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3장 – 도시의 뿌리

3장 – 도시의 뿌리

1. 작은 카페, 두 개의 장부

오후의 햇빛이 창문을 비껴 들어, 오래된 카페의 테이블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유리창에는 손때가 조금 묻어 있었고, 벽에는 구석이 약간 누렇게 바랜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학생들이 떠드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달리, 이곳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창가에서 세 번째 자리.
윤 서연은 노트를 펼쳐 둔 채, 맞은편 여인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작은 새처럼 주름진 손.
손등에는 설거지와 청소로 굳어진 굳은살이 툭툭 박혀 있었다.
그 손이 종이컵을 쥔 채, 끝까지 들어 올리지 못하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어보세요, 기자님.
나… 이제 할 말 다 할 거라서요.”

여인의 목소리는 이미 많이 닳아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오래 울어 버리면,
목소리마저 울음을 닮는다는 것을 서연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박 정희,
2년 전 강가에서 몸을 던진 고등학생 박 민서의 엄마였다.

서연은 펜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서 군 이야기부터…
처음부터 들려주세요.
어디까지가 공식 기록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워진 진실인지
차근차근… 부탁드립니다.”

정희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컵 밑에 작은 물자국이 생겼다가, 천천히 번져 갔다.

“공식 기록이요?”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공식 기록에는요,
제 아이가… 그냥 ‘우울한 아이’로 적혀 있어요.
‘학업 스트레스, 가정 스트레스, 예민한 성격’.
그러다 어느 날, 혼자 강으로 갔다고요.”

그녀는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초록색 PP 화일, 위에 검은 매직으로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박 민서 사건 관련 서류.”

서연의 심장이 살짝 빨라졌다.

“이건…?”

“지난 2년 동안 받은 거, 모은 거,
안 받겠다는 걸 억지로 받아낸 것들까지…
다 모은 거예요.
경찰, 교육청, 학교, 상담센터, 심리치료소…”

정희는 천천히 화일을 넘겼다.

첫 페이지에 경찰서 로고가 찍혀 있었다.

“고인(故 박 민서)은 사망 전 우울 관련 상담을 받은 바 있으며,
유서에 해당하는 메모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변 진술 종합 결과 극심한 심리적 압박과 학교 적응 스트레스로 인한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됨.”

굵은 글씨로 강조된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가,
페이지 중간에서 눈을 잡아끌고 있었다.

“…여기엔 ‘학교 폭력’이란 말이 없네요.”

서연이 말했다.

“네.
없애달라고…
누가 그랬거든요.”

정희의 눈빛이 잠시 강해졌다.

“누가요?”

“처음에는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아이 장례 치르고 나서,
학교에서 뭐라 뭐라 하더니…
‘어머님, 인터넷에 학교 이름 오르내리면…
민서가 다니던 학교가 욕먹는 거고,
그러면 고인한테도 안 좋다’고…”

그녀는 비웃음을 참듯 입술을 씹었다.

“그 다음에는…
교육청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혹시, 이름이…”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 호진이었나요?”

정희는 놀란 눈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세요?”

서연은 대답 대신,
자신의 노트 한쪽에 적혀 있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세광병원 소아병동 사건 관련 문서에서,
비슷한 이름을 봤거든요.
‘교육청 생활지도국장 장 호진’.”

정희의 손끝이 굳었다.

“…그 사람이 맞아요.
그 사람이 제 앞에서 앉아 있었어요.
넓은 책상 뒤가 아니라,
집 식탁에… 그냥 앉아 있었어요.”

그녀는 그날의 장면을 떠올렸다.

좁은 전셋집 거실,
삐걱거리는 식탁,
한쪽에 놓인 민서의 사진.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의자를 당기고 앉았다.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낮았다.

