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 - 10장 – 칼을 흉내 내는 입, 펜을 겨누는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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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 칼을 흉내 내는 입, 펜을 겨누는 칼
1. USB, 숫자 위에 찍힌 이름들
지방검찰청 별관,
디지털 포렌식 분석실.
모니터 여러 대가 줄지어 서 있고,
창문은 두꺼운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다.
벽에는 시계가 하나 달려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시계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시간은
이 방 안에서
“오래 걸리는 작업”과
“금방 끝나는 작업”으로만 나뉠 뿐이었다.
USB 하나가
작은 금고에서 꺼내져
분석용 컴퓨터에 연결됐다.
화면에
파란 진행 막대가 떠올랐다.
“경로 정리 끝났습니다.”
한 수사관이 말했다.
“폴더 구조 이상 없음.
숨김 파일 몇 개,
삭제 후 복구 흔적도 있습니다.”
검사가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먼저
계약서부터 보죠.”
클릭.
“○○컨설팅 – 노 영학 의원 후원회
‘도시의 전령’ 관련 여론 관리 용역 계약서.”
금액과 기간,
업무 범위 조항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업무 범위:
– 도시의 전령 관련 여론 동향 분석
– 향후 법·제도 통과를 위한 메시지 전략 제안
– 민간·온라인 커뮤니티 여론 분산 전략 포함.”
검사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여론 분산 전략…”
그는
다음 폴더를 열었다.
“/Meeting_Rec/”
– 회의록_1차.txt
– 회의록_2차.txt
– 회의록_3차_정회장_참석.txt
세 번째 파일을 열자
텍스트가 모니터를 가득 메웠다.
“참석자: 노 영학 의원,
정 모 이사,
○○컨설팅 대표,
실무자 이 재문 외.”
“정 모 이사 발언:
‘불만이 많으면
방향만 잘 틀어 주면 됩니다.
화살이 우리를 향하지 않게만 하면 되죠.’”
“노 의원 발언:
‘선은 넘지 맙시다.
다만
사람들이
그 선의 위치를
헷갈리게 만드는 건
괜찮습니다.’”
검사의 눈이
그 문장에 멈췄다.
“선의 위치를
헷갈리게 만든다…”
옆에서
수사관이 말했다.
“직접
‘폭력 연출하라’고 한 말은
없네요.”
“네.”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정도 말을 들은 실무자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USB 안에
녹음 파일도 있습니다.”
다른 수사관이 말했다.
“회의 당시
누군가
음성 녹음을 했던 것 같습니다.
파일명은
‘기록_백업용.wav’.”
검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틀어 보죠.”
스피커에서
잔잔한 잡음이 흘렀다.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
누군가 컵을 내려놓는 소리,
목을 가다듬는 기척.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
“사람들이
더 이상
제도에 기대지 않는 순간부터,
괴담은
스스로 걸어 다닙니다.”
노 영학의 음성이었다.
“우리는
괴담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다만
괴담이
누구를 물어뜯을지—
그 방향 정도는
조정할 수 있죠.”
녹음 속 누군가가 웃었다.
정 회장의 목소리였다.
“하하,
괴담이
우리 편을 물어뜯지만 않으면
다행이죠 뭐.”
이 재문의 목소리가
더 작게 섞여 나왔다.
“어느 정도
‘연출’은 필요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면
사람들은
관심을 안 줍니다.”
잠시 정적 뒤,
노 영학의 목소리가
조금 낮게 이어졌다.
“…선만
분명히 합시다.”
“우리가 직접
칼을 쥐지는 말자고요.”
“칼을 쥘 사람들은
어차피
따로 생깁니다.”
녹음이 끝났다.
분석실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무거워진 것 같았다.
수사관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걸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검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접
살인을 지시한 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이미 칼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잔뜩 갖고 있었죠.”
“그 칼들이
누구를 향하게 될지
계산하고
조정하려 했다는 것.”
그는
녹음 파일 제목 옆에
간단히 메모했다.
“정치자금 +
여론 조작 +
폭력 가능성 인지 후 방치.”
“수사 방향은
이 셋을
한 줄에 올리는 겁니다.”
그의 눈빛에는
잠시 무거운 결의가 스쳤다.
“그리고—”
검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 녹음은
언젠가
법정과
역사 교과서,
둘 중 적어도 한 곳에는
남게 될 겁니다.”
