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12장 – 성벽 안에서 서로를 미는 자들
12장 – 성벽 안에서 서로를 미는 자들
1. 진술조서 위에 묻어나는 값
지방경찰청 강력계 조사실.
형광등은 희미한 기름막을 씌운 것처럼 탁했고,
벽에는 오래된 공고문들이 누렇게 뜬 채 붙어 있었다.
철제 책상 앞,
후드티를 벗겨 놓은 청년 셋이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눈 밑은 퀭했고,
손목에는 여전히
플라스틱 수갑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형사가 진술조서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자,
한 번만 더
순서대로 정리해 봅시다.”
“누가,
언제,
어디서
이 ‘일’을
제안했습니까.”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청년이
입술을 씹었다.
“…말했잖아요.
그냥
온라인 카페에서…”
형사가 한숨을 쉬었다.
“‘애국 시민 모임’ 카페에서
처음 연락 온 건 맞지.”
“문제는
그 뒤야.”
그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여기 보면
그 카페 운영진 중 한 명이
당신들 만나기 전에
통화한 번호가 있어요.”
형사는
프린트된 통화 내역을 탁탁 쳤다.
“그 번호,
○○당 지역 조직국 부국장 번호야.”
청년들의 눈이
동시에 흔들렸다.
“…모릅니다.”
가장 어린 청년이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형사가 말을 잘랐다.
“그래,
시키는 대로 했겠지.”
“스프레이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오고,
봉투 던지라고 해서 던지고,
영상 찍으라고 해서 찍고.”
그는
책상 위에 놓인 갈색 봉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봉투 위에는
빨간 잉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의 이름도
이미 여기 있다,
정치인.”
형사는
봉투를 살짝 흔들었다.
“글씨체,
세 명 중 누구 거야.”
청년 하나가
곧장 손을 들었다.
“…제 겁니다.”
“시킨 사람이
글귀까지
적어 줬으니까요.”
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 부분이
중요하다.”
그가 말했다.
“누가
어떤 문장을
써서 보내라고 했는지.”
프린트된 캡처를 탁 내밀었다.
메신저 대화창.
– “메시지는
이대로 적어 주세요.”
– “ ‘너의 이름도 이미 여기 있다, 정치인.’ ”
– “전령이 분노했다는 식으로.”
– “맞춤법 안 틀리게요 ^^”
대화 상대 이름은
실명 계정이었다.
“○○○ 보좌관.”
형사가
이름을 또렷이 읽었다.
“의원님
지역구 사무소
소속이지.”
조사실 공기가
눈에 보일 듯 무거워졌다.
청년들은
서로의 얼굴을 훔쳐봤다.
보좌관?
의원 이름 뒤에 붙던 그 단어?
우리는
그냥
‘시민 행동’
알바인 줄 알았는데.
형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일을 하면
뭐가
어떻게
좋다고 했는지.”
가장 나이가 많은 청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정치인들도
전령 괴담 때문에
힘들다고 했어요.”
“그래서
‘진짜 전령이 아니라
미친 팬들이 문제’라는 걸
보여 줘야 한다고…”
“우리가
약간
세게 나가 주면,
의원님이
그걸
잘 이용해서
‘괴담에도 굴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서게 될 거라고…”
형사가
목젖을 한번 움직였다.
“그 대가로
얼마 받기로 했습니까.”
세 청년의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인당
오백.”
조사실 안
벽시계 초침 소리가
때 아닌 곳에서
도드라져 들렸다.
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는
펜을 들어
조서에 덧붙였다.
“피의자 1, 2, 3,
각자 인당
50만 원 대가 약속 진술.”
“지시자는
○○○ 보좌관.
상위 지시자는
현재까지
‘모른다’ 진술.”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이건
그냥
개인적인 질문인데.”
형사가
청년들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전령 믿냐.”
가장 어린 청년이
입술을 축였다.
“…전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계속 듣다 보니까…”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전령이
진짜로 있든 없든,
우릴 이용한 사람들은
확실히 있구나
싶었습니다.”
형사는
대답 대신
잠깐 웃었다.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래.”
“그 말은
맞다.”
“괴담보다
더 오래가는 건
그 괴담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니까.”
2. 당사(黨舍)의 밤, 성벽 안의 균열
여당 중앙당사
비공개 긴급회의.
