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17장 – 반격하는 손, 새로 적히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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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 반격하는 손, 새로 적히는 이름
1. 위기관리 회의, “우리는 악당이 아니다”라는 대본
정○○ 회장실 바로 옆,
‘전략기획실’이라 적힌 회의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문 위에
다른 이름을 붙여도 될 것 같았다.
“위기관리 상황실.”
긴 테이블 양쪽에
법무팀장, 홍보실장, 인사담당임원,
외부 로펌 파트너 변호사 둘,
언론 대응을 총괄하는 컨설턴트 하나가
줄지어 앉아 있었다.
벽면 스크린에는
어제부터 쏟아진 기사와 댓글,
SNS 트렌드 키워드가
실시간으로 떠 있었다.
-
“#도시의장부”
-
“#정○○”
-
“#구조의얼굴”
-
“#전령보다_장부”
홍보실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회장님,
여론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서고 있습니다.”
“지금까진
정치인, 병원장, 원장에게
분노가 쏠렸다면—”
“이제는
‘도시의 구조를 설계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으로
회장님 이름이
묶이고 있습니다.”
외부 로펌 파트너 변호사가
손을 들었다.
“법적 측면에서 보자면,
당장 형사 책임으로
들어올 만한 건
아직 제한적입니다.”
“등기부, 공시자료,
정치자금 공개 내역을 조합해
‘구조적 연결’을 그려낸 것뿐이라면—”
“우리는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습니다.”
법무팀장이 끼어들었다.
“명예훼손 소송,
강하게 검토 중입니다.”
“ ‘악의적 편집’,
‘의도적 인과관계 왜곡’
이런 키워드로
언론사와 기자 개인을
동시에 압박하는 방향으로—”
말을 잇는 순간,
정 회장이 손을 들었다.
“언론사를 상대로
정면전부터 벌이지는 맙시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단했다.
“이 정도 준비를 해 온 기획이라면
소송도
그들이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해 놓았을 겁니다.”
“우리가 먼저 고소장을 내면—”
그는
스크린에 떠 있는 키워드들을
한 번 훑어봤다.
“그 자체가
또 다른 기사 제목이 되겠죠.”
“ ‘정○○,
구조 폭로 기사에 법적 대응’.”
“우리가 원하는 그림은
그런 게 아닙니다.”
홍보 컨설턴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섰다.
“맞습니다, 회장님.”
“지금 필요한 건
‘우리는 악당이 아니다’라는 서사입니다.”
“사람들을
다시 ‘좋은 자본’ vs ‘나쁜 자본’ 구도로
돌려놓는 것.”
“우리는
‘도시 인프라를 떠받쳐 온 책임 있는 자본’이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강화해야 합니다.”
인사담당 임원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CSR,
사회공헌 쪽에서
당장 꺼낼 수 있는 카드 몇 개 있습니다.”
“장학재단,
어린이 병동 후원,
재난 구호 기부…”
정 회장이
잠시 웃었다.
“필요하긴 하겠지.”
“다만
사람들이 이제
장학금 액수보다
구조를 보려고 하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로펌 파트너가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였다.
“그래서
두 축으로 가야 합니다.”
“첫째,
법적 대응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실 관계 일부 오해’만 조정하는 전략.”
“둘째,
여론 프레임을
‘자본 공격 vs 도시 경쟁력’ 구도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이 도시 인프라·주거·의료·돌봄에
기여해 온 부분을
강조하면서—”
“ ‘성공한 기업에 대한
과도한 마녀사냥은
결국
도시 경쟁력을 해친다’는 메시지.”
홍보실장이
빠르게 메모했다.
“협조적인 언론사와
몇몇 칼럼니스트에게
‘과열된 구조 비판,
자본 마녀사냥의 위험’ 같은
기고를 부탁하겠습니다.”
“또한
노 회장님과 가까웠던 일부 정치인 쪽과도
접촉해—”
“ ‘자본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국회 토론회를
추진해 보겠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수십 년 간
이 회사는
위기 때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버텨 왔다.
-
법적 대응 시사,
-
사회공헌 홍보,
-
프레임 전환,
-
내부 입막음.
한 번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정 회장은
모두의 말을 듣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준비해야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내부에서 새 나가는 입들을
조용히 정리해야 합니다.”