2. 반격 – 카메라 앞에서 칼을 잡은 입
며칠 뒤,
대형 호텔 컨벤션 홀.
벽에는
당 로고와
“진실을 향한 걸음”이라는 문장이
크게 걸려 있었다.
연단 앞에는
카메라들이
둘러싸듯 서 있었고,
중계차에서 나온 케이블들이
카펫 위를 거미줄처럼 가로질렀다.
노 영학은
준비실에서
마지막으로 원고를 훑었다.
법률 자문단이
밤새 다듬은
‘기조 발언문’이었다.
“의원님.”
홍보 전문가가 말했다.
“오늘은
공격받는 사람의 얼굴로 나가셔야 합니다.”
“억울한 사람,
가족까지 끌려 들어간 피해자,
괴담에 시달리는 정치인—
그 이미지로.”
노 영학이
미소를 지었다.
“괴담에
시달리는 정치인이라…”
“예.”
PR 전문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도시의 전령’이라는 괴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프레임을
뒤집어 씁니다.”
“이제
의원님이야말로
‘괴담 2차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밀어야 합니다.”
그는
준비된 문장의 한 대목을 짚었다.
“여기,
기자 이름 넣은 부분—”
“이건
너무 직접적인 공격 아닙니까.”
보좌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윤 서연 기자를
실명으로 거론하는 건
나중에 더 큰 역풍이—”
PR 전문가가
말을 잘랐다.
“그래서
직접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특정 언론인’,
‘선동적인 연재 기사’,
‘괴담 장사꾼’ 같은 표현을 씁니다.”
“궁금한 사람들은
다 찾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노 영학이
서류를 덮었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입으로
칼을 잡아보죠.”
그는
넥타이를 한번 더 조이고
연단으로 향했다.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노 영학은
준비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 앞에 섰다.
“먼저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형식적인 문장.
그러나
그의 눈빛은
곧 다른 방향을 향했다.
“최근
저와 관련된 보도들 가운데
사실과 다른 내용,
왜곡된 추측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는
손에 쥔 종이를 살짝 올려 보였다.
“검찰 수사,
국회 윤리위,
그 모든 절차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하지만
법이 아닌
괴담과 선동으로
한 사람을 재단하려는 시도에는
단호히 맞설 것입니다.”
스크린에는
한 방송사의 그래픽이
짧게 비쳤다.
“도시의 전령”
“장부”
“심판”…
그 단어들은
이미 몇 주째
도시 사람들의 대화 속에
섞여 있었다.
노 영학은
그 단어들을
거꾸로 이용하려 했다.
“도시의 전령이니,
심판이니 하는 말은
원래
썰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슬픈 사건들,
해결되지 않은 고통들이
쌓인 자리에서
튀어나온
집단적 상상력이었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금 낮은 톤으로 이어갔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이 썰을 가지고
장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번쩍였다.
“자극적인 제목,
선정적인 단어,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써 내려가는 연재 기사들.”
“도시의 고통을
이용해 클릭을 벌고,
사람들의 분노를
계속 데워서
자기 이름을 키우려는 시도들.”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윤 서연의 연재를 겨냥한 것이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괴담 장사꾼’**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단어를 또렷이 끊어 말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고,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부풀려
한 사람을,
한 제도를,
한 도시를 통째로
악마로 만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미 상처 입은 피해자들의 삶이
다시
난도질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누굴 대신 옹호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제가
정말로 지키고 싶은 건
제 자리가 아니라,
제도를 통한 정의입니다.”
“칼을 든 전설이 아니라,
펜을 든 시민들입니다.”
그 말은
철저하게 계산된 거짓이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통해 송출될 때,
그 거짓은
때로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언했다.
“오늘부로
저는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해
가능한 모든 법적 대응에
착수할 것입니다.”
“허위 기사 작성자,
악의적 편집을 한 언론사,
사실 확인 없이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온라인 계정들—”
“모두
예외 없이
책임을 묻겠습니다.”
한 줄이
스크린 하단 자막으로 흘렀다.
“노 영학 의원,
‘괴담 장사하는 언론인들,
강력히 대응할 것’”
노 영학은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싸움은
제 개인의 명예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담의 칼날로부터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때의 그의 얼굴은
정말로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만
눈감으면.
3. 뉴스룸 – 칼끝이 펜촉을 겨눌 때
그날 오후,
신문사 편집국.