두꺼운 커튼이 쳐진 회의실 안,
길게 놓인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 커피와
노란 형광펜 자국이 가득한 자료철들이
얽힌 장부처럼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당 대표가
이마를 문질렀다.
“정리해 보죠.”
그가 말했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정책위 부위원장이
서류를 넘겼다.
“의원 지역구 사무실 앞
‘전령 팬’ 위장 협박 사건.”
“가담자 셋 체포,
진술 확보.”
“지시자는
노 의원 측
지역구 보좌관.”
“그 보좌관은
‘전략 차원에서
가벼운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주장.”
법률지원단장이
메모를 읽었다.
“검찰은 현재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협박죄’ 등을
검토 중.”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의원님의
개입 여부도
수사선상에
올려놓았습니다.”
회의실 여기저기서
작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아니,
지금 이 판에
그런 짓을 왜…”
“미쳤나,
진짜.”
당 대표가
손을 들었다.
“감정은
나중에 하고.”
그가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선 긋기인지,
함께 버티기인지
판단하는 겁니다.”
조용히 앉아 있던
원내대표가
입을 열었다.
“…정치적으로만 보면
답은 명확합니다.”
그가 말했다.
“선 긋기.”
“노 의원 한 사람을
성벽 바깥으로 밀어내고,
나머지는
‘그 사람 개인의 일탈’이라고
정리하는 거죠.”
정책위 부위원장이
바로 반발했다.
“말이 쉽지.”
“노 의원 혼자 움직인 일입니까, 이게.”
“정 회장이랑
도시 재개발 관련해서
여기저기
얽힌 사람들
한둘이 아니에요.”
“지금
그 사람 하나를 던져버리면—”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찍었다.
“다음 차례가
누가 될지
모르는 겁니다.”
침묵.
당 대표가
입술을 훑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습니까.”
그가 물었다.
“언론이
한 사람을 물어뜯으면
우르르 몰려가서
‘정치 탄압’이라고 막아 주고,
검찰이
한 이름을 겨냥하면
‘검찰 쿠데타’라고 방어해 주고—”
“서로서로
성벽 안에서
등을 맞대고
버텨 왔죠.”
그는
손가락으로
둥근 모양을 그렸다.
“그런데
지금
그 성벽 안에서
서로를 밀어 떨어뜨려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원내대표가
조용히 말했다.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건은
방어 불가입니다.”
그가 말했다.
“USB, 녹음,
파쇄 문서,
이 재문,
최 도윤 진술에—”
“이제는
가짜 전령 공격 연출까지.”
그는
고개를 떨궜다가 들었다.
“여기서
노 의원까지
지키려고 들면—”
“성벽 전체가
무너집니다.”
침묵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당 대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성벽이
금이 가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바깥으로
던져져야 한다.
돌 하나를 빼서
나머지 벽을
지탱해야 한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공식 입장은
이렇게 갑시다.”
그가 말했다.
“첫째,
노 의원의
당직 정지 및 윤리위 회부.”
“둘째,
당 차원의
진상 조사 기구 구성.”
“셋째,
‘도시의 미해결 피해자 문제’에 대한
특별 법안 준비
발표.”
정책위 부위원장이
눈을 부릅떴다.
“결국
버리는 겁니까.”
당 대표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지금 이 판에서는
덜 무너지는 쪽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실 한쪽,
누군가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누가
우리를
이 장부에
어떻게 적어 놓을까요.”
“성벽을 함께 지키던 사람들?
아니면
서로를 밀어 떨어뜨린 사람들?”
대답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3. 떨어져 나가는 돌 하나, 집 안의 침묵
그날 밤,
노 영학의 자택.
도심의 고급 아파트 단지였지만,
거실 공기는
빈 상자처럼
허전했다.
TV에서는
소리가 낮춰진 뉴스가
자막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여당,
노 영학 의원
당직 정지 및 윤리위 회부 결정…”
“당 대표,
‘무거운 책임 통감,
철저한 진상 규명’…”
소파에 앉은 노 영학은
리모컨을 꽉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테이블 위
와인잔은 비어 있었고,
옆에는
먹다 만 약병이
누워 있었다.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께
전화…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노 영학이
천천히 눈을 떴다.
“대표님께서
벌써
결정을 내리셨는데.”
그가 말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나.”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였다.