“어머님,
저희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이 사건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때 장 호진은
민서의 사진을 바라보며,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연습 많이 된 몸짓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앞에 붙으면,
아이의 죽음이…
오히려 자극적인 기사 소재로만 소비될 수 있습니다.
언론과 인터넷은…
그런 걸 가만두지 않거든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사건을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 학교에는 최대한 행정지도와 지도를 강화하겠습니다.
가해 학생들도… 크게 다치지 않게,
교육적으로 지도하는 방향으로…”

정희는 그 말이 끝났을 때,
당장 그 자리에 있는 물잔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제 아이는 교육적으로 죽었나요?”

그 질문은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실제보다 훨씬 작아진 자신의 모습을 느꼈다.

“대체,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카페로 돌아와,
정희는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연은 그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뒤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요.
‘시간이 약’이라면서.
근데 기자님…
시간이 약이 되는 건,
치료할 의지가 있는 상처일 때뿐이에요.
치료도 안 하면서, 그냥 덮어놓고…
시간만 보내면…
그건… 썩는 거예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제는 통곡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라버린 것도 아닌,
묵직한 한 방울.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시간을 약으로 만드는 건…
사람이에요.
치료할지, 덮어버릴지 선택하는 사람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정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기록할게요.
병원 사건만이 아니라…
민서 군 이야기도 같은 장부에 올릴 거예요.
이 도시가 버린 사건들,
하나의 ‘구조’ 아래 묶이게.”

정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작게 떨리고 있었다.

“…기자님.”

“네.”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은 솔직했고, 절박했다.

서연은 곧바로 “달라질 거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한 뒤,
조금 돌아 들어가는 답을 골랐다.

“바뀌지 않는 세상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어차피 아무것도 안 달라져.’
그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게 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할 일이 있다고 믿어요.”

그녀는 노트를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슬픈 미소였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쪽의 미소였다.

“그리고…
바꾸는 사람은,
항상 누군지 모르는 데서부터 시작하잖아요.
‘도대체 누가 이걸 시작했을까?’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정희는 잠시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누가 한 번은…
우리 애 이름을 제대로 불러줬으면 했어요.”

그 순간,
카페 창 밖으로 지나가는 버스 옆면에
세광의료재단,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학교 혁신’**이라는 문구가 붙은 광고가 스쳐 지나갔다.

서연은 그 광고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시 재개발… 학교 혁신…
결국, 같은 사람들이 엮여 있을 확률이 높지.”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름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세광병원 – 교육청 – 재개발 시행사 – 지역 정치인.

그리고 그 맨 아래,
이야기를 해줄 사람도 없이 사라진 이름들.

세 아이, 박 민서.

그녀는 노트 상단에 굵게 한 줄을 적었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장부
국가가 쓰는 장부,
피해자들이 마음속에 쥐고 있는 장부.”


2. 구청 지하, 먼지 나는 서류

다음 날,
서연은 구청 지하 기록보관소에 있었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좁은 공간.
철제 선반 사이로 빽빽이 들어찬 두꺼운 문서함들,
약간 퀴퀴한 습기 냄새.

“이쪽이에요, 여기.
재개발 관련 회의록은 여기 다 들어 있어요.”

구청 공무원 김 주무관이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그는 귀찮다는 티를 완전히 숨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형식적인 친절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자님…
이게 다 오래된 거라…
찾으시려면 좀 걸릴 텐데.”

“괜찮습니다.
시간은 제가 낼게요.”

서연은 장갑을 끼고 상자를 하나씩 꺼냈다.

상자 겉면에는 검은 매직으로 숫자와 연도가 적혀 있었다.

“○○구 ○○동 재개발 추진위원회 회의록”
“학교 통합·이전 계획 협의서”
“지역 교육환경 개선 협의체 회의 자료”

그녀는 ‘2년 전’이라는 날짜를 중심으로 상자를 골랐다.
그해, 박 민서가 죽었고,
그해, 세광병원은 새 어린이 재활센터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문서들을 넘기며,
서연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들을 체크했다.