윤 서연은
기자실 한가운데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포털 메인에 걸린 영상 클립이 떠 있었다.
“노 영학 ‘괴담 장사꾼 언론인’ 정조준 발언”
클릭 수는
눈에 띄는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우측에는
관련 기사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여당 중진 ‘정치적 마녀사냥 중단해야’”
“일각에선 ‘전령 미화 언론 책임’ 지적도”
“일부 커뮤니티,
특정 기자 실명 거론하며 비난…”
마우스를 내리자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윤○○ 기자,
전령 괴담 키운 장본인?”
“도시의 장부,
정의인가 선정성인가”
댓글 창은
더 지독했다.
“얘가 진짜 전령이랑 통화하는 거 아님?”
“기사 나오고 한두 명씩 죽는데
양심이 있냐”
“기자님,
어디 다니는지 다 알아요 ^^”
마지막 댓글에
서연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다 안다고?
그때
편집장이 다가왔다.
“봤지?”
그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기자 개인 공격 들어올 거야.”
“…네.”
서연이 대답했다.
편집장이
책상 모서리에 기대 앉았다.
“일단
회사에서
법무팀 붙였고,
변호사도
한 지우 쪽이랑 같이 움직이기로 했어.”
“허위 사실,
인신공격성 게시물은
모니터링해서
고발 들어갈 거고.”
그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건
회사 보안팀에서 정리한
‘기자 개인 보호 지침’이야.”
거기에는
집 주소·가족 정보 비공개,
출퇴근 경로 변동,
낯선 택배·문자 주의,
SNS 비활성화 등의 항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연이
종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장난 같네요.”
“기사 썼다고
이런 걸
받아야 한다는 게.”
편집장이
짧게 웃었다.
“나도
기자라는 직업이
이렇게 목숨값 비싸 보이던 때는
오랜만이다.”
그는
눈빛을 단단히 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회사 입장은
단순해.”
“우리는
팩트로 썼고,
앞으로도
팩트로 쓸 거다.”
“그 사이에
칼이 날아오면
방패는
우리가 들고 버틸 거고.”
“…정말
버틸 수 있을까요.”
서연이
나직이 물었다.
“의원은
국회,
당,
돈,
사람들…
뒤에
엄청 많잖아요.”
편집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을 꺼냈다.
“윤 서연.”
그가
처음으로
성까지 또렷이 불렀다.
“기자가
세상을 다 이기진 못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진실을 끝까지 따라가는 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진실이 결국
세상을 이기는지 지는지는—”
그는
창밖을 한번 봤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니야.”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따라가야 한다.”
그녀가 말했다.
“도중에
멈추면
뒤에 오는 사람들도
다 멈출 테니까요.”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묻겠다.”
그가 말했다.
“계속
할 거냐.”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서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예.”
그녀가 대답했다.
“계속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녀의 눈빛에
조금 다른 색이 스쳤다.
“이제부턴
제가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칼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더 조심해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편집장이
살짝 웃었다.
“좋아.”
그는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럼
오늘 기사 제목은
네가 칼처럼 뽑아 봐.”
서연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장부 ⑥ –
괴담을 흉내 낸 권력,
칼을 흉내 내는 입”
4. 그늘진 복도 – 아무도 보지 않는 폭력
도시 북쪽,
오래된 빌라 단지.
복도에 깔린
회색 장판에는
담배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고,
현관문 옆에는
옛날 유행하던 탤런트 사진이
바래진 채 붙어 있었다.
3층 끝집에서
소리가 났다.
“조용히 좀 해!”
낮고 씹어 삼킨 듯한 남자의 목소리.
그 뒤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짧게 끊어진 비명,
그리고
아이 울음이 이어졌다.
옆집 문 틈으로
눈동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내밀었다.
또 시작이네.
중년 여자는
귓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경찰도 왔다 갔는데.
실제로
두어 주 전,
한밤중에 112가 출동했었다.
경찰은
현관 앞에서 한참을 씨름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30분쯤 뒤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얘기하고,
서류 몇 장에 싸인을 받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그 장면을
여자는 복도 끝에서 지켜봤다.
그때도
“부부싸움”이라고
넘어갔지.
아이 얼굴이 왜 그런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어.
오늘 밤,
또 비슷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문 밖,
복도 난간 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조용한 발걸음.
한 시온.
