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전령(傳令) - 1장 – 보이지 않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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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보이지 않는 재판
주요 등장인물
1. 심판의 전령 – 한 시온(韓 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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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 스물여섯쯤 되어 보이는 마른 체격의 남자. 검은 머리, 평범한 키, 하지만 눈동자는 나이를 잴 수 없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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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하늘에서 파견된 심판의 전령”.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진짜 악’**을 감지하면 나타나, 흔적 없는 살인으로 심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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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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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에서는 프리랜서 통·번역가, 가끔은 택배 기사, 배달원, 간병인 등 얼굴 없는 노동자로 위장해 출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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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심판할 때, 상대의 기억과 죄를 그대로 눈앞에 펼쳐 보이며, 한 치의 변명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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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흔적은 남지 않고, 검시 결과조차 **“원인 불명의 자연사”**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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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자 기자 – 윤 서연(尹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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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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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종합 일간지 〈도성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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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집요하고, 도덕감각이 과하게 예민할 정도로 곧다. 타협을 잘 하지 못해, 회사 안에서는 “골치 아픈 기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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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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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라며 권력 앞에 무너지는 진실을 여러 번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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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친구 하나가 학교·병원의 잘못된 진단과 부정부패 속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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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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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완전범죄 연쇄 사망 사건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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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이 사실은 “가해자”였다는 진상을 하나씩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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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파고들어도 범인이라는 존재는 그림자조차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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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상 위의 사자(使者)
초겨울의 공기는, 인간의 숨과 거짓말을 다 같이 얼려 버리려는 듯 싸늘했다.
서울 동쪽, 어중간한 언덕 위에 세워진 거대한 병원 건물, 세광병원은 마치 도시의 축 늘어진 어깨 위에 꽂힌 흰 못처럼 서 있었다.
유리와 철골로 덧칠된 외벽은 나트륨등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지만, 그 빛은 따뜻하다기보다는 냉장고 안의 형광등처럼 무심했다.
응급실 앞에는 구급차가 쉬지 않고 들락거렸다.
누군가는 들것에 실려 들어가고, 누군가는 휠체어에 앉아 엉거주춤 고개를 떨군 채 기다렸다.
어디에선가는 울음이 터졌고, 어디에선가는 의사가 낮고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람들의 비명, 푸념, 휴대폰 통화 소리, 키보드 치는 소리, 천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입원 안내 방송이 뒤섞여, 병원 특유의 기묘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가 있었다.
옥상 난간, 안전 바의 바로 안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 깃을 제대로 세우지도 않고, 손은 깊숙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다.
밤공기가 뺨을 때려도, 눈가에 눈물이 맺힐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도, 그는 추위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한 시온(韓 시온).
가까이서 본다면,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쯤 되어 보이는 얼굴.
청년이라 부르기에는 눈빛이 너무 오래되었고, 노인이라 부르기에는 피부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완벽하게 평범한 키와 체격, 어디에 섞어 놔도 눈에 띄지 않을 얼굴.
하지만 딱 하나, 눈동자만은 예외였다.
그 눈동자에는 시간이 켜켜이 결빙된 얼음층 같은 것이 있었다.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이 알고, 그래서 더 이상 쉽게 놀라지 않는 눈.
시온은 아래쪽 병원 건물의 층을 하나씩 훑었다.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 병동, 산부인과, 정신과, 소아병동, 그리고—맨 윗줄의 VIP 병실들.
그의 시선이 13층, 1307호에서 멈췄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자, 멀리 떨어진 병실 창 안쪽 풍경이 마치 바로 앞 유리창 너머처럼 또렷하게 다가왔다.
두꺼운 커튼, 벽걸이 TV, 관리가 잘 된 화분, 고급 디퓨저, 커다란 침대.
그리고 침대 위에, 이 도시의 수많은 호흡 위에 무임승차해 살아온 사내가 누워 있었다.
세광의료재단 이사장, 민 도현.
시온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들숨과 날숨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이름들이 떠올랐다.
한때 뉴스 자막을 장식했던 이름들.
그러나 끝내 해결되지 않은 사건의 유가족들이 입술을 깨물며 떠올리는 이름들.
“○○ 화재참사, 책임자 무혐의 처분.”
“유력 정치인 아들 음주 뺑소니, 집행유예 선고.”
“대형 건설사 붕괴 사고, ‘관리 소홀 인정되나 인과관계 부족’.”