“세광의료재단 이사장 민 도현.”
“○○교육청 생활지도국장 장 호진.”
“○○구 재개발 추진위원장 겸 ○○건설 대표이사 조 기철.”
“지역 국회의원 노 영학 (국회 보건·교육 상임위 소속).”

그 이름들이,
각기 다른 문서의 서로 다른 칸에서
슬며시 서로를 향해 선을 그리고 있었다.

학교 이전 계획 안건인데,
재단 이사장이 참고인으로 참석해 있다.
재개발 추진 회의인데,
교육청 국장이 배석해 있다.
병원 기부 감사장 사진 속 한쪽에,
지역 국회의원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서 있다.

“…재개발, 병원 확장, 학교 통폐합, 교육 환경 개선.”

겉으로는 모두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하지만, 그 타이틀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 자리를 잃고 쫓겨나고 죽어 나갔는지는
어느 보고서에도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았다.

서연은 회의록 한 장에서 눈을 멈췄다.

“안건 3) ○○고 박○○ 군 사망 사건 관련,
지역 정서 안정과 재개발 사업 추진을 위한
언론 대응 및 학교·교육청 입장 조율 건.”

그 아래,
발언자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노 영학 의원:
언론에 과도한 자극적 표현이 사용되지 않도록,
‘우울증, 개인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학교 폭력 여부는 모호한 부분도 많으니,
조사 중이라는 선에서 발표를.”

“장 호진 국장:
동의합니다.
학폭위가 열리더라도 비공개로 진행하고,
결과는 ‘지도 강화’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가해 학생들에 대한 처벌은…
교내 봉사와 상담 위주로.”

“조 기철 대표:
재개발이 이제 막 탄력을 받는 시기라,
지역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도 향후 이 지역 학교 환경 개선에
기부와 투자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줄,
회의록 작성자가 덧붙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회의 참석자 전원, 위 제안에 이의 없음.”

서연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이의 없음…”

그 말은,
누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도 아니고,
누가 사과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다 같이 침묵하자”**는 합의에 가까웠다.

그녀는 회의록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허리를 펼 때,
등뼈가 삐걱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기자님, 찾으시는 거…
나왔나요?”

김 주무관이 물었다.

“네.
충분히요.”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분들이 얼마나 ‘이의 없음’에 익숙한 분들인지
세상에 좀 알려 보려고요.”

기록보관소 문을 나오는 순간,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열었다.

“도시의 뿌리 –
병원, 교육청, 재개발, 국회의원.
같은 탁자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

그녀는 그 문장 위에,
짧게 한 줄을 덧붙였다.

“그 탁자를…
누가 한쪽에서 뒤집고 있는 느낌이 든다.”


3. 화재, 붕괴, ‘노후 건물’

같은 시각,
도시 반대편의 오래된 다세대 주택가.

한때는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지금은 노인들이,
가난한 세입자들이 살고 있는 좁은 골목들.

그 골목 한 가운데,
검게 그을린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2층짜리 낡은 건물.
창틀은 녹슬었고, 벽에는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1층 현관문은 부서져 있었고,
철문 위에 걸린 작은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화재 유가족 추모 –
진실 규명을 원합니다.”

현수막의 글자는,
햇빛과 비를 오가며 많이 바래 있었다.

건물 맞은편,
횡단보도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코트, 두 손은 주머니 속.
한 시온이었다.

“2년 전 화재,
사망 5명, 부상 8명.”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발표된 화재 원인:
‘노후 건물 전기 배선 문제, 관리 소홀’.”

그 사건은 한때 뉴스에 짧게 올라왔다.

[○○구 노후 주택서 화재… 5명 숨져]
[“재개발 앞둔 동네, 안전 사각지대”]

몇 날 며칠 인터넷에서는 탄식이 오갔다.

“불나면 다 끝이지 뭐.”
“저런 동네에선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다른 뉴스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 골목에서는,
그날 이후로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았다.