그는
문 안쪽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집 장부는
이미
수십 페이지가 넘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경찰 신고 내역,
이웃들의 민원,
학교 상담 기록,
병원 진단서—
다 합쳐도
아직
이 아이의 공포만큼
두껍지는 않겠지.
문 안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울지 말라고 했지!”
무언가 던져지는 소리,
아이 울음이
갑자기 뚝 끊겼다.
정적.
잠시 뒤,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제발 그만해요…”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나보고 어쩌라고!
회사에서도 개같이 굴고,
집에 와서까지
조용할 권리도 없냐?”
그는
테이블을 발로 찼다.
컵이 깨지는 소리,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시온은
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저씨.”
그가
낮게 말했다.
문틈 사이로
걸쇠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문이 확 열렸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
싼 화장품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피가 약간 맺힌 눈으로
시온을 올려다봤다.
“뭐야,
이 시간에.”
“조용히 해 달라는
얘기를 하러 왔습니다.”
시온이 말했다.
남자가 비웃었다.
“여기
우리 집이야.”
“시끄럽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이야.”
문 안쪽,
거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
넘어진 의자,
벽 모서리에
등을 기댄 채
떨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옆에서
아이 하나가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시온은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당신 집 맞습니다.”
“그래서
더
상관이 생겼습니다.”
남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그가
손을 뻗어
시온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모든 소리가
한 번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심장이
가슴 안에서
불규칙하게 뛰었다.
이상하네.
술도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
손에 힘이 빠졌다.
현관 앞 신발장 모서리에
살짝 걸려 있던 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쿵.”
짧은 소리.
남자는
등부터 바닥에 부딪혔다.
머리가
문틀 모서리를 스치듯 치며
다시 한 번 튕겼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여, 여보!”
아이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복도 끝에서
옆집 여자가
입을 틀어막았다.
또…
또다시
‘사고’라고 하겠지.
그러나
이번 사고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시온은
문간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현관 바닥 옆,
작은 종이 봉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는
작은 메모리 카드 하나와
짧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이 카드 안에는
지난 몇 달 동안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원, 경찰, 학교,
어디라도 좋으니
도움을 요청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아무도
‘부부싸움’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글씨는
낯선 필체였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한 냉정이 느껴졌다.
여자는
메모리 카드를
손에 꼭 쥐었다.
아이의 울음은
서서히
‘공포의 울음’에서
‘끝났다는 울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복도 끝,
난간에 기대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온은
작게 중얼거렸다.
“도시는
큰 성벽만
문제인 게 아니다.”
“성벽 안
구석구석
쥐어 뜯고 있는
작은 이빨들이
훨씬 많다.”
그의 장부 한 페이지에는
새 이름이 적혔다.
“○○동 빌라 3층 –
가정폭력 가해자,
장기적 폭력 및 위협,
주변 기관의 방치.”
그 옆에는
짧게 쓰여 있었다.
“심판 완료.
피해자에게
기록 전달.”
5. 반격의 반격 – 종이로 칼을 막는 사람들
며칠 뒤,
법률사무소 사이.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프린트물 더미와
노트북,
녹취록이 뒤섞여 있었다.
한 지우가
서류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게
오늘 의원 측에서 보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예고’ 문서입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약하자면,
‘기사 내용 중
허위 사실이 있다,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다,
10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뭐 이런 내용이에요.”
피해자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10억이요?”
“네.”
지우가 웃었다.
“저분들
액수는
늘 크게 부르잖아요.”
윤 서연은
문서 한 구석을 내려다봤다.
“…변호사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쓴 기사들,
법적으로
문제될 소지가 있습니까.”
한 지우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질문은
두 가지로 나눠서 답해야 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첫째,
기사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느냐.”
“둘째,
기사 작성 과정에서
기자가
합리적인 검증 의무를 다했느냐.”
그녀는
기사와 자료를 번갈아 가리켰다.
“문화센터 계단 가방,
USB,
파쇄 문서 조각,
내부 제보,
그리고
공개된 회의록과 녹음.”
“이 정도면
사실과 의견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검증은
다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미소를 그렸다.
“기자님은
‘선량한 언론인의 주의 의무’를
충분히 지켰어요.”
서연은
조금 숨을 돌렸다.
“…그런데도
저렇게 고소할 수 있나요.”
“고소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한 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문제는
이기는지 지는지죠.”
피해자 대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우리도
같이 고소합시다.”
그가 말했다.
“우리를
‘괴담 장사에 동원된 사람들’이니
뭐니 하는 식으로
말한 거잖아요.”