인사담당 임원이
조금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부 감사팀을
투입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보다는—”
정 회장이
천천히 말했다.
“ ‘윤리 신고’라는 이름으로
진짜 윤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이번에는
회사를 배신하고 있는지도
봐야겠지요.”
“장부를 외부로 들고 나가는 손이
누군지부터
찾아봅시다.”
그 말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몹시 간단했다.
네가
누구든,
우리는
널 찾을 것이다.
회의실 창밖으로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는
아직
이 회의실 안에서
어떤 문장이 오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이 회의 내용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장부에
조용히 적힐 예정이었다.
2. 언론의 반격, 그리고 되돌아오는 파도
이틀 뒤.
아침 포털 메인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기사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도시의 장부〉 10편 예고 기사.
“이민 노동자와 비정규 돌봄 노동자,
구조의 최하단에서 사라진 이름들.”
다른 하나는
정 계열 보수 성향 언론의 칼럼.
“‘구조’라는 이름으로
자본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칼럼에는
익숙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한 도시의 재개발과 인프라 구축에는
필연적으로
이해관계 충돌과 갈등이 뒤따른다.”
“그러나
자본의 모든 결정에
‘악의’를 부여하고,
그들을 ‘구조의 악당’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결국
그 도시의 경쟁력을
무너뜨리는 길일 뿐이다.”
칼럼 말미에는
정 회장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성공한 기업가들”,
“자본 전체”,
“도시 경쟁력”이란 말로
모든 것이 묶여 있었다.
SNS에는
칼럼 링크와 함께
분노와 냉소가 뒤섞인 댓글들이 올라왔다.
– “자본 마녀사냥이라네 ㅋㅋ
피해자는 누군데?”
– “도시 경쟁력 얘기 나오면
보통 누가 돈 버는지
이미 다 아는데.”
– “기사 8·9편 읽고 이 칼럼 읽어보면
누가 누구 편인지 딱 보인다.”
한편,
〈도시의 장부〉 팀은
칼럼 내용을
예상하고 있었다.
서연은
편집국 한구석에서
노트를 들여다봤다.
‘자본을 악마화하지 말라.’
*이 문장 뒤에
늘 숨어 있는 건
**‘그래도 지금처럼 놔두자’*라는 말이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한 지우가
프린트를 들고 다가왔다.
“새 메일이 왔습니다.”
“제목은
‘그날, 이름도 없이 죽은 사람 이야기’.”
3. 봉투 속 USB – 이주 노동자의 죽음, 숫자로 처리된 하루
봉투는
투명하지 않은 회색이었다.
손글씨로
서툴게 적힌 문장.
“변호사님,
기자님께
꼭 전달해 주세요.”
안에는
편지 한 장과
작은 USB 하나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글씨는
맞춤법도, 문장도
어색하고 들쭉날쭉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건설 하청에서
일했던
○○현장 반장이었습니다.”
“몇 년 전
재개발 구역에서
일하던 중,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추락사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을
저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네팔 애’라고만 불렀습니다.”
“사고가 나고 나서
회사에서는
‘유가족과 합의했다’고 했고,
저한테는
‘현장 안전수칙 교육 강화’ 서류에
이름을 쓰라고 했습니다.”
“사고 보고서에는
‘작업 중 부주의에 따른 사고’라고만 쓰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날
안전장비가 부족했고,
인원도 부족해서
원래 둘이 해야 할 일을
혼자 하고 있었다는 걸요.”
“그 현장은
정○○ 회장 계열 건설사가
맡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역은
원래 계획보다
공기가 많이 늦어져 있었고,
위에서는
매일같이
‘공기 단축’ 압박을 했습니다.”
편지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USB 안에는
그때 제가 몰래 복사해 놓은
사고 보고 파일과
공기 단축 관련 지시 메일,
그리고
산재 처리 대신
‘특별 위로금’이라는 이름으로
현금이 오간 자료 일부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알린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 이름이
적어도
어딘가에는
제대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제가 그나마 정확히 적어본
그 사람 이름과 나이입니다.”
편지 마지막에는
낯선 모음과 자음이 섞인 이름 하나,
그리고 숫자
“27”이라는 나이가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윤 서연은
편지를 한참 동안
그대로 쥐고 있었다.