1층에서 숨진 노부부,
2층에서 가족을 잃은 청년,
퇴근길에 집에 들어오다 연기에 질식해 쓰러진 노동자.

그들의 이름은
구청과 시청의 긴급복지 서류 몇 장에 찍혀 있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사건 기록에는
재개발 시행사의 이름이 언뜻 언급되어 있었다.

“○○건설(대표 조 기철) 측은
건물 소유주와의 계약 상 건물 관리 책임이
자신들에게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한 시온은 눈을 감았다.

장부가 펼쳐졌다.

[조 기철 – 기록 열람]

중년 남자 하나의 인생이 빠르게 흘렀다.

시공사 현장 소장으로 시작한 청년.
비리와 탈세, 유령회사 납품, 불법 하도급을 밟고 밟아
결국 지역 재개발 시행사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라갔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머릿속에서 **“사람”과 “세대 수”**는 비슷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8세대짜리 낡은 건물 하나 정리하면,
200세대 아파트 한 동이 들어서요.”
“어차피 내보낼 사람들도…
다른 데 가서 월세 살 거잖아요.
재개발은 ‘도시를 건강하게 만드는 수술’입니다.”

그는 그렇게 방송에 나와 말했다.

그러나,
장부에는 다른 숫자가 적혀 있었다.

“건물 내부 전기 배선 교체비 견적 –
5천만 원.”
“보상 없이 강제 퇴거를 막겠다는 주민 측 집단 소송 –
잠재적 비용 수억.”
“노후 건물에 ‘우연히 난 불’ 이후,
재개발 사업 속도 – 2배 가속.”

그리고 회의실 한가운데,
같은 이름이 모여 있었다.

“민 도현 – 세광의료재단.”
“장 호진 – 교육청.”
“노 영학 – 국회의원.”
“조 기철 – 재개발 시행사.”

그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의 사업과 커리어를 도와주고 있었다.

병원은 새 어린이 재활센터를 짓고,
교육청은 학교 통폐합을 밀어주고,
재개발사는 노후 주택을 날려 새로운 아파트를 세우고,
국회의원은 그 과정들을 ‘미래를 위한 투자’라 부르며 법과 예산을 밀어줬다.

그 사이에서,
가난한 세입자들이 죽고,
학교 아이들이 죽고,
병원 아이들이 죽었다.

“국가는, 이 연쇄를 ‘성장’이라고 불렀다.”

시온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그을린 벽을 타고 올라갔다.
검게 탄 자국 사이사이에,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왔던 비명들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세입자 28세대 강제 퇴거 협박,
보상 협의 중 화재 발생,
재개발 속도 가속 —
유가족 민원, ‘장기 검토’로 분류 후 장기 미해결.”

그는 낮게 말했다.

“이 골목의 불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가의 장부는 닫혔지만,
다른 장부는 아직 다음 페이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구조의 근원은
조 기철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뿌리는 더 깊다.
하지만 뿌리를 뽑기 전에,
가지 하나쯤은 먼저 잘라내야 한다.”

그는 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검은 코트,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
하지만 그 눈동자는,
오늘 밤 누구의 이름을 부를지 이미 알고 있었다.


4. 골프장, 그리고 떨어지는 사람

해질 무렵,
도심 외곽의 대형 골프장 클럽하우스.

창밖으로 잘 다듬어진 잔디가 펼쳐져 있었고,
실내에는 낮은 재즈 음악과 고급 위스키 냄새가 섞여 있었다.

라운드를 마친 중년 남자들 몇이
샤워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 요즘 애들…
노후 건물이라고만 하면 다 ‘철거하라’고 난리야.”
“그래야 부동산 값이 오르거든.”
“결국 우리가 ‘욕’ 먹고,
지들은 ‘쾌적한 도시’에서 살아.
억울하면 우리처럼 위로 올라오든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크게 웃었다.

조 기철이었다.