“우리가
괴담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건데.”
한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기자 개인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 고소,
그리고
피해자들을 ‘선동된 군중’ 정도로 깎아내린 표현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같이 넣을 수 있어요.”
“말하자면—”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칼이 펜을 겨눴으니,
우리는
종이로 칼을 막는 셈이죠.”
서연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종이로
칼을 막을 수 있을까요.”
한 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종이가
모이면
방패가 됩니다.”
“판결문,
기사,
진술서,
진단서…”
“다 종이죠.”
“하지만
그런 종이들이
모여서
사람 하나를
법정에 세우고,
제도를 바꾸고,
때로는
나라를 흔들기도 합니다.”
피해자 대표가
작게 박수를 쳤다.
“저는
종이 한 장 줄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병원에서
우리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적혀 있는 서류요.”
“그리고
또 한 장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제가
그날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적어 보겠습니다.”
윤 서연은
그 말을 듣고
노트를 펼쳤다.
“…그 종이들을
기사에
그대로 담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권력자들이
괴담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삶 전체였다는 걸.”
한 지우가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굵게 썼다.
“1) 의원 측 명예훼손·손배 대응
2) 기자·피해자 측 역공
3) USB·녹음 분석 결과 공개 시점 조율
4) 추가 증인 확보 – 이 재문, 최 도윤 실명 진술”
그녀는
마지막으로
작게 적었다.
“+ 도시에 남아 있는
다른 장부들.”
6. 옥상, 다시 내려다본 성벽
밤.
한 시온은
늘 그랬듯
높은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시끄럽고,
여전히 어두웠지만,
어딘가에서
아주 미세하게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든 장부를 펼치자
여러 이름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노 영학 –
정치자금 의혹,
여론 조작 의도,
괴담을 통한 방향 조정 시도.
의원실 압수수색,
윤리위 조사,
여론 양분화 진행 중.”
그 옆에는
새 기록이 추가되어 있었다.
“공격 방향 변경 –
전령 괴담 → ‘괴담 장사 언론인’ 비난.
칼을 흉내 내는 입,
펜을 겨누는 칼.”
시온은
작게 웃었다.
“칼을 쥔 손보다
더 위험한 건,
칼을 흉내 내는 입이다.”
그는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윤 서연 –
연재 기사 ⑥ 준비 중.
개인 신상 공격,
협박성 댓글 증가.
그러나,
후퇴 없이 전진 선택.”
“한 지우 –
법적 대응 및 역공 준비.
종이로 칼을 막는 사람.”
다른 페이지에는
이름 없는 기록도 있었다.
“○○동 빌라 3층 가정폭력 –
가해자 사망,
메모리 카드 전달.
향후,
피해자 진술과 기록을 통해
제도적 장부에도
일부 반영될 예정.”
시온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시는
많은 장부를 갖고 있다.”
“검찰의 장부,
법원의 장부,
언론의 장부,
피해자들의 장부,
그리고
나의 장부.”
바람이
장부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그는
노 영학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로
다시 돌아왔다.
붉은 점 옆에는
새로운 기호가 하나 찍혔다.
“집행 준비 단계로 격상.”
“인간들의 시도와 상관없이,
일정 시점 이후
심판 개시 예정.”
시온은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인간들에게
맡겨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가
혼잣말로 물었다.
“그들이
칼을 흉내 내는 입과 싸우는 동안,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칼로
조용히
틈새를 정리하겠다.”
그의 눈빛은
조금 슬펐고,
조금 단호했다.
“하지만
잊지 마라, 노 영학.”
그가
도시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너의 장부에서
마지막 줄을 쓰는 손은
아직
너 자신에게 남겨져 있지 않다.”
“사람들이
너의 마지막 줄을
스스로 쓰지 못한다면—”
그는
장부를 덮었다.
“그때는
내가 쓸 것이다.”
도시 아래,
어딘가에서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법원이 다음 기일을 잡고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한 기자가
다음 기사 첫 문장을
다시 지우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한 아이가
오랜만에
조용한 잠을 자고 있었다.
밤공기는
조금씩
다른 냄새를 품기 시작했다.
썩은 냄새와
새로 깎인 돌 냄새,
타고 남은 종이 냄새와
새 종이의 냄새가
뒤섞인 향기.
그건
한 시대의 성벽이
천천히
갈라지는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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