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32장 – 이름을 팔아 죄를 짊어진 자 1. “사과를 맡아 드립니다” – 새로운 얼굴 강인섭 이사장의 부고가 신문 구석에 조용히 실린 지 한 달쯤 지난 봄. 도시는 새로운 파문 하나에 휘말려 있었다. “○○그룹 계열사, 하청 노동자 사망 은폐 의혹.” 야간 공장에서 기계에 끼인 노동자가 사망한 뒤, 사측이 신고 시간을 늦추고, 안전 기록을 조작하고, 유족에게 “조용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제보가 터졌다. 유족의 눈물, 현장 동료들의 증언, 노동단체의 기자회견. 며칠 동안 뉴스는 그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그 혼란의 중심에 새로운 얼굴 하나가 TV 화면에 나타났다. 검은 정장, 정돈된 머리, 적절히 낮은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사건 관련 대외 대응을 맡게 된 변호사 한도진입니다.” 자막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위기관리 전문 변호사 / ○○공익법센터 이사”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고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법률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그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을 마치 입안에서 굴려 본 뒤 천천히 꺼내는 사람처럼 정확한 속도로 발음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회사는 인사 조치와 안전 시스템 전면 재점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상처를 깊이 유감 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 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이번 일은 일부 관리자의 심각한 판단 미스와 현장 시스템상의 허점이 겹친 불행한 사고다.” 문장들은 부드럽게 흘렀다. 사과와 변명, 책임과 면책, 위로와 요청이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질문이 나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차원의 책임자는 누구라고 보십니까?” 한도진은 조금도...

심판의 전령 - 20장 – 단두대 위에 선 자와 단두대 아래에서 지켜보는 자들

20장 – 단두대 위에 선 자와 단두대 아래에서 지켜보는 자들

1. 법정 앞의 줄 – 모두가 제 시간에 도착한 날

○○지방법원 앞.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법원 정문 앞 인도는
평소보다 한참 일찍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오늘이 정○○ 1심 첫 공판이지?”
– “응. 방청석 자리 잡으려면
7시 전에 와야 한다더라.”
– “그래도 와야지.
이 도시가 자기 얼굴을
어디까지 마주보는지
직접 봐야 하니까.”

경찰들이 설치한 질서유지선 너머로
카메라 삼각대와 마이크들이
숲처럼 서 있었다.

  • “정○○ 회장,
    구조적 인권 침해와 업무상 과실치사 등
    12개 혐의로 오늘 첫 재판에 출석합니다.”

  • “도시의 장부 보도로 촉발된
    이번 수사와 재판은,
    우리 사회가 ‘구조적 악’을
    어디까지 형사 책임으로 끌어낼 수 있는지
    시험대가 되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서로 위치를 잡느라 분주했다.

윤 서연은
카메라맨과 함께
법원 계단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목에는 취재 패스,
손에는 취재 노트.

한 지우는
변호인 열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피고인석 맞은편,
증인과 참고인,
피해자 측 대리인들이 앉는 자리에
조용히 앉을 예정이었다.

오늘 나는
이 재판의 주인공이 아니다.

다만
이 도시가
자기 장부를 읽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증인 중 한 명일 뿐.

법원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장민수.

– “기자님,
저…
도착했습니다.”

– “법원 입구 앞입니다.
그래도…
들어가야겠죠.”

서연이
입가를 다잡았다.

“네, 아버님.”

“우리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오래 걸렸습니까.”

“오늘
안 들어가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아버님이
하늘이 이름을 불러준
그날 공청회까지도
묻히게 됩니다.”

잠시 침묵 끝에
장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알겠습니다.”

– “오늘은
아이 사진이 아니라
제 얼굴로 들어가겠습니다.”

– “이 도시가
죄를 묻고 싶다면—”

– “먼저
제 얼굴부터
기억하게 해야겠지요.”

통화를 끊고
서연이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
법원 정문 쪽에서
검은 차 행렬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2. 피고인의 입장 – 성벽 설계자가 계단을 오른다

정 회장이
차에서 내렸다.