국가가 ‘증거 부족’이라 말하며 덮어 버린 사건들,
수사가 ‘공익 차원에서 종결’되었다는 말 한 줄로 끝난 사건들,
지역사회가 넌지시 입을 닫고 눈을 피하던 비리들.
그 뒤편에서, 피해자들의 불만과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떠돌았다.
죽은 자의 한(恨)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지는 법이지만, 가끔은 너무 깊어서 사라지지 않고 이 도시의 골목과 계단, 병원 복도와 학교 운동장에 들러붙어 남았다.
한 시온이 맡는 건, 그 냄새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존재하는 “억울함의 냄새”.
오늘 밤, 그 냄새는 세광병원 옥상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 도시의 장부가 또 한 페이지를 요구하는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바람에 섞여 곧장 흩어지는 듯했지만, 그의 말은 기도에 가까웠다.
시온은 난간에 손을 얹지도 않았다.
그냥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그의 주변 공기가 아주 조금, 다른 밀도로 흔들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가 향한 곳은 분명했다.
13층, 1307호. 심판의 대상이 기다리는 방.
2. 병실 안의 자기 변명
1307호 병실의 공기는 과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살균 소독제 냄새와 비싼 디퓨저 향이 섞여, 현실감 없는 향취를 만들어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도시 야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환자는 그 풍경조차 제대로 볼 힘이 없었다.
침대에 반쯤 기대 누워 있는 민 도현의 얼굴은, 마치 회계장부 속에서 꺼낸 오래된 숫자처럼 바래 있었다.
그의 심장은, 이미 자기 힘으로 뛰는 법을 거의 잊은 듯했다.
기계는 대신 그의 심장 박동을 흉내 내며, 일정한 간격으로 삑, 삑 소리를 냈다.
침대 옆에는 최신형 혈압계와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줄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머리맡에는 *“세광의료재단 이사장 민 도현”*이라는 명패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 명패만 본다.
그 이름 옆에 붙어 있던,
‘어린이 재단 후원회장’,
‘국가 공로 훈장 수훈자’,
‘희망 나눔 캠페인 공동위원장’ 같은 수식어들을 떠올리며 눈을 찡그린다.
그의 흉곽이 거칠게 들썩였다.
“크흠…”
마른 기침 한 번에도 늙고 지친 폐가 항의하는 듯 뜨겁게 쿡쿡 아파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고요였다.
한때 이 병실은 끊임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정치인, 재벌, 유명 연예인, 의료계 인사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까지—
과일 바구니와 꽃다발, 겉만 번지르르한 위로의 말을 들고 줄줄이 찾아오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방문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사람들은 냄새를 참 잘도 맡아.”
“배를 같이 탔던 놈들도, 이쪽이 가라앉는다 싶으면 제일 먼저 도망치지.”
민 도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언론에 몇 차례 실린 병원 비리 의혹,
소아병동에서 연달아 발생한 아이들 사망 사건,
제약회사의 임상시험 특혜 의혹.
대부분은, 검찰 단계에서 조용히 매듭지어졌다.
“증거 불충분.”
“인과관계 불명확.”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므로, 신중한 수사가 필요하다.”
그 문장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전화 한 통, 술자리 한 번, 비밀 회동 한두 번, 그리고 계좌에 찍히는 숫자.
“나는 이 나라 의료 시스템을 지켰을 뿐이야.”
“어느 병원이나 다 하는 짓이야. 병원 하나가 돌아가려면, 어느 정도 희생은 어쩔 수 없어.”
그는 속으로 오래된 변명들을 되뇌었다.
그 말들은 어느새 그의 신념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엉켜 있었다.
문이 두드려졌다.
“들어와.”
목소리는 가늘고 거칠었지만, 여전히 명령의 습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젊은 간호사 하나가 들어왔다.
가슴에는 **“강 지우”**라는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고, 손가락은 약 봉지를 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사장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지우가 다가오자, 민 도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어제도… 그 기자가 왔다지?”
지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네. 어제는… 소아병동 관련해서 몇 가지—”
“내보내라고 했을 텐데.”
민 도현의 음성이 낮게 갈라졌다.
목소리 속에는 피곤함과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대응은 홍보팀에서 하기로…”
“홍보팀이 뭘 안다고. 숫자 몇 개 맞춰 불어넣는다고 진실이 되나.”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자신도 부인할 수 없는 두려움이 희미하게 비쳐 있었다.