병원에서 죽은 아이,
요양원에서 말라가던 노인,
군 생활관에서 숨 막히던 병사.
그리고 지금—
이 도시의 어딘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이름도 없이 죽어간
스물일곱 살의 이주 노동자.
한 지우가
USB를 꽂았다.
화면에는
단정한 폴더 구조와
날짜별 정리된 파일들이 떠올랐다.
“이 사람,
그냥 ‘반장’은 아니네요.”
그가 말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정리해 둔 겁니다.”
“누구보다도
제대로 된 ‘사무원’이네요.”
보고서 파일을 열자
몇 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망자 – ○○○(외국인 근로자, 네팔 국적 추정).”
“사망 시간 – 14:38경 (정확 시간 미확인).”
“사고 경위 – 고층 외벽 작업 중 추락.”
“원인 – 작업자 부주의(안전고리 미체결).”
그 아래
빨간 글씨로
누군가 덧붙인 코멘트가 있었다.
– “공기 지연 심각.
안전장비 전원 지급 어려움.
인력 충원 불가 상황 고려 필요.”
또 다른 파일에는
이메일이 복사되어 있었다.
– “본 건은 산재 처리가 아닌
‘특별 위로금’ 조정 방향으로 진행 바람.”
– “외국인 노동자 특성상
장기적 이슈화 가능성 낮음.”
– “현장 사진 및 내부 보고는
별도 보안 폴더로 이동.”
한 지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법적으로
이걸
어디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검토해 봐야 합니다.”
“하청, 재하청 구조,
고용 형태,
산재 미신고…
복잡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이름 하나만큼은—”
그는
편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기사와 소장에서
제대로 불러 줄 수 있습니다.”
윤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도시의 장부 10편〉의 첫 문장,
이 이름으로 시작합시다.”
“이 도시에서
한 번도
제대로 불리지 못했던 이름으로.”
4. 내부 입막음 – 윤리 규정이라는 이름의 족쇄
같은 시각,
정 그룹 본사 인사팀.
모든 직원에게
비슷한 형식의 메일이 일제히 발송되었다.
“[전사 공지]
최근 대외 이슈 관련
임직원 윤리 규정 재확인 안내”
메일 내용은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했다.
“최근 당사와 관련한
다양한 보도와 온라인 게시물로 인해
임직원 여러분께서
혼란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 회사의
기본적인 윤리 규정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드립니다.”
-
“대외 인터뷰 및 SNS 활동 시
회사 관련 언급 자제.” -
“내부 자료의 무단 반출·유출 시
관련 법규 및 인사 규정에 따른
엄정 조치.” -
“허위 사실 유포,
회사 명예 훼손 행위 금지.”
마지막 줄.
“우리 모두는
회사를 지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벽입니다.”
인사팀 과장 최수진은
이 공지를
직접 작성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도
오랫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리 규정이라…
우리가 지금
지키려는 게
정말 ‘윤리’가 맞나.
책상 위 한쪽에는
두 개의 파일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경영진이 내려보낸
“내부 제보자 색출 관련
특별 TF 구성안”.
다른 하나는
익명 제보함을 통해 올라온
“요양원 야간 근무 중
인력 부족으로 인한 사고” 신고서.
그 신고서 마지막에는
조심스러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저는
이름을 밝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사고가 아니라
예고된 죽음입니다.”
“야간에
간병인 한 명이
30명의 노인을 맡고 있습니다.”
“이 중 누가 넘어지고,
누가 숨이 막힐지—”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사팀장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최 과장,
TF 명단 정리됐어요?”
“네, 부장님.”
최수진은
얼굴을 가다듬고 나갔다.
회의실에는
법무팀, 감사팀, 인사팀 일부가
이미 모여 있었다.
인사팀장이 말했다.
“최근
외부에 나간 자료들 중
일부는
내부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회사의 미래입니다.”
“윤리 신고 제도는
회사를 바로잡으라고 만든 것이지,
회사를 무너뜨리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최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윤리 신고 제도…
그 제도 덕분에
내가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
꿈꿨던 ‘정의’라는 단어를
한 번쯤 믿어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제도가
사람들 입을 막는 끈으로
쓰이고 있다.
회의 말미에
인사팀장은
그녀를 따로 불렀다.
“최 과장.”