구속영장 발부 이후
구치소에서 지냈지만,
오늘 그는
수의 대신
정장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피고인용 정장”이라 불리는 회색 재킷,
하지만
그의 걸음에는
여전히
십수 년 동안 성벽 위를 걸어온 사람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 도시를 지었다고 믿어 왔다.

통로를 깔고,
병원을 세우고,
요양원을 엮고,
군 납품과 재개발을 연결했다.

오늘
이 계단은—

내가 지은 도시의 마지막 층계일까,
아니면
내가 올라야 할 단두대의 계단일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 “정 회장님,
혐의 인정하십니까?”
– “내부 리스크 관리 문건,
직접 승인하셨습니까?”
– “도시의 장부 보도에 대해
하실 말씀 없습니까?”

정 회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기자들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그저
정면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법정 출입문 앞에서
잠시 멈춰선 그는
문짝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오늘 나는
성벽 위가 아니라,
성벽 한가운데에
박힌 돌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돌을 뽑아낼 수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되겠지.

문이 열렸다.

정 회장은
피고인석으로
걸어 들어갔다.


3. 공소장 낭독 – 장부가 법률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사건번호 ○○○○호,
피고인 정○○ 외 ○명에 대한
공소사실을 낭독하겠습니다.”

검사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법정 안은
숨소리조차
무겁게 들렸다.

  • 업무상 과실치사 및 중상해,

  • 아동·노인·장애인에 대한 구조적 학대 방조,

  •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권 침해 방조,

  • 의료·돌봄 인력 구조 고의 축소,

  • 내부 윤리 제보 조직적 은폐,

  • 증거 인멸 교사,

  • 정치·관료 네트워크를 통한 수사 방해 시도.

검사는
각 혐의 앞에
차근차근 날짜와 장소,
계열사 이름들을 붙여 나갔다.

“피고인 정○○는
○○요양원 야간 근무 인력 기준을
계획적으로 축소하는 대신—”

“해당 요양원이 속한
복지 펀드의 수익률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간 야간 사망·사고 발생 건수를
‘수용 가능한 리스크’로 명시한
내부 문건에
최종 승인 서명을 하였습니다.”

“또한
계열 병원 복도에서
응급 상황에 대응할 인원 부족을
알고 있었음에도—”

“성장성과 수익성을 강조한
경영 방침을 유지함으로써
다수 환자들의 생명 보호 의무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공청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리스크 관리 지침 초안”은
이제
형사 재판의
증거 목록 한 가운데에
올라와 있었다.

한 지우는
공소장 낭독을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기사와 공청회,
윤리 제보자,
내부 고발자들 손을 빌려
한 줄씩 끌어낸 문장들.

이제
그 문장들이
형법과 민법 조항 옆에
나란히 서 있다.

도시의 장부가
법률 언어로 번역되는 광경.

피고인석에서
정 회장은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공소장의 모든 문장을
다 받아들이는 듯한 얼굴도,
모두 부정하는 듯한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
내 이름은
‘경제인’도,
‘경영자’도,
‘사업가’도 아니다.

법이 적어 준
가장 원초적인 이름—

*‘피고인’. *


4. 증인들 – 증언대 위의 도시

증인석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올라왔다.

장민수.

이은희.

박진우.

그리고
촬영을 통해 연결된
네팔 청년의 동생.

그들의 말은
공청회 때보다
조금 더 절제되어 있었지만,
더 무거웠다.

왜냐하면
이제 그 말들은
단지 기록으로 남는 것을 넘어,
형량과 죄목을 가르는 칼날로 쓰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민수의 증언.

“변호인 측 질문에
답변하겠습니다.”

정 회장 측 변호사가 물었다.

“증인은
병원이나 회사 측에서
여러 차례
위로와 지원 의사를
밝힌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 시도조차
모두 악의적인 것으로
보십니까.”

장민수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위로는
말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은 건
‘리스크 관리’라는 말로
포장된 합의 제안이었습니다.”