“간호사 양반.”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람은 말이야, 모르는 게 약일 때가 많아.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엔 더 그래.
기자놈들이 물어보면,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그게 살 길이야.”
지우는 그 말에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녀의 귀에는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선생님, 제 아이는… 진짜로 수술이 필요했던 건가요?”
“의사 선생님이, 이 수술이 아니면 희망이 없다고 해서…”
흰 복도를 떠나지 않는 엄마들의 목소리,
아이를 안고 오열하던 아버지의 떨리는 어깨,
무릎 꿇고 **“의료 과실이 아니었다”**고 맹세해야 했던 의사의 흰 장갑.
지우의 눈꺼풀 안쪽에는 한 아이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작은 얼굴, 새파래진 입술,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손을 꼭 쥐던 손가락.
“간호사 선생님, 나… 집에 갈 수 있어요?”
그 아이는 집으로 가지 못했다.
수술은 “예상치 못한 합병증으로 인한 실패”였다.
병원은 최선을 다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안타까운 사고”라고 짧게 다뤘다가 곧 잊었다.
그러나 지우는 알고 있었다.
그 수술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술을 통해 제약회사의 새로운 약을 써먹어야 했던 사람들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 서류에 사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민 도현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자들이 떠들어봤자 아무것도 못 해.
검찰, 국회, 언론, 다들 알잖아.
세상은… 목소리가 큰 쪽이 아니라, 지갑이 두꺼운 쪽이 이기게 되어 있어.
그 기자도, 나중엔 알게 돼.
진실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거.”
지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 안에서 피맛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아직 삼킬 수 있을 만큼 작은 상처였다.
“약… 드시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약을 건네자, 민 도현은 그것을 집어 들어 혀 위에 올렸다.
그때였다.
조명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듯, 방 안 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틱.”
형광등 속 어딘가가 끊어졌다 붙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전등은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꺼졌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켜졌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강 지우는 무언가를 보았다.
침대 휘장 뒤,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치는 지점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얼굴은 또렷했다. 흐릿한 환영이 아니었다.
어두운 눈, 단정한 코, 거친 인상도 아니고, 선하게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마치 이 세상 어느 얼굴과 합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이목구비.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병원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전등이 다시 켜졌을 때,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지우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
약 봉지가 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겨우 손을 움켜쥐어 떨어뜨리지 않았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민 도현이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전기가 잠깐…”
“노후화된 건물도 아닌데, 별소릴 다 하는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자고 싶다.”
지우는 입 안에서 망설임을 한참 굴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병실 맞은편 천장에 달린 CCTV 화면이 “지직—” 하고 한 번 튀었다.
복도 전체 화면이 한꺼번에 잡음으로 뒤덮였다가,
정확히 3초 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록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새벽 3시 12분경, 일시적 전기 이상 발생.
원인: 불명. 추후 점검 예정.”
그러나 그 3초 사이에,
이 병원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한 생명의 줄이 끊어지고 있었다.
옥상 위에서, 한 시온은 그 모든 장면을 벽 너머를 보는 사람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3. 장부에 기록된 죄
시온에게 이 병원의 벽과 층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의 인식은 하나의 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선이 한 번에 겹쳐진 입체적인 시간에 가까웠다.
그가 눈을 감자,
1307호 병실의 현재와, 아주 오래전부터 축적된 과거가 한꺼번에 펼쳐졌다.
한 남자의 인생 전체가,
한 권의 펼쳐진 장부처럼 눈앞에 놓였다.
[민 도현 – 기록 열람]
처음에는 소년이 있었다.
시골 읍내,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는 신작로를 맨발로 뛰어가던 가난한 아이.
샘물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몸이 약한 어머니, 늘 피곤해하던 아버지.
소년은 자랐다.
서울로 올라와, 남보다 두 배로 공부하고 세 배로 구르고 네 배로 참았다.
의대에 합격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교문을 쓰다듬었다.
“어머니, 이제 우리가 병원비 걱정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 약속은,
언젠가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전공의 시절,
그는 처음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시선”**을 배웠다.
병원장이 회진을 돌며 말했다.
“저 환자는 VIP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해.
옆 침대 아이는… 음, 가족도 못 오는 것 같고. 수술 우선순위에서 조금 뒤로 미뤄도 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연구 책임자가 그에게 한 문장을 던졌다.
“도현 씨, 세상을 너무 감상적으로 보면 안 돼요.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는 없잖아요.
누군가는 숫자를 보고 결정을 내려야 해.