당 대표 이름 대신,
짧은 메시지 한 줄이 떠 있었다.
“의원님,
지금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악의는 없습니다.
꼭
이해해 주시길.”
노 영학은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악의는 없답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성벽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면서도
‘악의는 없다’고 말하지.”
부인이
손을 뻗었다.
“여보…”
“당신은
그래도
아직 의원이고,
아직 싸울 수 있고,
아직—”
노 영학이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우리는
너무 오래
‘아직’을 믿어 왔어.”
그가 말했다.
“아직 기회가 있다,
아직 돌아올 수 있다,
아직
다 무너지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등 뒤에는
성벽이 아니라
낭떠러지만 남았지.”
그의 눈에
잠시
다른 감정이 스쳤다.
후회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막연한 공포인지.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아이들은요.”
“그…
잡혀갔다는
그 애들…”
노 영학의 손가락이
잠시 움찔했다.
“오백만 원.”
그가 말했다.
“그 아이들
대가.”
“우리는
그 돈으로
무엇을 사려고 했을까.”
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 영학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는
이 도시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렸나.
괴담을 막는다고 말하며
괴담을 키웠고,
도시를 지킨다고 말하며
도시를 파먹었다.
그때,
거실 한쪽에 놓인
TV 화면이 갑자기 바뀌었다.
재방송 중이던
〈시선과 심판〉 프로그램.
윤 서연의 얼굴이
화면에 떠 있었다.
“…저는
장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장부를 써 왔습니다.”
자막이 따라갔다.
노 영학은
잠시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누군가는
장부를 쓰고,
누군가는
장부를 찢고,
누군가는
장부 위에
덧칠을 하지.”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는
장부를
통째로 불태우고 싶어한다.”
부인이
섬뜩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여보,
지금
무슨 생각…?”
노 영학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걱정 마오.”
그가 말했다.
“아직
마지막 카드는
꺼내지 않았으니까.”
부인의 등골에
찬 기운이 스쳤다.
마지막 카드?
그게
이 집을 향한 것인지,
나라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4. 다른 장병들, 같은 막사 – 반복되는 작은 지옥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군부대 내 생활관.
겨울로 향하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막사 안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보일러 때문이 아니라,
긴장과 공포가
공기를 데우고 있어서였다.
철제 침상 줄 사이,
한 병사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팔은 뒤로 꺾인 채
손등이 등 쪽에 닿을 정도로
비틀려 있었고,
등 위에는
다른 병사의 발이 올라가 있었다.
“봐봐,
아직 버틴다?”
발로 밟고 있는 이는
상병이었다.
눈에는
따분함과 권태가 섞여 있었다.
“야,
신병.”
그가 말했다.
“너
전령 믿냐?”
바닥에 엎드린 일병이
이를 악물었다.
“…모릅니다.”
“전령이 아니라도
여기서는
매일 누가
누굴 심판하잖아요.”
상병이 웃었다.
“오,
말은 잘하네.”
그는
좀 더 힘을 줘 밟았다.
바닥에 엎드린 병사의 이마에서
땀이 맺혔다.
생활관 한쪽,
다른 병사들은
눈을 피해
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이번 신병은
얼마나 버티려나.
신고?
누가?
어디에?
어떻게?
문이 열렸다.
소대장이 들어왔다.
상병이
발을 슬쩍 뗐다.
“자,
자습 시간.”
그가 말했다.
“다들 앉아서
내일 훈련 내용 복습해.”
소대장은
대충 둘러만 보더니
나가버렸다.
그도
눈치 채지 못했다.
눈치 못 챈 척했는지,
정말 못 봤는지.
생활관 창문 밖,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시온.
그는
창문 안쪽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이 막사의 장부는
언제나 비슷하다.
누군가는
‘나도 저 때 저렇게 당했다’며
방관하고,
누군가는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며
스스로를 속이고,
누군가는
‘원래 군대는 다 그런 거다’며
장부를 찢어 버린다.
밤.
소등 후,
생활관은
얕은 코골이와
짧은 뒤척임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잠을 자지 못했다.
바닥에 엎드려
발에 밟히던 그 일병은
눈을 감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은
또 뭘 시킬까.
또 몇 시간을
서 있게 할까.
또 누구 앞에서
기어 다니게 할까.
어디까지 참으면
끝이 날까.
정말
끝은 있기나 할까.