그는 새로 맞춘 골프웨어를 입고,
얼굴에는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색이 감돌았다.
겉으로만 보면,
성공한 사업가의 전형적인 모습.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잔을 들어올렸다.

노 영학,
지역구 국회의원.

그는 국회 보건·교육 상임위 소속이었고,
언론에는 “서민의 친구”, “교육과 복지에 진심인 정치인”이라는 타이틀로 종종 소개되었다.

“이번 ○○동 재개발도 수고 많았네, 조 대표.
화재 사고 때문에 좀 시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와서 보면,
‘결과적으로’ 동네가 많이 좋아졌잖아?”

노 영학이 웃으며 말했다.

조 기철은 잔을 부딪치며 맞장구를 쳤다.

“의원님이 도와주셨죠, 뭐.
의원님 사무실에서 교육청이랑 회의 열어주지만 않았어도
학부모들, 주민들 난리 났을 겁니다.”

“에이, 뭘.
나는 그냥 가운데서 말 좀 전한 것뿐이고.
요즘 세상에 누가 그렇게 대놓고 도와주나.
다들… ‘이의 없음’으로 돕는 거지.”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아, 그나저나…
세광병원 이사장 그 양반, 너무 허무하게 갔더라?”

노 영학이 말했다.

“네.
저도 연락 받았을 때, 좀 놀랐습니다.
그래도, 갈 사람은 가야죠.
사람은 떠나도, 프로젝트는 남으니까요.”

“역시 사업가 마인드야, 조 대표는.”

그들은 서로의 잔을 한 번 더 부딪쳤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조 기철은 자신의 차 열쇠를 들고 클럽하우스를 나왔다.

골프장 옆에는
○○동 재개발 예정지의 모형이 전시된 비닐 하우스가 서 있었다.

“앞으로 이 지역은
‘아이들이 뛰노는 친환경 주거단지’로 거듭납니다.”

설명 패널의 문구였다.

조 기철은 그것을 흘깃 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비닐하우스 옆 공사 현장 방향에서
발자국 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콘크리트 위를 밟는 소리,
규칙적이고, 침착한.

조 기철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어둠 속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한 시온.

“현장 점검이라도 나왔나?”

조 기철은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밤에 현장을 둘러보는 사람은 여러 부류가 있었다.
심야 작업을 준비하는 작업반장,
경비원,
발주처 사람,
우연히 길을 잘못 든 사람.

그러나 이 남자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안내 받으셨어요?
여기, 지금 출입 통제인데.”

조 기철이 물었다.

“그래서 왔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게도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조 기철 대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조 기철은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이름을 아네.
어디서 봤었나?”

“장부에서 봤습니다.”

“장부?
세무서에서라도 나왔나?”

조 기철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세무조사 정도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받아.
사람 하나 건들려면,
세금 말고는 뭘로 건들겠어?
근데 말이야…”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법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 장사한 사람을
도덕으로만 욕할 순 없는 거야.”

시온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법이 허용하는 선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바뀌었다.”

“그걸 내가 바꿨나?
위에서 정한 규칙대로 움직였을 뿐이지.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노후 건물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 건 나라 아니야?”

그는 익숙한 논리를 술처럼 쭉 들이켰다.

“나는 그냥…
나라가 하라니까,
조금 더 재빠르게 움직였을 뿐이야.”

시온이 고개를 아주 약간 기울였다.

“그래서,
노후 건물의 전기 배선을 방치했고,
안전 점검 보고서를 조작했고,
화재 이후 유가족들을 ‘몇 푼’으로 막으려 했지.”

“그 ‘몇 푼’이
걔네가 평생 만져본 돈 중에 제일 많았을걸?”

조 기철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게다가, 그런 동네 사람들…
결국엔 다 잊어.
새 아파트 짓고,
공원 하나 만들어 주면,
나중엔 누구도 안 물어봐.
이 자리에 뭐가 있었는지.”