그게 ‘위’에 서는 사람의 몫이야.”
숫자가 늘었다.
예산, 보험 수가, 연구비, 실적 평가, 기부금.
그 숫자 사이에, 이름 없는 환자들이 끼어들었다.
“아이 둘, 간 수술 실패. 사망.”
“노인, 폐부종. 수술 중 사망.”
“치료 중 부작용. 가족 동의 하에 추가 처치 진행.”
숫자는 쌓여 갔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 숫자를 ‘성공’과 ‘실패’로만 나누기 시작했다.
아이 하나가 죽어도, 연구 과제가 통과되고,
환자 한 명이 부작용으로 쓰러져도, 제약회사의 로고가 병원 로비에 더 크게 붙었다.
그리고 어느 날,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울부짖었다.
“우리 아이를 돌려달라!”
“병원의 장난감이 아니었다!”
“누가 우리 아이 수술 결정했는지 밝히라!”
민 도현은 TV를 보며 조용히 채널을 돌렸다.
“감정적인 사람들… 참 피곤해.
모든 걸 ‘음모’로 보는 병이야.
의학은 통계로 말하는 건데.”
그 시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경찰이 나서지도 않았고, 국회가 논의하지도 않았으며, 검찰은 **“참고인 조사 몇 번”**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사건 종결 – 증거 불충분]
사람들이 ‘국가가 결정한 결론’을 잊어갈 때쯤,
한 시온은 그 사건들을 다른 장부에 옮겨 적었다.
국가의 장부가 아닌,
법원이나 검찰청에 존재하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 어딘가에 놓인 장부.
그 장부를 지금,
1307호 병실 위에서 다시 펼친 것이다.
“민 도현.”
시온이 그 이름을 불렀다.
소리는 옥상에서 나왔지만,
병실 안 민 도현의 심장 안쪽에서 울리는 것처럼 번졌다.
침대 위에서, 민 도현은 불현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흐…허억…”
갑작스럽게 심장이 빨라졌다.
기계는 이상이 없다고 말하듯, 일정한 속도로 삑삑거리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심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죄다 움켜쥔 것처럼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천장이 길게 늘어나더니, 마치 수술실 천장의 조명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자, 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흰 환자복을 입은 소년,
입술이 푸르게 질린 채,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누군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사장님… 저, 진짜 나을 수 있는 거죠?”
민 도현은 그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때는 기억했지만, 오래전 서류 속 번호로만 대체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나타났다.
세 명, 다섯 명, 열 명.
수술대,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시신 안치실.
아이들은 모두 묻고 있었다.
“정말… 이게 최선이었나요?”
“우리가… 통계였나요?”
민 도현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환각이라고, 병이 만든 망상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빛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수술실 등 아래에서만 나오는 그 특유의 반사광까지 고스란히 재현된 눈동자였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명을 하면, 네가 살던 세상에서는 먹혔다.”
낯선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법정, 회의실, 국회 청문회, 기자회견장에서 수없이 들어온 말투와 억양들이 섞인 듯한 목소리.
민 도현이 눈을 치켜떴을 때,
침대 발치에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제 강 지우가 본 그 얼굴이었다.
“…넌… 누구야…”
민 도현의 쉰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이 병원의 기록에 내 이름은 없다.”
남자의 말투는 담담했다.
“국가의 장부에도, 너의 두터운 인맥이 모아 둔 서류에도,
나는 적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너의 죄가 적힌 장부에는, 나는 반드시 서명하러 온다.”
남자의 손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움직이자,
눈앞의 환상들이 더 선명해졌다.
소아병동에서 연달아 죽은 세 아이,
그보다 수년 전, 간단한 수술이라며 집도했다가 사망한 아이,
실험 약물 부작용으로 장기가 망가져버린 아이.
그리고 그 뒤에서 서류를 넘기던 손.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유도하던 웃는 얼굴.
“우리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며 허리를 숙이던 노련한 몸짓.
“나는… 나는 병원을 살린 거야…”
민 도현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나라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안 해주고, 의사들 다 탈진하는 판에…
이 정도 타협은 누구나—”
“타협이라 부른 것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피 위에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아주 조금 갸웃했다.
“너는 ‘아이 하나쯤’이라고 생각했겠지.
‘통계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더 많은 환자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라고.”
민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평생 붙잡고 있던 문장들이 그대로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국가도, 검찰도, 병원 윤리위원회도,
결국 너의 숫자 놀이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다.”