그때,
생활관 외부에서
문자 알림음 하나가 울렸다.
“띠링.”
일병의 베개 밑 휴대폰이
조용히 떨렸다.
“…?”
규정상
휴대폰은
소등 후 사용 금지였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규정은
강한 자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그는
살짝 몸을 틀어
베개 밑을 더듬었다.
화면에는
낯선 번호 하나와 함께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연대 인권상담전화입니다.”
“최근
생활관 내 가혹행위
익명 제보 접수됨.”
“혹시
비슷한 일을 겪고 계시다면,
이 번호로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일병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누가?
누가
제보를?
문득,
낮에 생활관 구석에서
쓰기 싫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적던 병장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이틀 전,
부대 인권교육 시간에
배포되던 설문지.
‘최근 6개월 내
부당한 대우 경험이 있었습니까.’
오래 전부터
그런 종이는 존재했지만,
늘 그렇듯
장부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 전,
병장 하나가
그 질문 아래에
조용히 동그라미를 치고
무언가를 적는 걸
누군가 봤었다.
그 장면을
창밖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
생활관 밖에서
설문지를 한 장씩 걷어 가던
중대본부 인사계 뒤로
한 시온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인사계의 손끝이
한 장의 설문지 위에서
잠시 멈추는 것을 보았다.
“이건
복사해서
한 장 더 보낼까.”
그가 말없이 중얼거리고,
다시 설문지를 모아가는 모습까지.
이틀 후,
그 설문지는
연대 인권상담관 책상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 상담관은
익명 제보 시스템에
“○○생활관 내 가혹행위 의심”
이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
한 시온은
생활관 창문 밖에서
잠 못 이루는 일병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일병은
휴대폰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가락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진동이 울렸다.
통화가 연결되었다.
작은 속삭임.
“…저,
제보하고 싶습니다.”
“…제대하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가
이 생활관 안을
제대로 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생활관 밖,
시온의 장부 한 페이지가
조용히 채워졌다.
“○○연대 ○○생활관 –
장기 가혹행위,
첫 공식 제보 접수.”
“인권상담 및 수사,
곧 시작 예정.”
그 옆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주요 가해자 –
상병 ○○○,
추후 별도 심판 대상.”
그 순간,
훈련장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고 하나가
시간을 앞당겼다.
며칠 뒤,
야간 행군 중
상병 ○○○는
암흑 속 경사로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무릎과 발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군의관 진단서 한 줄.
“현역 복무 불가,
의가사 전역 요망.”
생활관 안에서는
이상한 침묵이 돌았다.
누구도
크게 울지도,
크게 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병 하나의 가슴 안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풀려나고 있었다.
한 시온은
부대 앞 언덕 위에서
그 병사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장부를 덮었다.
“도시는
군대라는 이름으로도
작은 지옥을 만든다.”
“하지만
때로는
설문지 한 장과
전화 한 통이
성벽에 금을 낸다.”
5. 다시 모이는 선들 – 칼을 쥐려다 종이에 베인 자
도시로 돌아와,
법률사무소 사이.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새로운 서류가 놓여 있었다.
검찰에서 넘어온
수사 협조 공문,
경찰이 보내온
가짜 전령 공격 사건
수사 결과 일부.
한 지우가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보좌관 진술,
잡힌 청년들 진술,
그리고
통화 내역까지.”
그녀가 말했다.
“이걸로
노 의원 측에서
의도적으로
‘가짜 전령 공격’을 연출하려 했다는 건
거의 확정입니다.”
윤 서연이
서류 구석을 내려다봤다.
“…이걸
우리가 먼저 써도 되나요?”
한 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시기상조.”
그녀가 말했다.
“검찰이
막 기소 방침을 정하려는 단계에서
우리가 먼저
‘정치적 폭로전’처럼
나가 버리면—”
“오히려
수사 의도가
‘언론·야당 합작’이라는 프레임에
빨려 들어갈 수 있어요.”
피해자 대표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
우리는
또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병원,
재개발,
직장,
학교…”
“계속 기다려 오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한 지우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맞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또 기다려야 합니다.”
피해자 대표의 얼굴이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지우는 계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예전에는
우리만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그녀는
서류 더미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검찰도,
법원도,
당 지도부도,
언론도,
각자 자기 장부를 들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움직이고 있어요.”
