?”

“경고입니다.”

짧은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세 사람 사이에 지나갔다.

남자 둘의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그들은 갑자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과
그냥 물러서는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
몸으로 느꼈다.

그 차이는
‘월급’과
‘이름 없는 변사체’ 사이에 있는 거리만큼
멀고도 가까웠다.

“…가자.”

한 남자가 먼저 말했다.

“괜히…
별일 만들지 말자.”

다른 남자도
욕을 한 번 내뱉고는
돌아서 걸어갔다.

“윤 기자님,
오늘은 운 좋으신 줄 아세요.”

그는 마지막으로
씁쓸한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우리도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보내주는 경우 많지 않거든요.”

그들 뒤에서,
형광등이 정상적으로 다시 켜졌다.

물 떨어지는 소리도,
환풍기 소리도
다시 돌아왔다.

마치 방금 전의 일은
잠깐 끼어든 필름 한 컷이었던 것처럼.

서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도와주신 거죠?”

그녀가 겨우 물었다.

시온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서연이 또 물었다.

“제가…
그런 부탁한 적은 없는데.”

“당신은
나와 같은 장부를 쓰고 있으니까요.”

그의 대답은
애매하면서도 명료했다.

“저는
이미 끝난 사건들을 처리합니다.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끝나지 않은 장부를
누군가 억지로 찢어 버리려 들면,
그건
내가 맡아야 할 일입니다.”

서연은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럼,
아까 그 사람들.
정말로—”

“지금은
아직 ‘경고’로 충분합니다.”

시온이 말했다.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람과,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기자님은
계속 쓰세요.”

“뭘요.”

“사람들이
‘몰랐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기록.”

그 말은
격려 같기도,
명령 같기도 했다.

서연은
가방끈을 더 꽉 쥐었다.

“…계속 쓸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하는 일만큼은
제가 알고 있으니까요.”

시온은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충분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그의 뒷모습은 어둠과 빛 사이에 섞여
평범한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6. 문 앞의 쪽지, 그리고 하나의 문장

그날 밤,
원룸 앞 복도는
조용했다.

백열등이 노랗게 빛나고,
누군가 놓고 간 택배 상자 몇 개가
문 앞에 쌓여 있었다.

윤 서연의 집 문 앞에는
그 어떤 상자도 없었다.

대신,
문틈 아래로
흰 종이 한 장이
살짝 밀려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다가
그 종이를 발견했다.

“…뭐지.”

종이는
A4 반 장 크기,
접히지도 않은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종이를 집어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당신의 기록도 장부다.
계속 쓰시오.”

출처도,
발신자도 없었다.

글씨체는
놀랄 만큼 평범했다.
은행 서류나 병원 문진표에 적힐 법한
투박한 펜글씨.

그러나 그 문장은,
오늘 하루
그녀에게 쏟아졌던 나머지 말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계속 쓰시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은
명령처럼 들리기도 했고,
기도처럼 들리기도 했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을 때,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새 문서를 열고,
제목을 쳤다.

“연재 기획 – 도시의 장부”

그리고
첫 문장을 적었다.

“어떤 도시는
눈에 보이는 예산과 통계로 움직이고,
어떤 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만과 죄책감으로 버틴다.”

그 문장을 쓰는 순간,
어딘가 다른 방에서
한 시온이 장부를 펼쳤다.

오늘 날짜 아래,
그는 짧게 적었다.

“윤 서연 – 기록 지속.
인간의 장부,
본격 작성 시작.”

그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손을 모았다.

“이 도시의 성벽은
이제 안에서,
바깥에서 동시에 금이 가고 있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천천히 깜빡였다.

어제와 똑같은 야경처럼 보였지만,
아주 미세하게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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