그 말 속에는 어떤 자만도, 분노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에 결정된 일을 확인하듯,
그저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 같은 건조함.
“나는 이 도시의 불만을 대신 청취한다.
법정에서 묻히고, 진정서함에서 찢기고,
민원 게시판에서 ‘접수 완료’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 목소리들을.”
민 도현은 숨을 헐떡였다.
“사람들… 다 잊었어…
부모들도, 유가족들도… 아무도 더는…”
“잊은 적 없다.”
남자가 잘랐다.
“다만 이 도시의 인내심이 네가 보는 TV 뉴스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밤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너의 이름은 사라진 적이 없다.”
남자의 눈빛이 잠시 허공 어딘가를 스쳤다.
그곳에는,
병원 로비에서 수차례 쫓겨난 뒤,
결국 국회의사당 앞 계단에서 무릎을 꿇고 사진 한 장 들고 울부짖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 있었다.
사진 속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그날보다, 몇 달 전의 모습이었다.
국회는 그 아버지의 울음을
‘민생이 너무 많아서 다 챙길 수 없다’는 말로 묻었다.
“국가가 좌석을 내주지 않은 사건들을,
지역사회가 더 이상 눈 돌릴 곳 없는 사건들을,
나는 대신 맡는다.”
남자의 음성이 낮게 내려왔다.
“사람들의 불만은, 공기 속에 오래 떠다니면 독으로 변한다.
누군가는 그 독을 치워야 한다.
오늘은… 그 독의 한 근원을 처리하러 온 것뿐이다.”
그 순간, 민 도현의 심장은 마지막 저항을 시작했다.
혈관 곳곳에서 뜨거운 저항이 일어났다.
뇌 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 기억들이 뒤엉켜 튀어 올랐다.
“안 돼… 나… 나는… 아직 할 일이…”
“너의 할 일은 여기까지다.”
남자는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말했다.
“심판은 네가 쌓아 올린 것의 결과일 뿐이다.
나는 그저 마지막 페이지에 줄을 긋는 자.”
그의 손이 허공을 스치자,
민 도현의 몸이 짧게 들썩였다.
심전도 모니터가 한 번 크게 출렁였다가,
곧, 일직선으로 펴졌다.
“삐—————”
경고음이 울렸다가,
같은 순간, 병실 전체 전기가 한 번 더 나갔다 켜졌다.
복도 CCTV는 또다시 3초간 화면을 잃었다.
간호사 호출 버튼은 눌리지 않았고,
심폐소생술이 시작되는 긴박한 소동도 없었다.
기계는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측정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조용해졌다.
의무기록에는 이렇게 적힐 것이다.
“새벽 3시 12분, 심부전으로 인한 사망.
기저 질환에 따른 자연사로 추정됨.”
검시관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유가족들은 대충 준비된 멘트를 들을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민 도현의 영혼은 어디론가 깊이,
아주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한 시온은 그가 떨어져 내려가는 방향을 잠시 따라가 보았다.
빛이 아닌, 소리가 아닌, 죄책감과 공포의 밀도로만 이루어진 낭떠러지.
“형량: 그가 숫자로 지워버린 이름들만큼의 끝없는 추락.”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병실에서, 옥상에서, 이 도시의 한복판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4. 기자, 냄새를 맡다
다음 날 오전,
〈도성일보〉 사회부의 공기는 커피 냄새와 피곤한 사람들의 체취, 오래된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가 섞여 무거웠다.
형광등은 여전히 싸구려였고, 천장은 얼룩이 졌고, 창문 틈새로는 미세먼지가 억지로 들락거렸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천장의 얼룩이 아니라, 모니터 위로 흐르는 속보들이었다.
윤 서연은 종이컵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뜨거운 액체가 목을 긁고 내려갔지만,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빨간 ‘속보’ 표시가 떴다.
[속보] 세광의료재단 민 도현 이사장, 입원 중 숨져…
병원 측 “지병 악화에 따른 자연사”
서연은 그 문장을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제 오후,
그녀는 세광병원 로비에서 세 시간을 서성거렸다.
소아병동 의료진을 만나겠다고 집요하게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홍보팀 직원의 빈말뿐이었다.
“환자 개인정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관련 내용은 공식 보도자료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무수히 들어 본 답변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달 전, 세광병원 소아병동에서 어린아이 셋이 연달아 죽었다.
한 달 사이, 비슷한 시각, 비슷한 층, 비슷한 진단서.