시온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묻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여기서 죽은 사람들의 가족.
밤마다 이 골목을 돌아다니는 기억들.
재개발로 어디론가 쫓겨나
아직 짐도 다 풀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을린 건물을 가리켰다.

“이 골목의 불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 기철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말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지금 와서 유가족들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그게 현실적인 해결책 같냐?”

“아니다.”

시온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끝났다.
이제, 해야 할 일을 하는 건 나다.

그 말이 끝난 순간,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골프장 잔디도,
비닐하우스 모형도,
클럽하우스도 사라졌다.

대신—
조 기철의 발밑에는
기둥만 올라간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외벽도, 난간도 없는
재개발 현장의 한가운데.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아찔한 높이.

“씨… 씨발, 뭐야 이게…”

조 기철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뒤는 이미 비어 있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쳤다.
어디선가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그 소리는 그가 무시하려 했던
화재 당시의 소리였다.

“여기가… 어디야…”

“네가 만든 도시의 한 칸.”

시온이 말했다.

“너는 늘,
도면 위에서 숫자와 선으로만
이 공간을 봤겠지.
하지만 이곳에는,
불이 날까 봐 잠 못 자던 노인,
어디로 쫓겨날지 몰라 짐을 싸 두고 살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대답 대신,
조 기철의 숨이 거칠어졌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어
바닥의 먼지가 훅 날렸다.

그러자,
기둥 사이사이에 사람들의 윤곽이 하나둘 떠올랐다.

연기로 그려진 듯한 형체들.
기둥 사이에서 기침을 하고,
창문 없는 벽 뒤에서 손을 흔들고,
복도에서 아이를 안고 울던 사람들.

조 기철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박제된 사람처럼,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만… 그만 보여줘…”

“이걸 보지 않으려고
법을 앞세웠다.
‘기준치’, ‘규정’, ‘절차’라는 말을 방패처럼 써 가며.”

시온의 말은 담담했다.

“그러나 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너는,
사람을 빼고 숫자만 남겼다.”

그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

동시에,
조 기철의 발밑 콘크리트 가장자리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뚝—, 뚝—”

철근이 휘어지고,
부서지고 떨어져 나갔다.

아래쪽 어둠 속에서는
잠긴 목소리들이 하나둘 섞여 올라왔다.

“우리가 노후였나요,
건물이 노후였나요…”
“살고 싶어서 버티던 집이었는데,
왜 ‘정리해야 할 대상’이 됐나요…”

조 기철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잡을 난간이 없었다.

“도와줘…
누군가…”

그때,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대표,
이건 진짜 어쩔 수 없어요.”

노 영학의 목소리였다.

“도시가 발전하려면,
누군가는 좀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들 그런 건 이해하죠.”

그가 ‘이해’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온은 고개를 조금 저었다.

“누군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은
항상 ‘너 말고 다른 누군가’라는 뜻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렀다.

“조 기철.”

그 순간,
콘크리트 바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몸이 떨어지는 감각.
바람이 귓가를 찢는 소리.
손끝에서 공기가 미끄러져 나가는 느낌.

조 기철은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목소리조차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함께 떨어져 버렸다.

현실 세계에서,
골프장 옆 공사 현장 경비원은
멀리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쿵!”

그는 놀라서 뛰어가 봤다.

어둠 속 콘크리트 바닥 위에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조 기철.
머리는 심하게 다쳤지만,
피는 이상할 만큼 적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놀라움과 공포의 흔적만이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경비원은 허둥지둥 전화기를 꺼냈다.

“112죠?
여… 여기 사람 한 명이…
공사장 옥상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조금 뒤,
경찰 차와 구급차가 도착했다.

사건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대표이사 조 모 씨,
야간 현장 점검 중 추락사.
타살 정황 없음.
안전 수칙 미준수에 의한 사고사로 추정.