“네, 부장님.”
“당신이
신고 제도 담당 오래 했으니까—”
“이번에도
사람들이
괜한 불만으로
바깥으로 새 나가지 않게
잘 단속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정말
심각한 내용이
제보된다면요.”
“예를 들어
요양원에서
반복되는 사고라든지,
인력 부족으로 인한
위험 상황 같은 거요.”
인사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건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거예요.”
“알겠죠?”
최수진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날 밤,
그녀의 손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5. 간병인의 밤 –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도심 변두리의
한 요양원.
밤 근무조에 서 있는
비정규직 간병인 이은희는
시곗바늘을 보고 있었다.
밤 2시 40분.
복도에는
형광등 빛이 희미하게 번졌고,
각 병실에서는
산소기 소리,
거친 숨소리,
가끔 침대 난간을 두드리는 소리들이
섞여 들려왔다.
“오늘도
우리 둘이
60명이네.”
같이 근무 서는 동료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야간에는
최소 셋이 서야
사람답게 돌아가는데…”
이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늘 똑같죠.”
“ ‘예산이 없다’,
‘인력 구하기 힘들다’…”
동료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산이 없으면
사람을 줄이지,
일을 줄이진 않더라.”
2층 끝 병실에서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은희가 뛰어갔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뻗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이은희는
산소 포화도를 확인하고,
의사를 호출했다.
그러나
야간 당직 의사는
다른 층에서
응급 상황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인터폰 너머로
짧은 대화가 오갔다.
– “조금만
버티게 해 주세요.
금방 올라갈게요.”
이은희는
할머니 손을 잡았다.
“조금만
버티세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그러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다른 숫자를 세고 있었다.
2층 30명,
3층 30명.
야간 간병인 둘,
간호사 한 명.
언제
누구 하나가
조용히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은 구조.
우리는
그걸
알고 일한다.
근무가 끝난 뒤,
이은희는
휴게실 구석에서
핸드폰을 켰다.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했던 웹사이트.
〈도시의 장부〉.
그 중
요양원 편 기사에는
자신이 일하는 시설과
비슷한 구조의 기관이
여럿 나오고 있었다.
내가 적은 보고서도,
언젠가
저기 어디
자료로 들어가 있을까.
‘야간 인력 부족으로 인한
사고 위험’이라는 문장으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익명 제보 버튼을 눌렀다.
“저는
○○요양원 야간 근무
비정규직 간병인입니다.”
“우리 시설의
야간 인력 구조와
최근 발생했던
사고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다만—”
“제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
저는
바로
일자리를 잃을 겁니다.”
“그래도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하기로 했습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어딘가의 장부에
작은 점 하나가 찍혔다.
-
“이은희 –
이름을 숨긴 채
목소리를 낸 사람.”
6. 선택의 밤 – 최수진, 두 개의 장부 사이에 서다
그날 밤 늦게,
정 그룹 인사팀 사무실.
모든 불이 꺼진 줄 알았던 층에
하나의 불빛만 남아 있었다.
최수진의 자리였다.
그녀는
책상 위에
두 개의 폴더를 올려두고 있었다.
하나는
“내부 제보자 색출 TF
중간 보고서 초안.”
다른 하나는
“요양원·병원 관련
내부 제보 정리본(비공식)”이라는
자신만 읽을 수 있는 제목의 파일.
그녀는
한동안
그 두 파일을
번갈아 열어보았다.
TF 보고서 초안에는
이런 문장이 돌아다녔다.
“정책 비판적 성향 강한 직원 A –
주의 관찰 필요.”
“외부 단체 활동 이력 있는 직원 B –
자료 유출 가능성 검토.”
다른 파일에는
완전히 다른 문장들이
조용히 쌓여 있었다.
“○○요양원 –
야간 간병인 1인당 환자 수 25~30명.”
“야간 낙상 사고,
숨 막힘 사고
반복 발생 보고.”
“내부 건의 시
‘예산·인력 문제’로
수개월째 미조치.”
그녀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대체
뭘 위해
이 일을 시작했더라.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윤리 경영,
공정 인사,
내부 제보 보호 시스템 같은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 “우리 회사는
잘못된 걸 보고도
침묵하지 않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입사 교육 때 본
슬로건 광고 영상 속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그 슬로건이
가장 먼저 지워야 할 문장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컴퓨터 알림창이 떴다.