병원은 “지병 악화”이라고 발표했다.
그렇게 말하는 입술은 연습된 뉴스 앵커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연은, 제보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기자님… 애들이요… 그냥 숫자였어요.
실험 약물, 실적 맞추려고…
의사들은 대부분 모르고요,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였어요…”
제보자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두어 번 통화한 뒤, 연락이 끊겼다.
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사라졌다.
“지병 악화라…”
서연은 모니터에 뜬 단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이 셋이 같은 병동에서 같은 시각대에 죽고,
그 서류에 사인한 이사장이…
두 달 뒤, 똑같이 새벽 3시쯤 자연사?”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메모장을 열었다.
이미 적혀 있던 기록들이 눈에 들어왔다.
“A군 – 사망 시각 3시 07분, B양 – 2시 58분, C군 – 3시 10분.
사인은 모두 ‘심정지’, ‘상태 악화’.”
그리고,
오늘 속보에 적힌 시간.
“민 도현 – 새벽 3시 12분 사망.”
“…너무 예쁘게 겹치는데?”
그녀가 낮게 중얼거릴 때, 옆자리에서 의자가 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야, 윤 서연. 또 음모론이냐?”
사회부 선배인 박기훈이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다가왔다.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조금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이사장이 나이도 많고 지병도 있었다잖아.
그냥 수명이 다한 거지, 뭘 또 세상의 어두운 비밀을 찾아내려고 그래.”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세상이 이 모양인 거 아니에요?”
서연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이 셋이 죽고,
책임자가 죽고,
그 이전에 의료 과실 의혹은 대충 덮이고.
이런 패턴, 우리 너무 많이 봤잖아요.”
기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많이 보긴 했지.
근데, 봤다고 해서 매번 ‘거기에 더 큰 음모가 있다’ 생각하는 것도 병이야.
세상 일의 반은 우연이고, 나머지 반은… 타이밍이 나쁜 거지 뭐.”
“전, 그 나쁜 타이밍을 파는 직업인데요.”
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게다가 이 병원, 요즘 국가 어린이 재활 프로젝트랑 공공의료 확충 사업으로 이미지 세탁 중인 거 몰라요?
나라에서 돈도 주고, 언론은 광고도 받고.
그런 곳에서 계속 아이가 죽으면, 대체 누가 책임을 져요?”
기훈이 잠시 눈을 피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팀장님이 그러시더라.
요즘 병원 쪽 광고 많이 들어온다고.
당분간 세광 쪽은 조용히 좀 있으라고.”
서연은 이번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기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래서요?
광고 많이 들어오면, 아이 셋은… 그냥 ‘안타까운 사고’가 되는 거예요?”
기훈은 한숨을 쉬었다.
“넌 참… 살기 힘들겠다, 그렇게 살면.
그래도… 알지?
우리가 쓴 기사로 세상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는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누군가 한 줄은 남겨야죠.
나중에라도, 누가 장부를 다시 펼쳐볼 수 있도록.”
그녀의 말 속에는 묘하게 ‘장부’라는 단어에 대한 집착이 묻어 있었다.
기훈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서연은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민 도현 자연사.”
그 단어 뒤에는,
**“국가, 더 이상 책임지지 않음”**이라는 문장이 보이지 않게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거기서부터 쓰고 싶은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는데?”
기훈이 물었다.
“세광병원이요.
아직 장례식장도 안 꾸려졌겠지만,
병원 공기에 남아 있는 냄새 정도는 맡아봐야죠.”
5. 병원 복도에서 만난 그림자
세광병원 로비는 회색과 흰색, 그리고 돈의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대리석 바닥, 유리 벽, 반짝이는 금속 손잡이, 최신식 안내 키오스크.
벽면에는 ‘국가 공로 의료기관’이라는 액자와, 유명 연예인들이 기부 행사를 했다는 사진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깨끗하네… 지나치게.”
서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로비를 훑었다.
기자증을 목에 걸고 카메라를 든 몇몇 취재진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병원 홍보팀 직원이 정제된 표정으로 브리핑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사장님의 사망은 오랜 지병 악화에 따른 것으로,
외부 요인이나 의료 과실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저희 병원과 유가족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겨 있으며—”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도 아니었다.
서연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경비원 하나가 다가와 막으려다가, 그녀의 기자증을 보고는 어정쩡하게 물러섰다.
“소아병동이요.”