그리고,
재개발 사업은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속도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딘가 다른 장부에는
오늘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5. 첫 만남 – 교차점

사건 발생 2시간 후,
현장 인근은 이미 통제되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출입을 막고 있었고,
노란 폴리스 라인이 허공에 걸려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잦아들 무렵,
검은 외투를 걸친 여자가 현장 쪽으로 뛰어왔다.

목에는 기자증.

윤 서연이었다.

“〈도성일보〉입니다.
조 기철 대표 추락 관련해서—”

경찰관 하나가 손을 들어 막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출입 안 됩니다.
대변인 통해서 브리핑 나갈 겁니다.”

“2년 전 화재 사건 관련해서도
브리핑 그렇게만 하셨죠.
‘노후 건물, 관리 소홀’이라고요.”

서연의 말에,
경찰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건…
지금 건과는 별개입니다.”

별개인지 아닌지는
제가 묻고, 제가 쓰겠습니다.

서연은 억지로 밀고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멀찌감치에서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냄새,
살짝 젖은 흙 냄새,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철근의 먼지.

그녀의 시선이 공사장 주변을 훑다가,
공사장 외곽 펜스 쪽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 나오는 모습을 포착했다.

검은 코트,
정장도, 작업복도 아닌 옷차림.
헬멧도 쓰지 않은,
현장 사람 같지 않은 남자.

한 시온.

그는 경찰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비켜나
조용히 도로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서연은 본능적으로 그를 불렀다.

“저기요!”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남자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드러났다.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확실히 기억 안 나는 얼굴.

병원 앞 벤치,
소아병동 간호사의 증언 속 ‘검은 코트의 남자’,
그리고…
어딘가 더 먼 곳에서 이미 서성이고 있던 실루엣.

“여기…
현장 관계자세요?”

서연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시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너무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관계자라고 할 수 있겠죠.”

“어디 소속이신데요?
시공사 쪽인가요,
발주처인가요,
아니면… 공무원인가요?”

그녀의 질문에는
자연스럽게,
“혹시 수사기관인가요?”
라는 의미도 섞여 있었다.

시온은 미소도 짓지 않은 채 말했다.

“소속이라…
굳이 말하자면,
이 도시의 불만을 처리하는 부서쯤 되려나요.”

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농담이시죠?”

“농담이면 좋겠죠.”

시온이 고개를 약간 돌려
공사장 쪽을 보았다.

“노후 건물에서 불이 나고,
아이가 학교에서 죽고,
병원에서 아이들이 새벽마다 죽고…
그때마다 국가와 도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마치 오래된 법정을 울리는 판결문처럼
묵직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디엔가는 책임이 쌓입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갚아야 할 책임’이요.”

서연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쉬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추락도,
그 ‘책임’의 일부라는 건가요?”

“당신이 쓰는 언어로는…
그게 가장 가까운 표현일 겁니다.”

시온이 그녀를 바라봤다.

“기자님이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사람이 쓰는 글은,
가끔 그 사람의 얼굴보다 먼저 세상에 드러나요.”

그의 말은 이상했다.
하지만,
서연은 묘하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세광병원 기사 잘 읽었습니다.”

이 한 마디에,
서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읽으셨어요?”

“네.
누군가는
기록을 써야 하니까요.
국가의 장부에 적히지 않은
이름들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 장부와,
제가 들고 있는 장부가
언젠가 같은 페이지를 공유하게 되겠죠.”

서연은 본능적으로 물었다.

“당신…
경찰이세요?”

“경찰이 포기한 곳부터
저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는 대답을 회피하는 동시에
가장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서연은 다시 한 번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름이 뭐예요?”

순간,
시온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금방 잊히니까요.”

“저는 안 잊을 건데요.”

서연이 맞받아쳤다.

“제가 쓰는 기록에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생각해 둬야 하니까요.”

시온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미소라 부르기에도 아슬아슬한 움직임이었다.

“…그럼,
마음대로 부르세요.”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만—”

한 번 더,
그의 눈과 서연의 눈이 마주쳤다.