“[새 메일 도착]
발신자:
unknown@×××”
제목은
간단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장부,
우리도 보고 있습니다.’
최수진은
숨을 멈추고
메일을 열었다.
안에는
문장 한 줄과
링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도시의 장부〉 8·9편을
끝까지 읽어 보셨나요.”
“당신이 정리한 데이터 중 일부가
이미
세상 밖으로 나갔습니다.”
링크를 열자
자신이 몇 년 전 정리했던
요양원·병원 인력 구조 표와
비슷한 도표가
기사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쓴 숫자야.
행과 열의 순서,
표기법,
주석 다는 습관까지—
분명히
내가 만들었던 양식이야.
눈앞이
살짝 어두워졌다.
누가,
언제,
어디서
그 표를 가져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메일 답장을 쓰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새 탭을 열고
다른 주소를 입력했다.
〈도시의 장부〉 익명 제보 페이지.
오랫동안
커서를 깜빡이다가
한 줄을 썼다.
“저는
정 그룹 인사팀에서
윤리 신고 제도를 담당해 온
직원입니다.”
“몇 년 동안
보고도
처리되지 않았던
여러 요양원·병원 내부 제보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제 자료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그녀는
잠시 멈췄다.
“이 선택이
제 인생과
가족을
어떻게 바꿀지
두렵습니다.”
“그래도
이 장부가
회사 금고 안에만 갇혀 있지 않기를
바란다면—”
“누군가는
금고를 열어야겠지요.”
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그때,
사무실 천장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당신이
열었군요.”
최수진은
눈을 번쩍 떴다.
사무실 문가에
누군가 기대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어두운 눈빛,
손에는
낡은 장부 한 권.
한 시온.
그녀는
숨이 막힐 듯했다.
“당신…
누구죠.”
시온이
가볍게 책을 들어 보였다.
“당신이
오래 정리해 온 장부,
나도 하나 갖고 있습니다.”
“다만
내 장부에는
숫자 대신
이름이 쓰여 있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회사를
무너뜨리러 온 겁니까.”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회사를 무너뜨리는 건
항상
인간들의 몫입니다.”
“나는
그 과정을
옆에서 기록할 뿐.”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오늘
당신이 한 선택,
내가 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 손가락이
스스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죠.”
“나는
그 순간을
옆에서 본 것뿐입니다.”
최수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배신자인가요.”
“내가
지금
배신한 건
회사인가요,
아니면—”
시온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처음 입사할 때
믿었던 문장들.”
“윤리,
정의,
내부 제보자 보호.”
“그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오래 전
광고 문구가 되었지만—”
“당신에게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던 것 같군요.”
그는
장부를 펼쳤다.
거기에는
새로운 이름이
막 적히고 있었다.
“최수진 –
두 장부 사이에서
흔들리다,
금고를 연 사람.”
“혐의 –
회사에 대한 배신,
그러나—”
그 옆에
또 다른 줄이 덧붙었다.
“감경 사유 –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
최수진이
눈을 감았다 뜨며 물었다.
“…그럼
저도
심판 받나요.”
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이름은
언젠가
심판을 받습니다.”
“다만
그 심판이
꼭
처벌의 형태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당신이 한 선택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면—”
그는
장부를 덮었다.
“심판은
이미
조금
당신 편으로 기울었겠죠.”
눈을 떴을 때,
사무실에는
다시
그녀 혼자였다.
컴퓨터 화면에는
방금 전 보낸 제보 메일의
발신 완료 표시만
고요히 남아 있었다.
7. 분노의 깊이 – 아직 모자라지만, 달라진 것들
며칠 뒤.
〈도시의 장부〉 10편이
세상에 나왔다.
제목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름 없이 떨어진 사람,
밤새 30명을 돌보는 사람 –
구조의 최하단에서 사라진 이름들.”
네팔 출신 이주 노동자의 사진 한 장.
그러나 얼굴은
가족 보호를 위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대신
그의 이름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 27세.”
그리고
요양원 야간 근무 간병인의 인터뷰.
– “우리는
사고를 막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사고가 났을 때
‘그래도 누군가 옆에 있었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게 하려고
버팁니다.”