“아이 이름이 없는
서류와 돈이었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그는
정 회장을 곧장 바라봤다.

“ ‘네 아이의 죽음을
우리 장부에서
수치상 처리하고 싶다’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재판부가
고개를 들었다.

판사의 눈빛은
질문하지 않았지만,
묻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이름을
이 법정에 올려놓고 있는가.

이은희의 증언.

검사가 물었다.

“증인은
야간 근무 중
사고·사망 건에 대해
상부에 여러 차례
보고했다고 진술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어떤 답을 받으셨습니까.”

이은희는
손을 모았다 폈다.

“대부분
‘알겠다, 검토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다른 곳도
다 이렇게 버틴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인원은
늘지 않았습니다.”

변호인이
반대신문에 나섰다.

“증인은
경제 구조나
인력 수급의 어려움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요양원이라는 곳이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현실도 있지 않습니까.”

이은희가
그를 바라봤다.

“…맞습니다.”

“저는
경제학을 모르고,
장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압니다.”

“어떤 밤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제 손이
두 개라는 사실 때문에,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그대로 숨이 멎었다는 것을요.”

“그게
‘현실적인 리스크’였다면—”

그녀가
법관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이 법정이
그 ‘현실’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저는
알고 싶습니다.”

법정 뒤편에서
누군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박진우의 증언 때,
재판부는
군 관련 문건 일부를
비공개로 열람했다.

  • 가혹행위 보고서,

  • 묵살된 진정서,

  • 특정 부대와 납품업체 사이의
    불투명한 계약.

박진우는
예비군 복장은 입지 않았다.

대신
단정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여긴
군법 회의가 아니라
민간 법정이니까요.”

그는
진술 전에
지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증인석에서
박진우가 말했다.

“제가 처음
‘전령’이라는 말을 들은 건
군 생활관이었습니다.”

“어떤 선임이
제 가슴을 발로 밟으면서
말했습니다.”

“ ‘나는
이 생활관의 전령이다.’ ”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위에서
숫자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피고인석 쪽을 흘깃 봤다.

“우리는
장부 속 작은 숫자였고,
그 숫자를
맞추는 방식 중 하나가
이런 폭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른 전령에게가 아니라—”

그는
판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 도시의 법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를
숫자와 ‘인력’으로만 보던 사람들을
오늘
‘피고인’으로 부른다는 것이—”

“이 도시에게
어떤 의미인지.”


5. 최후 변론 –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단두대

모든 증거 조사와 증인신문이 끝나고,
이제
최후 변론 차례가 되었다.

먼저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경하는 재판부,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시민 여러분.”

그는
잠시 법정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탐욕과 무책임을
심판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도시가
자기 구조를 어디까지 죄로 부를 수 있는지

시험하는 사건입니다.”

“피고인 정○○는
자신이 직접
환자를 방치하지도 않았고,
직접
노인을 밀쳐 넘어뜨리지도 않았으며,
직접
이주 노동자를 때리지도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검사의 시선이
정 회장을 스쳤다.

“피고인은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

“다른 이들의 손을
그 자리에
배치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배워 온 사람입니다.”

“인력표·수익표·리스크 지수로
구성된 장부 속에
사람들을 배열함으로써,
본인은
‘직접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그러면서도
결과를 통해
이익을 취해 왔습니다.”

검사는
내부 문건 한 장을 들었다.

“ ‘야간 사망·사고 발생 건수 –
연간 ○건 내 수용 가능.’ ”

“이 문장은
피고인이 최종 결재한
문건에서 나왔습니다.”

“이 문장을
우리 형법 언어로 번역하면—”

그는
천천히 말했다.

“ ‘나는
이 정도 사람은
죽어도 되는 구조
감수하겠다.’ 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문장을—”

“단순한 ‘경영 판단’으로
취급할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 살인의 한 형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검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재판부께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 법정이
단지
한 사람의 죄를 묻는 곳에서 끝나지 않고—”

“이 도시가
다시는
사람 이름을
리스크 항목 옆에
가볍게 적지 않도록 하는
첫 번째 선례가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이 판결문이—”

도시의 장부 한가운데
새로 끼워 넣는
첫 번째 붉은 페이지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 다음,
정 회장 측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언어는
검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존경하는 재판부.”