“예전처럼
한쪽이 멈춘다고
나머지가 다 멈추지는 않습니다.”
윤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한 지우가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는 사이에
장부를 더 채우는 것.”
그녀가 말했다.
“지금
군대,
가정,
요양병원,
복지 시설에서
벌어지는 일들.”
“전령이
어디서
누굴 심판하고 있든,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 남길 수 있는 장부를
계속 써야 합니다.”
피해자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나중에
전령이 있다면,
그 장부도
같이 볼 수 있겠죠.”
“전령이 없더라도,
이 도시는
우리의 종이를
언젠가
읽게 되겠죠.”
한 지우가
노트북을 돌렸다.
“검찰이
기소를 공식 발표하는 날.”
그녀가 말했다.
“그날
우리는
동시에
‘가짜 전령 공격 연출 사건’의 전말을
기사와 보고서,
성명서로 내보냅니다.”
윤 서연이
곧장 메모했다.
“도시의 장부 ⑧ –
칼을 쥐려다
종이에 베인 자.”
그녀가 제목을 읊자
피해자 대표가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씁쓸하지만,
확실한 웃음.
“좋네요.”
그가 말했다.
“칼만
사람을 자르는 게 아니라,
종이도
사람을 벨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거죠.”
사이 회의실 천장 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6. 옥상, 성벽 안의 싸움을 내려다보는 눈
밤.
다시,
한 시온의 옥상.
도시는
멀리서 보면
조용한 빛들의 바다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끝없는 다툼과
밀어 떨어지는 손들로
가득했다.
그의 장부를 펼치자
노 영학의 이름이
붉게 떠올랐다.
“노 영학 –
정 회장 정치자금,
여론 조작 회의,
파쇄 문서,
USB 녹음,
가짜 전령 공격 연출 시도 발각.”
그 옆에는
새로운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당 내부 –
성벽 보존을 위해
노 영학을
바깥으로 밀어내기로 결정.”
시온은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천천히 가리켰다.
“성벽 안에서
서로를 지키던 사람들이
드디어
서로를 밀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이것이
참회인가,
자기보존인가.”
“그 둘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장부의 다른 페이지에는
군부대 생활관 기록이
새로 적혀 있었다.
“○○연대 ○○생활관 –
인권설문 + 익명 제보 + 인권상담 통화
→
부대 조사 및 가해자 전역 조치 예상.”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덧붙었다.
“오늘,
한 병사가
‘누군가 제대로 봐 줬으면 좋겠다’고 말함.”
시온은
눈을 감았다 떴다.
“사람들이
스스로
심판을 시도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국회에서,
법원에서,
언론에서,
군대에서,
작은 방 안에서.”
“그러나—”
그는
노 영학의 페이지로
다시 돌아왔다.
붉은 잉크가
이제는
거의 페이지 가장자리까지
번져 있었다.
“이 사람의 장부는
거의
끝에 다다랐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마지막 줄을 쓰기 전까지,
이 장부는
잠시
닫혀 있겠다.”
그는
붉은 점 옆에
짧게 적었다.
“최종 심판 예정 –
검찰 기소,
법원 1심 선고,
그리고
도시의 반응을
모두 확인한 뒤.”
바람이
장부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수많은 이름들이
여전히 새로 쓰이고 있었다.
이름 없는 가해자들,
이름조차 남지 못한 피해자들,
자기 이름을 적어 넣기 시작한 사람들.
시온은
그 이름들을
하나씩 훑어 내려가며 말했다.
“이 도시의 장부와
나의 장부가
완전히 겹치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잠깐 겹치는 순간이
점점 많아질 수도 있다.”
멀리서
국회의사당 돔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도시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어딘가는
또 다른 회의를 열고 있었고,
어딘가는
또 다른 설문지를 나누고 있었고,
어딘가는
또 다른 폭력을 숨기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조용히 펜을 들고
자기만의 장부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시온은
장부를 덮었다.
“성벽 안에서
서로를 미는 자들.”
“성벽 밖에서
서로를 일으키는 자들.”
“그리고
성벽 위에서
마지막 줄을 쓰는 자.”
그는
도시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
“곧
이 성벽 중 하나는
무너질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의 눈빛이
짧게 번쩍였다.
“이 장부도
다음 장으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겠지.”
밤은
천천히
다음 날을 향해 기울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