기사 말미에는
작게 이런 문장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이 글이
특정 개인을
새로운 악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구조를 설계한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자기 이름으로
이 이야기들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기록하고자 한다.”
댓글 창에는
분노와 침묵,
그리고 느린 이해가
뒤섞여 올라왔다.
– “이제야
내 분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네요.”
– “전령이니 뭐니
괴담만 욕했는데,
진짜 무서운 건
이런 숫자였구나.”
– “정○○,
이름 외우겠습니다.”
– “병원 욕만 했는데,
병원 위에 또 다른 구조가 있는 줄
이제 알았어요.”
정 그룹은
즉각 입장문을 냈다.
“당사는
이 도시의 발전과 인프라 구축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습니다.”
“일부 사업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겸허히 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당사를
‘구조적 악의 중심’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악의적인 왜곡 및 허위 사실에 대해서는
법적 대응을
검토 중입니다.”
그 입장문은
뉴스로도,
SNS 캡처 이미지로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달랐다.
– “옛날 같으면
저 입장문에
넘어갔을지도.”
– “이제는
장부를 한 번 보고
입장문을 읽게 됐네요.”
– “법적 대응 한다고?
그 소식 자체가
또 기사거리일 듯.”
– “예전처럼
쉽게 묻히진 않을 거다.”
도시의 분노는
여전히
불완전했고,
여전히
쉽게 다른 곳으로 튀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구조의 얼굴을
집단적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것.
8. 옥상에서 본 것 – 아직은 칼을 거두어 둘 이유
어느 밤,
도시 한 복판 옥상.
한 시온은
난간에 기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빛들 사이로
뉴스 속 자막이
건물 유리창에 비쳐 흔들렸다.
-
“정○○ 측,
‘악의적 구조 비판’ 강력 반발.” -
“이주 노동자 추락사,
뒤늦게 가족 접촉 확인.” -
“요양원 야간 인력 기준 재검토 움직임.”
시온은
장부를 펼쳤다.
정 회장 페이지 한켠에는
새로운 줄들이 들어가 있었다.
“정○○ –
위기관리 회의를 통해
여론전·법적 대응 준비.”
“그러나
동시에
구조의 최하단 피해자들 이야기가
처음으로
도시 전체에 알려지게 되는 계기를
간접적으로 제공.”
그는
작게 웃었다.
“심판은
때로
자기 발등을 찍는
반격의 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다른 페이지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네팔 출신, 27세) –
재개발 현장에서
이름 없이 죽은 사람,
이제야
기록된 자.”
“이은희 –
야간에 30명을 돌보는 비정규 간병인,
이름을 숨긴 채
목소리를 낸 자.”
“최수진 –
내부 제보 금고를 열고
장부를 바깥으로 보낸 자.”
그 옆에는
공통된 문장이 붙어 있었다.
“이들의 선택과 존재로 인해
도시의 장부는
한층 더
촘촘해짐.”
시온은
붉은 펜을 들었다.
“정○○ –
최종 심판,
추가 관찰.”
“이유 –
인간들의 장부와 분노가
아직
완전히 모이지 않았음.”
“그러나
그 방향은
이전보다
훨씬 명확해짐.”
그는
도시 아래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전령이 나타나
악인을 없애 주길’
바랐다.”
“지금은—”
멀리서
집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우리 스스로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분노의 깊이는
아직 모자라지만,
적어도
칼을 어디로 겨눠야 하는지는
조금씩 알고 있다는 거지.”
그는
잠시
자신의 장부를 내려다봤다.
이 책이
언젠가
정말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기 장부를 들고
서로를 심판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러나
그날은
아직 멀었다.
그래서
한 시온은
장부를 덮지 않았다.
대신
빈 페이지 하나를 펼쳐
맨 위에
새 제목을 적었다.
“18장 –
성벽에 올라오는 사람들.”
그 아래
작게 메모를 남겼다.
“곧
이 도시 사람들 중
일부는
직접
성벽 위에 올라 설 것이다.”
“피해자,
기자,
변호사,
내부 고발자,
그리고—”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한 전령까지.”
바람이
장부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겼다.
도시는
또 한 번
밤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밤은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어딘가 골목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조금은 제대로 부르기 시작했고,
어딘가 창문 뒤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장부를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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