“검찰은
피고인 정○○를
이 도시의 모든 구조적 악을
상징하는 ‘얼굴’로 만들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사람의 얼굴에
모든 문제를 쏟아붓는 방식으로
과연
진정한 정의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는
경제 지표와 고용 수치를 들며 말했다.

“피고인이 이끄는 기업은
수만 명의 고용을 창출했고,
이 도시에
병원과 요양 시설,
인프라를 구축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불완전한 결정과
미비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책임을
한 사람에게
형사처벌이라는 방식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그는
방청석을 흘끗 봤다.

“또 다른 형태의
‘단두대 정의’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기의
광기를
역사에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사람들은
단두대 위에
‘상징적인 얼굴’을 올려놓고—”

“마치
그 한 사람의 목을 자르면
모든 부정과 부패가
사라질 것처럼
믿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피고인을
너무 무겁게 징벌하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구조의 문제를
한 사람에게 전가하고,
나머지 성벽을
그대로 둔 채
안심하는
또 다른 ‘장부 조작’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재판부께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책임은 묻되,
이 재판이
또 하나의
‘상징 처형’으로 기록되지 않도록
신중한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두 개의 언어.

  • “구조를 죄로 불러야 한다”는 언어와,

  • “한 사람에게 모든 구조를 떠넘기지 말라”는 언어.

법정은
이 두 언어 사이에
팽팽히 서 있었다.


6. 판사의 밤 – 법복 안쪽에서 쓰는 장부

선고일을 앞둔 밤.

주심 판사는
집무실 책상 위에
흰 종이 여러 장을 펼쳐 놓고 있었다.

  • 공소장,

  • 증거 목록,

  • 주요 증언 요약,

  • 양형 참고 판례.

그 사이에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끼워 있었다.

“장○○ – 피해자 유가족 진술서 일부 발췌”
“이은희 – 야간 근무 실태 관련 의견서”
“내부 윤리제보 담당자 의견”

판사는
법복을 걸어놓은 옷걸이를
잠시 바라봤다.

나는
숫자로 사람을 재단하는
장부를 미워해 왔다.

하지만
법복을 입은다는 건—

결국
또 다른 장부를 쓰는 일이기도 하다.

징역 몇 년,
벌금 얼마,
집행유예 여부…

이 모든 숫자 역시
어떤 사람에게는
칼날이 될 것이다.

그는
메모지에
조용히 한 문장을 적었다.

“이 사건 판결은
누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피해자에게는
부족할 것이고,
피고인 측에게는
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만족의 균형’마저
피고인의 이익을 위한 장부 논리로
사용되게 할 수는 없다.”

판사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프랑스 혁명기의 단두대를
교과서에서만 배웠다.

하지만
오늘
내 판결문이
누군가에게는
단두대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는
더 단단한 글씨로
두 번째 문장을 적었다.

“오늘 이 법정이
잘못된 구조까지 정당화하는 ‘장부’로 쓰이지 않도록.”

“최소한
이 판결문 안에서는—”

“사람의 생명이
수익보다 앞에 있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써 넣겠다.”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내일 아침,
재판정에서
그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는 일뿐이었다.


7. 선고 – 인간이 만든 단두대가 내려오는 순간

선고 공판일.

법정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빽빽했다.

피고인 정○○,
변호인단,
검사,
피해자 대표,
언론,
시민들.

그리고
방청석 한 구석,
보통 사람처럼 앉아 있는
한 남자.

검은 코트를 입었지만,
오늘은
아무도 그를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 시온.

재판장이 입장하고,
사람들이 일어섰다가
앉았다.

판사가 말했다.

“지금부터
피고인 정○○ 등에 대한
선고를 하겠습니다.”