버튼을 누르며, 서연은 엘리베이터 천장을 올려다봤다.
곳곳에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CCTV는… 어디까지 찍고, 어디까지 지울까.”
엘리베이터 안 스피커에서, 새벽 속보를 요약하는 TV 뉴스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새벽 3시 12분경, 세광의료재단 민 도현 이사장이 입원 중이던 병실에서 숨졌습니다.
병원 측은 이전부터 앓아 왔던 지병이 악화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3시 12분.
서연은 숫자를 한 번 더 마음속으로 굴려 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소아병동 특유의 알록달록한 벽화와,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소독약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복도 한쪽에서는 아이가 울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보호자가 간식을 정리하고 있었다.
간호 스테이션에는 피곤한 얼굴의 간호사 몇이 자판기 커피를 들고 서류를 정리 중이었다.
서연이 다가가자, 한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강 지우.
어제 로비에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그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제도 뵀던… 〈도성일보〉 윤 서연 기자입니다.”
지우의 얼굴에 짧은 긴장이 스쳤다.
“죄송하지만, 기자님.
환자 관련 정보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네. 그 규정, 너무 잘 알아요.”
서연이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저도 그걸로 매번 부딪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다른 걸 여쭤보려고 왔어요.”
지우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눈 밑 그림자가 어제보다 더 깊게 내려와 있었다.
“두 달 사이에 아이 셋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이사장님이 죽었죠.
시간대는 다 새벽 3시 전후.”
지우의 손가락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기사에 쓰려면,
최소한 한 번은 ‘우연이 아닌 방향’으로 의심해 보는 편이라서요.”
잠시 침묵.
복도 끝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서연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새벽 3시 12분,
이 병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공식적인 설명 말고요.
간호사님 눈에, 귀에, 피부에… 부딪힌 일.”
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대신, 오른손 엄지를 손바닥에 깊게 파고들도록 쥐었다.
“…전기가, 나갔어요.”
그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도 전체가 딱 한 번,
1초쯤… 캄캄해졌다가 다시 켜졌어요.
CCTV 모니터도 3초 정도 ‘신호 없음’이 떴고요.
전기실에서 점검 나왔는데, 이유를 못 찾았대요.
그냥, 잠깐의 이상이라고.”
“아이 셋이 죽었을 때도 그랬나요?”
서연의 질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우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비슷한 시간대에 울리던 경보음,
잠깐 꺼졌다 켜지는 복도등,
그리고 사람들이 바빠서, 혹은 두려워서 깊게 묻지 않았던 수상함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때도… 비슷했어요.”
서연의 심장이 규칙을 찾은 사람처럼 또렷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저는… 봤어요.”
지우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귀에서 피가 쏠릴 만큼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사장님 병실 안에서,
전기 나갔던 그 짧은 순간에—
검은 코트 입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어요.”
서연은 펜을 꾹 쥐었다.
“보호자? 의료진?”
“아니요.
보호자는 새벽에 들어올 수 없고,
그 사람, 우리 병원 직원이 아니었어요.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전기가 다시 들어오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눈으로 봤지만,
기계는 보지 못한 사람.
마치—
기록 밖에서 움직이는 존재처럼.
서연은 수첩에 ‘검은 코트’라는 단어를 적었다.
그러고는 펜 끝을 잠시 멈췄다.
“간호사님.
국가가, 병원이, 이 병동이…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사건들이 있죠.”
지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있어요.”
“그 사건들을,
누군가 대신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보셨어요?”
그 질문은,
한편으로는 허무맹랑한 소설의 도입부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우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복도 곳곳에 달린 CCTV와, 감시 센서, 투명한 유리.
그 아래에 누워 있는 아이들과, 병문안을 온 부모들.
“…사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누군가는 다 보고 있겠지, 하고.”
그녀는 서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밤,
10시 이후에… 소아병동 직원 휴게실에 오세요.
책장 맨 위에,
버려진 잡지 더미 뒤를… 한 번 보세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은 이미 수첩에 적었다.
“오늘 밤 10시, 소아병동 휴게실, 책장 맨 위.”
6. 병원 앞 벤치의 남자
병원을 나오는 길,
서연은 정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취재진 몇이 병원 대변인을 붙잡고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사장의 죽음과 최근 소아병동 사망 사건들 사이에 연관성은 없습니까?”
“병원 비리 의혹과 관련해 유가족들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는데—”
대변인은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어떠한 연관성도 없습니다.