“기자님이 쓰는 기록이
사람들을 살리는 쪽에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덜 죽을 수 있는지를 쓰는 것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그 말만 남기고,
그는 돌아서 걸어갔다.

잠시 후,
사람들 사이로 스며든 그의 뒷모습은
그냥 또 하나의 그림자처럼
도시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서연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그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지.”

그녀는 노트를 꺼냈다.

“검은 코트,
병원 앞,
공사장,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

그리고,
페이지 상단에 이렇게 적었다.

“가제:
도시의 전령(傳令).


6. 균열

그날 밤,
〈도성일보〉 온라인판에는
새 기사가 하나 더 올라왔다.

기자: 윤 서연.

[연결된 죽음들 –
병원, 학교, 재개발의 공통된 이름들]

기사에는 구체적인 실명 대신
이니셜과 직함만 쓰여 있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2년 전 고등학생 박 모 군의 투신,
같은 해 ○○구 노후 주택 화재 참사,
최근 세광병원 소아병동 아동 3명 새벽 사망,
그리고 오늘 새벽,
재개발 시행사 대표 조 모 씨의 추락사…”

“이 네 사건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벌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회의록과 서류를 통해 확인한 결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같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기사에는 구청 기록보관소에서 찍은
회의록 일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 실려 있었다.

댓글창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결국 다 한통속이었네.”
“병원, 교육청, 재개발, 정치인…
이 나라 부패 올스타전이다 진짜.”
“근데… 진짜인가?
이거 영화 시나리오 아니고?”

그 와중에,
어떤 댓글 하나가 눈에 띄게 추천을 받으며 올라갔다.

“병원 이사장 죽고,
학교 가해자 애 죽고,
재개발 대표 죽고…
이거 혹시…
누가 위에서 한 명씩 정리하는 거 아냐?

그 댓글에 달린 답글들은 농담과 진지함이 섞여 있었다.

“도시의 저승사자 ㅋㅋㅋㅋ”
“법이 못하면 하늘이 한다더니,
진짜 하늘 직원이 있는 건가.”
“그 직원 연봉 얼마냐…”

윤 서연은 모니터 앞에서
그 댓글들을 조용히 내려 읽었다.

‘누가 위에서 한 명씩 정리하는 거 아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공사장 앞에서 만난 검은 코트의 남자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균열이 생겼다는 증거겠지.

그녀는 기사 편집 화면을 닫고,
책상 서랍에서 새 노트를 꺼냈다.

표지에 조용히 제목을 적었다.

“프로젝트:
도시의 장부.”


7. 두 개의 기록

어딘가 작은 방 안에서,
한 시온은 장부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 날짜 아래,
새로운 줄을 적었다.

조 기철 – 심판 완료.
죄목: 도시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노후 주택 거주민을 비용과 숫자로만 계산함.
화재와 붕괴를 ‘운’과 ‘노후’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함.
형량: 자신이 도면으로만 봤던 공간 속에서,
피해자들의 시선과 공포를 끝없이 반복 체험함.

그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손을 모았다.

창문 밖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켜져 있는 도시의 불빛들이
느릿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TV에서는,
국회의원 노 영학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최근 불행한 사고들이 겹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음모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도시는 성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도 생기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시온은 리모컨을 집어 TV를 껐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죽음을 설명하는 말.”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 도시는
조금씩 자신이 뭘 잃었는지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는 책상 위에 펼쳐진 장부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똑같은 날짜 위에,
또 하나의 기록이 겹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 서연이 오늘 쓴 기사.

한쪽에는
하늘의 장부,
다른 한쪽에는
신문사 서버 안의 기록.

두 개의 기록은 서로 닿지 않았지만,
분명히 같은 문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도시에,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시온은 장부를 덮었다.

“곧,
더 깊은 뿌리를 건드릴 때가 온다.”

그의 시선 저편에는
국회의원 노 영학,
교육청 국장 장 호진,
그리고 아직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이름들이 어렴풋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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