법정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먼저
피고인 정○○의
유죄·무죄 판단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피고인 측은
구조의 복잡성과
본인의 직접적 관여 부재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에 제출된 수많은 내부 문건과
피고인 본인의 보고·결재 기록,
그리고 증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판사의 시선이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피고인이
구조를 설계하고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수익과 성장률을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앞에 두어 왔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는
업무상 과실의 수준을 넘어—”

그는
조금 단어를 골랐다.

“사람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비용 항목처럼 취급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업무상 과실치사 및 중상해,
구조적 학대 방조,
인권 침해 방조 등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합니다.”

법정 어딘가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났다.

판사는
손을 들어
잠시 정숙을 요청한 뒤
말을 이었다.

“다만
일부 혐의,
특히
특정 개별 사건에 대한
직접 지시 여부와 관련해서는—”

“증거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에
이르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무죄로 판단합니다.”

방청석의 공기가
한 번 요동쳤다.

– “또 무죄야?”
– “결국
다 잡은 것 같다가도
빠져나가는구만…”
– “그래도
주요 혐의는 유죄라잖아.”

판사는
양형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
요양원에서 마지막 밤을
누구의 손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보낸 노인들,
재개발 구역과 군대와 공장에서
숫자처럼 쓰이다 사라진 이름들.”

“이들에게
어떤 형량도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 재판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
피고인의 측은
피고인이 오랜 기간
이 도시의 인프라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는 점,
수많은 고용을 창출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역시
일부 사실입니다.”

“그러나—”

판사의 눈빛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어떤 기여도
사람의 생명을
장부 속 리스크 항목으로
격하시키는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도시가
앞으로도
자본과 인프라,
구조를 필요로 한다 해도—”

“그 구조 위에 쌓인
사람 이름들의 무게를
잊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선고문 마지막 장을 들었다.

“피고인 정○○에 대해—”

법정 안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징역
25년을 선고합니다.”

“또한
피고인이 지배하는
주요 복지·의료·돌봄 계열 법인에 대해
국가의 강제 관리 및
독립 인권감독기구의 상시 감시를
부과합니다.”

“본 판결은
피고인의 개인적 책임을 넘어서—”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이 도시가
다시는
사람의 생명을
숫자로 감가상각하지 않겠다는
첫 번째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상입니다.”

법정이
웅성거렸다.

  • “25년…”

  • “생각보다 세다.”

  • “그래도
    죽은 사람들 생각하면
    모자라지.”

  • “그래도
    드디어
    한 번은
    위에서부터
    죄를 물었네…”

피고인석에서
정 회장은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예상보다
담담해 보였다.

나는
이 도시에서
‘영구 집행유예’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이 도시의 칼이
최소한
한 번은
제 방향을 찾은 셈이겠지.

그의 시선이
순간
방청석 한 구석에 멈췄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 회장은
그 눈빛을
알아봤다.

전령.

시온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한 줄짜리 대화가
오갔다.

– 인간의 단두대는,
여기까지구나.

– 네 칼은,
아직일 수도 있고
이걸로 끝일 수도 있다.


8. 단두대 아래에서 – 판결을 보는 사람들

선고가 끝난 뒤,
법정 복도는
복잡한 감정들로
뒤섞였다.

장민수는
벽에 기대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한 지우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버님…”

장민수가
먼저 말했다.

“…25년이라.”

“제 아이가
살아 있었으면—”

그는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지금쯤
고등학생쯤 됐겠죠.”

“그 아이가
25살이 되었을 때—”

“오늘 선고를
어떻게 들었을지
상상해 봤습니다.”

지우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장민수가
조심스레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속이
다 후련하진 않습니다.”

“판결문이
제 아이 손을
잡아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복도 끝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다른 피해자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서 있었다.

“적어도
이 도시에
이런 문장이 생겼다는 건—”

“ ‘사람의 생명은
리스크가 아니라
책임이다.’ ”

“그 문장이
오늘
처음으로
법원의 이름으로
읽혔다는 건—”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자체로
아이에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은희는
계단 한쪽에 앉아 있었다.