안타깝고 불행한 일들이 겹쳤을 뿐입니다.
억측과 음모론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병원은 앞으로도 환자 중심의 의료—”
서연은 그 말에서 귀를 떼었다.
그 문장들은 이미 머릿속에 똑같이 저장되어 있었다.
“억측과 음모론.”
“불행한 우연.”
“안타까운 사고.”
국가와 병원이,
자신들이 해결할 의지가 없는 사건을 소개할 때 쓰는 상투적인 단어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병원 정문 옆 벤치를 보았다.
그곳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종이컵 커피를 들고,
로비 쪽을 향해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특이점이 없었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의 얼굴.
그러나 서연의 시선은 이상하게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본다’기보다는 **‘측정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사람을 관찰하는 시선이 아니라,
사건을, 구조를, 전체를 훑어보는 시선.
서연은 무의식적으로,
어제 밤에 읽었던 오래된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미제 사건 10년, 끝내 잡지 못한 범인들]
[돈과 권력 앞에서 멈춘 수사들]
그때, 남자가 먼저 시선을 거둬들였다.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더니,
금방 눈에서 사라졌다.
서연은 한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다가,
휴대폰 메모장을 꺼냈다.
“검은 코트의 남자 – 병실 목격, 병원 앞 벤치 목격.”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을 덧붙였다.
“국가가 처리하지 않은 사건들을,
대신 정리하는 ‘심판자’가 있다면—
그는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문장은 농담처럼 보였지만,
서연의 손끝에서는 농담처럼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메모장을 닫고,
천천히 병원을 떠났다.
오늘 밤 열 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면서.
7. 하늘의 장부와 지상의 노트
해가 완전히 저물고,
도시의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제 몸을 과시하기 시작할 즈음,
어딘가 아주 조용한 방 안에서,
한 시온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은 낡은 원룸이었다.
벽지는 군데군데 뜯겨 있고, 싱크대는 오래되었고, 창문 틈새로는 바람이 스며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배달 기사나 편의점 야간 알바생이 살 법한 집.
그러나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장부만큼은,
이 방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장부는 타지 않는 종이로 되어 있었다.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물에 담가도 젖지 않고, 찢으려 해도 찢기지 않았다.
인간의 손은 그것을 들 수도,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었다.
오직 한 시온만이 그 장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펜을 집어 들고,
오늘 날짜를 적었다.
[20XX년 11월 ○일]
그 아래에, 또렷하게 한 줄씩 써 내려갔다.
민 도현 – 심판 완료.
죄목: 의료 권력과 재단의 번영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을 통계 숫자로 치환함.
국가와 병원이 외면한 사건들에서, 최종 책임을 회피함.
형량: 그가 숫자로 지웠던 이름들만큼, 끝없이 반복되는 추락 속에서 각자의 얼굴을 다시 마주함.
펜 끝에서 잉크가 조금 번졌다.
시온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지도 않았다.
“이 도시의 불만이,
하루 동안 조금 가벼워졌다.”
그는 작게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중얼거림이었다.
창문 너머,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 소리,
골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TV 뉴스 소리가 뒤섞여 들어왔다.
TV에서는,
오늘도 정치인들이 ‘민생’을 말하고 있었다.
병원 비리 특위 구성 여부를 두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는 모습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논의 중.”
“협의 중.”
“추후 검토.”
그 말들 뒤편에서,
실제로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는 걸, 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있었다.
“국가가 미루는 사건,
사회가 포기한 사건,
지역사회가 ‘어쩔 수 없다’며 눈감은 사건들.”
그는 장부를 덮었다.
“그 사이에서 버티는 사람들이,
밤마다 잠들 수 있도록—
나는 조금 느리게, 그러나 반드시 걸어간다.”
그 시각,
도시의 다른 한편에서는,
윤 서연이 작은 카페 구석에서 노트를 펼쳐 두고 있었다.
“세광병원 소아병동 사망 사건 – 1보 초안.”
그녀는 첫 문장을 쓰기 전에, 잠시 펜을 멈췄다.
‘이 기사가 세상을 바꾸진 못하겠지.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 다시 장부를 펼쳐볼 때—
적어도 한 줄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녀가 적어 내려갈 기록과,
한 시온이 장부에 남긴 기록은 서로 닿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둘의 기록은 한 지점에서 겹쳐질 운명이었다.
국가가 버린 사건들을 대신 해결하는 전령과,
국가가 버린 진실을 끝까지 써 내려가려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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