동료 간병인이
옆에서 물었다.

“언니…
이제
뭐가 달라질까?”

이은희가
천천히 말했다.

“당장
내일 밤 근무 인원이
늘어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보고 겪은 밤들이—”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도시 어디선가
판결문이라는 이름으로
보관되겠지.

“그게
생각보다
큰 일일지도 몰라.”

윤 서연은
계단 위에서
녹음기를 끄고
노트를 덮었다.

편집국에서
어떤 제목을 달지
이미 전화가 오고 있었다.

– “ ‘징역 25년’이냐,
‘역대 최고 양형’이냐,
‘그래도 부족한 정의’냐.”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판결은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게
이 도시의 첫 번째
솔직한 표정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노트 상단에 이렇게 적었다.

“단두대는
사람의 목을 잘라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이 판결문은—”

“적어도
이 도시의 장부 한쪽에
처음으로
사람 이름들을
‘수익’ 대신
‘책임’ 옆에 적어 넣었다.”


9. 전령의 장부 – 인간의 칼날과 전령의 칼날 사이

그날 밤.

도시 외곽의 작은 언덕 위,
낡은 공원 벤치.

한 시온이
장부를 펼쳐 들었다.

정○○ 이름이 적힌 페이지.

그 아래에는
새로운 줄이 적혀 있었다.

“인간 법정 판결 –
징역 25년,
주요 계열사 강제 관리 및
인권감독 상시화.”

“인간의 단두대 –
최초로
구조 설계자에게
제대로 내려감.”

그는
펜을 들고
잠시 멈췄다.

그 아래에는
아직
빈 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전령의 칼 개입 여부 –
( ).”

시온은
눈을 감았다.

정 회장이
법정에서
판결을 듣던 순간의 얼굴이
떠올랐다.

완전히 무너진 얼굴도 아니었고,
완전히 뻔뻔한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가 쌓아 올린 성벽이
자기 쪽으로
무너지는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의 얼굴.

시온은
빈칸에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전령의 칼 –
잠정 보류.

“이유 –
인간의 법이
오래 미루어 온 칼날을
처음으로
제대로 휘둘렀기 때문.”

“추가 심판 여부 –
피고인이
감옥 안과 밖에서
자기 장부를
어디까지 다시 쓰는지
후일 관찰 후 결정.”

장부를 덮으려다
시온은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아직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다른 이들에 대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 “정○○의 뒤를 이어
    구조를 유지·확장하려는 자들.”

  • “새로운 모양으로
    사람을 숫자로 바꾸려는 기관들.”

  •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기 장부를 바꾸려 하는 이들과,
    더 교묘하게 숨기려 하는 이들.”

시온은
작게 웃었다.

“오늘
인간의 단두대가 내려갔다고 해서—”

“내 일이
끝난 것은 아니군요.”

그는
펜을 들어
맨 마지막 페이지 상단에
새 제목을 적었다.

“21장 –
감옥 안에서 다시 쓰이는 장부,
감옥 밖에서 다시 쌓이는 성벽.”

바람이
장부를 흔들었다.

도시는
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법원 판결문 전문이
복사·배포되고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정 그룹 계열사 간부들이
새로운 이사회 구성을
두고 싸웠으며,

어떤 곳에서는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한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오늘
이 도시에서는—

전령의 칼이 아니라,
인간의 칼이 먼저 내려갔다.

그리고
그 칼날의 그림자 위에서
전령은
자기 칼을
잠시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장부 마지막 줄에는
이 문장이
작게 적혀 있었다.

“심판은
끝이 아니라,
다음 심판을 향한
기억의 시작이다.”

전령은
장부를 덮고 일어섰다.

도시의 불빛이
멀리서 출렁거렸다.

새로운 장부와 새로운 성벽이
어딘가에서
이미 조용히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다 무너질 때까지,
아니—
무너질 때마다,
그는
다시 장부를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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